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예술

critic & column | 2010/02/15 16:01


죽음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예술

타인의 죽음을 목도한 개인들의 인식과 감성은 제각각일 수 있다. 누군가는 가슴깊이 밀려오는 슬픔과 분노를 삭이며 말없이 마른 눈물을 삼키는가 하면, 누군가는 통곡으로 북받쳐오는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인의 감성 표출 차원을 넘어서 그 죽음을 공유하는 방식으로서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 자리 잡은 애도의 형식이 장례이다. 우리는 장례라는 의식, 즉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적 의례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유한다. 장례라는 의례 속에는 다양한 양식의 소통 기제가 들어있다. 물론 거기에는 말과 노래와 퍼포먼스가 있고, 패션과 그림과 조각이 함께 한다.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문화 속에 자리 잡는 데 있어 이러한 예술적 언어들이 함께 한 것 자체가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의 예술이 공예 개념과 한 몸으로 붙어 있었던 점을 고려해볼 때, 우리의 장례문화에는 예술적 표현들이 풍부하게 들어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문제는 근대 이후의 예술이 어떻게 죽음을 다루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이후의 예술은 쓸모와 결별한 예술이다. 따라서 장례를 둘러싼 다양한 소통형식으로서의 문학적 서사와 몸짓, 노래를 비롯해서 그림과 조각 등의 일체의 표현 방식들은 예술의 범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 이후의 예술이 죽음과 무관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꿰뚫은 빼어난 예술 작품이 나왔다. 근대 이후의 예술은 죽음을 통해서 역사와 현실을 기록하고 발언했다. 이들의 예술언어는 죽음의 애도를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각성하고 비판하는 강력한 공론장으로 자리잡았다.

근대기의 문예적 공론장은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했다. ‘마라에게, 다비드가 바친다’는 텍스트가 들어있는 그림 <마라의 죽음>(1793)은 혁명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화가의 마음을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1849-50)은 ‘오르낭의 장례식에 참가한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그림’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의 장례 장면을 통해서 삶 속에 들어있는 생활문화로서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게르니카>(1937)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공군이 자행한 학살을 그린 피카소의 그림이다. 그는 1951년에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리기도 했다. 평범한 죽음을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으로 남긴 쿠르베의 리얼리즘 전략, 혁명적 낭만주의 시기의 예술가 다비드, 전쟁이 남긴 죽음의 상처를 고발한 피카소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애도의 예술로 근대 이후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에 예술적 발언의 폭을 넓혀나갔다.

공공미술은 단연 그 기념비성을 앞세워 죽음을 애도하는 예술형식으로 설립되곤 한다. 대체로 관변의 기념비들이 상투적인 표현방식으로 예술적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죽음을 정치화하는 과정에 개입한 권력의지 때문이다. 역사에 남는 명작이 권력 의지를 타고 넘나들면서 훌륭한 공론장으로 작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영웅적인 기념비가 그 영웅의 죽음을 다루기보다는 삶을 다룸으로써 권력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일이다. 반면에 로댕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 걸작을 남겼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1886-88)은 시민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여섯 명의 생명을 구한 생 피에르 외슈타스의 의로운 죽음에 대한 애도의 예술이다. 로댕은 이 작품에서 예의 기념조각의 상투성을 벗어나는 인상주의적 표현으로 시대의 한계를 한 걸음 앞서 나갔다.

케테 콜비츠는 모자상으로 전쟁의 상처를 담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만큼 전쟁의 상처를 깊이 담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는가”. 전쟁의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든 이 작품에 대해 초라해 보인다거나 비극의 처절함이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논평들에 대해 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자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식상한 주제인가. 서구의 피에타 조상들만 해도 얼마나 애절하게 수 천년동안 관람자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겠는가. 부산 태종대의 자살바위 위에 있는 모자상은 또 얼마나 많은 힘겨운 이들에게 삶의 따뜻함을 전달했겠는가. 하지만 대다수의 모자상들은 종교 이데올로기와 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신파적 내러티브 자체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콜비츠의 모자상이 각별한 이유는 모자상의 신파적인 내러티브를 현대미술의 미니멀한 조형언어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옛 동베를린 지역의 한 근대건축물 한 동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콜비츠의 이 작품은 독특한 어법을 가지고 있다. 텅 빈 공간 속 한 가운데에 아들을 안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덩그마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건물 천정이 뻥 뚫린 상태여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이다. 바깥이었다면 이런 감동이 없거나 덜했을 것을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건물 안에 모자상을 두고는 천정을 뚫어 눈비를 맞게 했다. 텅 빈 공간 한가운데 바닥에 놓인 브론즈 조상이 있고 그 위에 빛을 떨어뜨리는 천정의 구멍. 그것은 빛과 눈과 비를 끌어들인다. 광장에 우뚝 선 높은 좌대 위의 영웅적 인물상에 대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이렇게 낮은 곳에 임한 인간적인 모습의 공공미술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본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20세기 기념비 예술의 절정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중국계 미국인 마야 린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공모를 거쳐 설치한 것이다. 너른 잔디밭에 브이(V)자 홈을 파서 대지 아래로 내려가면서 벽면의 이름들을 만나도록 디자인한 이 작품은 낮은 공공미술 방식의 인터페이스로 여느 전쟁기념비와는 차원이 다른 숙연함을 안겨준다. 5만 8천명의 베트남전 전사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매끈한 검은 돌에 새겨 넣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 대한 애도의 기억을 미니멀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건축을 전공한 이 작가의 감각적인 언어는 모더니즘 미학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우뚝 선 기념비의 남성중심주의 시각으로 수직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 감성으로 수평확장하면서 낮고 너르게 품어 안아주는 그의 언어는 진정한 절제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은 오랫동안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을 거친 20세기 한국에서 죽음을 비판적 성찰로서의 표현 대상으로 삼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겠지만,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예술작품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미술을 둘러싼 안팎의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문제를 포함해서 사회의 현실을 다루는 미술은 198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광주항쟁은 수십 년 간 이어온 정치적 합의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시민들의 인식과 감성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죽음을 다루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백색의 시대를 지나서 1980년 이후의 경험은 수많은 시민과 학생, 지식인 계층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선 한국의 현실을 주목하게 했다.

광주의 죽음을 시각예술로 다룬 그룹은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즉 광자협이 거의 처음이다. 특히 홍성담은 광주민중항쟁 판화연작으로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저항과 죽음을 다루었다. 현장에서 목도했던 여러 가지 사건과 정황들에 관한 기록적인 가치는 물론 간결한 목판 선으로 사건과 상황의 핵심을 전달하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인해서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애도와 저항의 예술로서 기록할만한 작품이다. 강요배의 제주도 4.3항쟁 연작 또한 잊혀진 죽음의 기억을 되살린 중요한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40년 동안 묻혀있었던 제주도에서의 학살 문제를 다룬 4.3연작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의 의지를 예술적 표현으로 맞선 아름다운 기억투쟁이다. 1980년대의 새로운 리얼리즘 미술운동은 이른바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거대한 상징투쟁을 벌였다. 민주화라는 정치적 에너지가 넘쳐나던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현장에 뛰어들었다.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애도와 저항의 예술을 펼친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들 현장미술이라는 개념으로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고 개입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박종철에서 이한열에 이르는 죽음의 서사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격동하는 사회는 명작을 남긴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 열사는 최병수라는 걸출한 현장미술가의 명작으로 부활했다. 최병수는 최루탄을 맡고 쓰려져 친구의 부축을 받고 있는 이한열의 모습을 판화로 제작해 배포했다. 이어 그것을 거대한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옮겨 그렸다. 현장미술 작품들 가운데 드물게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이한열 영정과 최민화의 열사부활도 등 다수의 미술작품이 제작되었으며, 장례식 자체가 수만의 군중이 운집한 거대한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과정에 많은 예술가들의 작업이 함께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열사정국은 예술가들을 시대와 동행하는 행동주의자들로 만들었다. 영정과 열사부활도, 만장, 걸개 등의 현장미술 작품들을 생산해낸 눈부신 예술행동의 주역들이 한 시대의 정치적 에너지와 예술적 실천을 창조적으로 결합시켰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 지속된 이른바 열사 정국은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바치고서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말해준다. 다시는 거리에서 만장과 영정을 기다리지 말자던 1990년대 정태춘의 노래는 부질없는 허사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공론장에 떠오른 정치적 죽음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예술가들의 역동적인 현장미술이 되살아났다. 박건웅 등의 만화가들이 대한문 광장 앞에서 그린 걸개그림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밀짚모자를 들고 웃고 있는 고인의 얼굴은 장례식 날 방송국 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로 전국으로 송출됐다. 사실을 전달하는 사진과는 다른 풍부한 디테일로 인간의 실존을 재현하는 그림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임영선은 서거 직후 영정그림을 그려 봉하마을로 달려갔다. 장례식에 맞춰 대형 걸개그림을 그려서 봉하마을에 내걸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2009년은 전직 대통령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정치학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용산참사 현장예술이 있다. 지난 1년간 용산참사 현장에서 벌어진 예술 공론장은 그들의 죽음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기억투쟁이었다. 화가와 시인, 음악가 등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망각을 강요받는 그들의 죽음을 위해 기억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망루에 올랐다. 삶을 선택하고 했던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은 단지 그들 몇몇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시대의 자화상의 그곳 용산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들의 죽음은 곧 공론장으로 떠올랐다. 예술이 거기에 함께 했다. 시각예술가들은 참사 직후 사적소유, 재개발, 생존권, 자본과 권력 등의 의제를 다룬 <망루전>을 꾸리고 전국 6개 도시 순회전으로 이어갔다. 용산참사가 벌어진 남일당 뒷 건물에 만든 레아미술관에서 지난 1년 동안 22회의 전시가 열렸다. 이윤엽의 <여기 사람이 있다>는 판화, 걸개, 달력, 티셔츠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갔다. 전진경이 그린 열사들의 영정은 장례식 행렬 때 거대한 프린트로 옮겨지기도 했다. 노순택의 <그날의 남일당>은 일그러진 망루를 포착해서 흑백대비로 갈등의 양상을 극대화화한 걸작이다.

다섯 분의 장례식을 치렀던 2010년 1월 9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안치환의 가녀리게 떨리는 음색이 서울역 광장을 맴돌았다.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동시에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하는 유가족의 참담한 심정이 심금을 울렸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존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재개발의 칼날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하고 있는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남일당 건물 꼭대기에 망루를 짓고 그것에 의존해 삶을 지탱하려고 했던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거리에서 죽은이의 영정과 만장과 열사부활도를 만나는 일은 기억 속의 과거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근자에 들어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정치적 공론장으로 떠오르는 죽음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저기 광주에서 여기 용산에 이르는 기억투쟁으로서의 예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맞붙은 경계선 위에서 잠시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든지 죽음을 통해서 삶을 들여다볼 준비를 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B-art, 2010년 3월호 특집 원고.

2010/02/15 16:01 2010/02/1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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