화랑의 윤리와 창작 투자
critic & column | 2007/02/23 16:48
화랑의 윤리와 창작 투자
2006년 말에 발행된 <예술진흥법 제정을 위한 기본연구>에 따르면 창작스튜디오를 문화시설로 규정하고 국가가 창작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창작스튜디오를 작품 생산을 매개하는 사적 영역으로만 규정하던 이전의 관행을 깨고 공적 영역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화랑의 창작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의 서두에 이 법안을 거론한 것은 창작이라는 행위가 사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영역일 수 있다는 점을 추론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창작지원이라는 개념이 정당한 것인지를 되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창작은 예술가 주체의 개인적인 감성표현’이라는 인식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일반적 정의일 것이다. 예술창작 행위를 예술가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행위로 규정하려는 시각은 예술가의 삶을 자율성에 입각한 내밀한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창작 행위는 사회적 규범 속에서 정의되기 보다는 예술가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창의적인 예술가 주체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매우 사적인 행위로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뒤집어서 말하면 자율성을 등에 업은 자폐의 나락이었다는 것이 20세기 후반 이래의 반성이다.
작업실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정책과제들은 예술의 생산과 매개와 향유의 체계를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나온 새로운 비전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창작지원이라는 주제와 연관해서 생각해보자면 창작의 결과뿐만 아니라 창작의 행위에 대해서 체계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예술이 사회적 규범 속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는 안팎의 요청은 한국예술계에서도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나타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국가가 창작공간을 지어서 운영하겠다는 법안이 그것이며, 이미 여러 공공기관과 공적자금이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거나 짓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작업실담론을 토대로 해서 창작행위의 사사(私事)성을 공공성으로 견인해내기 위한 담론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예술창작은 사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영역이라는 점이 법적 규정에 의해 제도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랑과 예술창작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껏 화랑은 예술창작의 동인이나 과정보다는 예술창작의 결과를 시장에 매개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말 ‘나까마’라는 표현 속에서도 드러나듯이 예술작품이라는 상품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고 그것을 싸게 구입해서 좀 더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식의 작품 소매상 역할을 화랑의 몫으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화랑은 예술창작과 향유를 매개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주로 감상과 교육을 통한 향유가 미술관과 같은 비영리미술문화공간의 몫이라면, 화랑은 예술작품을 사적소유나 공공컬렉션과 매개하는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차이를 망각하건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화랑은 예술창작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화폐교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화랑은 창작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이윤창출이라는 목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달성해야 한다. 따라서 화랑은 작품 소매상의 역할에서 창작의 원인행위와 과정과 그 결과 자체를 하나의 체계로 인식하고 보다 정교하고 정확하게 개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합목적적인 화랑의 윤리인 것이다.
한국의 몇몇 화랑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전속작가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생활비와 재료비를 지원해온 사례가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창작투자 시스템으로 자리 잡기에는 아직 전반적인 시장합리성이 떨어지는 상태이다. 한국의 미술계 수준이 시장을 비롯한 다양한 기제와 영역에 있어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대전제로 놓되, 그렇다고 해서 창작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유보할 일이 아니므로, 예술창작을 활성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투자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스튜디오 공간지원 프로그램이나 문예진흥기금과 같이 창작에 비영리의 차원에서 창작을 지원하는 것은 뚜렷하게 창작지원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지만, 화랑의 경우 창작지원이라는 표현은 모순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창작 지원이 아닌 투자 개념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화랑이 작가를 지원한다는 개념은 모순된 개념이다. 기실 화랑주의 신념이나 특수관계에 따라서 작가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화랑은 엄연한 이윤추구집단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 상호간 이롭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화랑들은 오래지 않은 시간동안 압축성장을 통해서 화랑과 작가의 관계를 정상화시켜나가고 있다. 가나화랑의 경우, 오랫동안 전속작가 시스템을 꾸려오고 있으며, 아뜰리에를 만들어 작가들을 입주시키고 화랑의 다양한 마케팅 시스템과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하며, 서울 인근에 대규모 창작촌을 조성해서 분양함으로써 여러 화랑과 기업들이 작가를 입주시키고 나름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나가도록 했다. 연간 몇 명의 작가를 해외의 아뜰리에로 보내는 프로그램과 신진작가를 선정해서 전시를 여는 신진작가 발굴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갤러리현대와 국제화랑, 표화랑 등 국내 유수의 화랑들도 전속작가 제도를 운영하거나 국내외의 공간 확대를 통해서 직간접적인 투자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전속작가제도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체계적인 마케팅을 통해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작품세계가 이래저래 작가의 창의력이 간섭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랑의 창작지원은 엄밀히 말해서 지원이라는 범주에 넣기 어려운 특수성이 있다. 대다수의 화랑들은 작가를 지원하지 않는다. 다만 투자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하면서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경영 마인드로 창작 투자 시스템을 만든 사례로 아라리오의 경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라리오는 매우 이레적인 창작지원 혹은 투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파격적인 전속작가 체계를 바탕으로 천안과 서울, 베이징, 그리고 올해 오픈할 예정인 뉴욕에 이르기까지 갤러리를 열어놓고 전방위의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로서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창작지원으로서는 초유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일반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을 수 없는 매우 특수한 사례라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특수한 사례이므로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자본을 가진 기업이 경영마인드에 따라 예술가에게 투자하는 행위이므로 기업윤리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아라리오 작가군이 모종의 역할 모델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은 그야말로 비평적인 관점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아라리오 전속작가들이 젊은 나이에 자발적 가난을 접고 안정적인 생활과 전적인 창작활동을 보장받았을 때, 그 이후에 작가로서의 삶에 응답하는 예술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그마저도 말 그대로 작가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일각의 우려는 이러한 작가들이 가두리양식장 같은 보호의 틀을 벗어났을 때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미술계가 아라리오를 통해서 작가지원이 아닌 창작투자로의 발상 전환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사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술가의 창작은 예술가주체의 개별적인 행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국가공동체의 문화생산이라는 거시적 관점의 공적영역이기도 하다. 예술창작의 사회적 역할이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랑과 예술창작은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국가는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위해서 공공영역의 틀로서 창작을 지원해야 할 것이고, 화랑은 시장합리성을 높여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창작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창작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창작 관련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겠는가. 자본주의 경제체계와 예술창작을 매개하는 주체인 화랑은 스스로의 윤리를 준수하는 제1원칙을 창작 투자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전지구화 시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예술과 향유를 매개하는 화랑의 제 역할을 감당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경희대 겸임교수)
* 미술세계 2007년 3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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