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새로운 미술개념을 위한 시론

critic & column | 2005/10/04 14:01


물공장을 생태공원으로 되살린 선유도 공원의 녹색기둥의 정원. 미술을 보편적 담론 공간이 아닌 생활영역의 지역적 특성과 연결한 좋은 사례로 꼽힌다.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새로운 미술개념을 위한 시론
: 지역성, 공동체, 공공성, 예술행동주의를 중심으로


김준기(예술학)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이다. 특히 이분법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 공세로부터의 탈피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중심에 두고 진보와 보수를 가늠했던 지난 시대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넘어서, 21세기 당대의 현실 앞에서 새로운 미술개념은 가능한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지평 속에서 예술이 감당해내야 할 사회적인 역할이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진보적인 미술개념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적 기표를 실재하는 그 무엇과 보다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자 하는 포스트모던한 문화전략의 흐름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예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망의 최소의 공리(公理)는 존재한다. 시각언어 고유의 목적과 지향을 밝히고 그 방법에 대해 세세하게 짚어 보는 것이 미술비평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동시대 미술지평을 읽어내는 데 커다란 결함이 있다. 복잡다단하게 흘러가는 미술지평을 읽어내는 키워드를 미술 내부의 문제로 환원하려고 하는 태도들은 종종 자폐적인 미술언어의 동어반복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폐적 상황을 넘어서고자 문화적 세계화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지역성의 문제, 삶 속에 뿌리내리는 예술을 지향하는 공동체미술,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 정당화 과정으로서의 공공미술,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의 보루인 탈이데올로기적인 지향을 가지고 아트와 액트의 경계선상에서 유희하는 아티비즘 등의 논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짧은 지면이라 이들 중 하나를 제대로 언급하기도 힘들 테지만, 당대의 예술사회학적인 현안을 시론(試論) 차원에서 헤아려보기 위해 간략히 논점을 요약해 볼 생각이다.

지역성, 문화적 세계화에 대한 대응
각 국가 간의 장애요소들을 걷어내고 자유롭게 교역과 통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경제 영역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와 군사,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거세게 몰아닥치는 거대한 열풍이다. 그 열풍은 필히 제거되어야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무역에 있어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조세장벽을 걷어내는 것이 경제에 있어서의 전술적 목적이라면, 문화에 있어서 작은 단위의 문화적 정체성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엮어 새로운 중심아래에 편재하는 것이 문화적 세계화의 핵심이다. 따라서 문화적 세계화가 걷어내고자 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지역성이다. 세계화와 지역성(globalization & locality)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개념이다. 따라서 세계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힘은 각 지역의 이질적인 요소들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단은 문화적 세계화의 대응 논리로서의 지역적 정체성을 옹호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세계화 체제 속의 문화정체성과 예술에 있어서의 지역성의 문제는 막연한 세계화, 국제화 추세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콤플렉스를 떨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대응 논리로서의 지역성 논의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이라는 애매한 절충주의적 입장에 의해 상당부분 호도되어 왔다. 그것은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을 뒤섞어서 ‘전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구호를 낳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전세계적인 사고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중심으로 편재된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 서구중심의 사고를 전제로 한 지역적 실천은 한갓 헛된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릇된 전략이라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따라서 지역성을 사고하는 문화예술적 전략은 철저하게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 위에서만 가능하다.

2005 일산오픈스튜디오 오픈 장면. 일산 지역의 작가 40여명이 작업실을 개방하여 커뮤니티 아트를 실험하는 열린 미술의 장이다.


공동체, 삶 속에 뿌리내리는 예술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질서와 정서에 대한 총체적인 언설일 수도 있지만, 지역 공동체의 소소한 맥락 속에서 자분자분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또한 예술은 거대하게 휩쓸고 지나가는 광풍일 수도 있지만,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에 살포시 고개를 돌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부드러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술을 전일적 가치체계로 파악하는 것과 지엽적인 감성적 인지체계로 간주하는 것이 상호 대등한 수평적 개념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 이후의 모더니즘 미술은 자본주의적인 상품 체계에 의해 완벽하게 조율되고 있다. 예술가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작품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이나 불쾌함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품화의 부담은 예술창작을 주눅 들게 하거나 예술가의 건강한 정서를 좀먹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품화의 문제에 대해 공동체 속에 뿌리내린 예술은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익명성에 의존하는 예술시장의 스타시스템에 의해 견인되는 지금의 미술시장의 좁디좁은 문을 관통하지도 않고 행복한 예술창작을 열어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미술문화는 그 어떠한 장르에 비춰 보아도 철저하게 산업화의 경지와 동떨어진 자유로운 영역이다. 그것은 관객과의 불화를 의미하며 필경 문화산업으로부터의 소외를 내포하고 있다. 관객의 환대를 받는 예술과 관객으로부터 냉대를 받는 예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문화산업적 차원에서 대중과의 친밀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찾으려는 경향들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세례에 대한 또 다른 대안으로서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미술, 즉 커뮤니티 아트의 구상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예술가의 활동이 공동체 단위의 삶과 친밀하게 결합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소비사회 시스템에 대한 예술적 대응일 수 있지 않겠는가. 공동체의 감성과 가치지향을 예술적 콘텐츠로 확보하고, 그 작품의 향유와 유통을 담보하는 하나의 구심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중심을 사고하는 포스트모던한 문화전략과 만나는 또 다른 출구가 될 것이다.

최평곤의 공공미술 작품. 공공장소와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의 지위와 역할은 정치적 공론장을 넘어 문예적 공론장의 가능성을 복원해야 한다.


공공성,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 정당화
미술이 사회에서 예술공론장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이 공공성의 핵심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근대사회 이후 문예적 공론장과 정치적 공론장이 여론 형성과 공공성 형성에 기여해 왔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에 따라 문예적 공론장이 쇠락하고 정치적 공론장만이 현대사회의 매스 미디어와 결합하여 공공의 생동감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예술은 과연 탈정치의 장이 될 수 있는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P. 부르디외에 따르면 예술은 탈정치인 영역이 아니라 치열한 문화정치의 장이다. 계급과 계층의 상충하는 문화적 감성이나 예술적 코드의 상호경쟁 시스템이다. 따라서 예술의 가치를 탈정치적인 것에서 찾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자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탈정치적인 진공상태의 심미적 공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규정에 대해서는 보다 섬세한 예술사회학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위의 언설이 가지는 최소한의 함의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70년대라고 하는 시공간이 가지는 창백한 시대정신과 모노크롬 회화의 탈정치의 코드화가 정교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여기에 대해 당시의 회화를 옹호하는 입장은 억압의 시대에 굴종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침묵의 저항이라고 주장하는 쪽이다. 반대론자들은 그러한 침묵이라는 요소 자체가 침묵을 통한 저항이 아니라 침묵을 통한 동조의 결과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이건 간에 예술은 정치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하버마스 얘기로 돌아간다면, 예술은 문예적 공론장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치적 공론장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은 예술 스스로 정치적 공론장이 아니라 문예적 공론장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다. 오늘날 공공미술(public art)과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은 이러한 예술의 지위와 역할에 주목하여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공공미술은 건축물 앞에서 세우는 환경조각이라는 등식은 낡은 것이 되었으며,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향해 열린 미술개념이자 제도이며 가치이다.

아티비스트 그룹인 오아시스프로젝트이 인사동 쌈지길 광장에서 펼친 예술포차 퍼포먼스.


아티비즘, 아트와 액트의 경계선상에서 유희하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은 예술의 가장 근원적인 힘이며, 특히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의 보루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혹은 ‘위임받은 것처럼 보이는’ 국가 권력을 기반으로 국가라는 권력 장치를 통해서 지배를 합리화 하는 각종 주의와 주장을 체계화 한다. 이것을 우리는 국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데, 종교 또한 지극히 사적인 차원의 신앙심을 집결하여 집단화된 사회적 양식으로 체계화하여 종교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그 시스템의 가르침에 복종할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바로 이지점에서 신앙과 종교는 절재적 존재에 대한 경외를 배경으로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존재론적 고독을 극복하고자하는 근본적인 ‘신앙심’과 이를 통해서 각각의 시대정신과 삶의 양식에 맞게 옷을 갈아입는 종교시스템 다시 말해서 ‘종교 이데올로기’로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다면 예술과 이데올로기는 어떠한가? 양자의 만남은 필경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현실사회와의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며, 과거를 성찰하려고 하며, 상처를 치유하고자하는 예술의 특성은 이데올로기와 근본적인 갈등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술적 실천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에 걸맞다. 이러한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예술개념이 예술행동주의, 즉 아티비즘(artivism)이다. 이것은 예술(art)과 행동주의(activsm)를 결합한 조어로서 예술가의 창작과 행동주의자의 창의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코 두 인격체 간의 네트워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 한 몸에서 결합하는 예술철학이자 예술방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현존하는 그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을 걷어내는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아티비즘은 유일하게 대안적인 영역으로 남은 예술의 지위와 역할을 최전선의 전위에 자리 잡게 하는 예술개념이다.

대중매체의 시대,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집결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의 예술의 대응은 여전히 심미적인 영역을 고수하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정보화시대와 대중매체시대의 현란한 구호 속에서 예술적 실천은 과연 어떠한 함의를 가지는가? 신자유주의 열풍을 타고 국가와 지역을 넘어 지구를 하나의 끈으로 묶어내는 세계화의 흐름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데올로기의 대립 이후 시민영역의 자율적인 합리성 구현의 흐름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미술 안쪽으로 향한 비평적 성찰과 미술 바깥을 향한 대사회적 역동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화 논리에 포섭된 국가체제, 예술제도, 비평적 담론들 속에 갇혀 있고서는 그 어떠한 예술적 자유로움을 견지할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예술도 지역적 정체성을 배제한 보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동체의 삶에 뿌리내린 예술의 공공적 기능을 회복하지 않고는 자폐적인 미술언어의 동어반복을 모면할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피하려는 예술적 행동을 담보하지 않고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05/10/04 14:01 2005/10/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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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wonseok ::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새로운 미술개념을 위한 시론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의 새로운 미술개념을 위한 시론 : 지역성, 공동체, 공공성, 예술행동주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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