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전 회화, 일루전 게임 : 김기수

critic & column | 2010/05/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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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전 회화, 일루전 게임

화가가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고 표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도전이다. 김기수는 사각의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회화의 강박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작가이다. 그는 화가라는 고유명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매체다변화를 이룬 예술가이다. 그는 사각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던 규정된 언어로부터 벗어나 사각의 틀을 부분적으로 깨트리기도 하고 사각이 아닌 원이나 타원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난 김기수의 화면은 원을 이루거나 사각의 한쪽을 붓질의 윤곽선으로 처리하는 변주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두 개의 원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캔버스에서 금속 패널로, 붓질에서 레이저 커팅으로, 회화에서 오브제로 나아간 그의 작업은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유지하면 진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매체 변화를 통해 형식적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그는 금속 조각들을 잘라서 붙여 하나의 화면을 만든다. 그 금속 조각들은 사물들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스테인리스 미러와 그 녹슨 철판 두 가지이다. 그의 화면은 매끈한 표면의 수퍼 미러와 부식 시킨 철판이 한 화면을 이룸으로써 상호대비되는 이원적 요소가 공존하는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사물을 반영하는 거울과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녹슨 철판을 섞어 놓음으로써 그 앞에 선 관객은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거울/작품의 존재를 보다 확연히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김기수가 의도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거울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하는 일이다. 매끈한 거울이 아닌 작가의 붓질 흔적이 개입한 거울 너머로 존재와 반영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갈등과 공존의 구조 속에서 극적인 내러티브를 생성하게 하는 김기수 작업의 매력이 여기 담겨있다.

그는 금속 패널을 이어붙인 평면의 외형을 거울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 다시 달을 암시하는 흔적을 남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달은 반영이라는 주제의식 아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양과 음의 질서에 대한 헤아림을 전제로 한다. 달은 해의 존재를 반영한다. 달은 달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만 해의 빛을 반영했을 때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마음 속의 고요를 불러오는 달은 우리의 마음을 담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것은 뜨거운 태양의 열정보다는 차가운 달의 고요를 불러 모시는 일이다. 김기수가 해가 아닌 달을 다루는 것은 그의 감성이 사물의 존재와 반영에 긴밀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매끈한 거울 표면에 달을 형상을 새겨 넣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붓질을 디지털 정보로 전환하고 그것을 정교한 컴퓨터 커팅으로 잘라낸 후 일일이 맞추는 김기수의 작업은 이질성을 한 화면에 단단히 묶어 둔다. 붓질의 형상을 디지털 정보로 치환하고 그것을 다시 금속 판재로 옮기는 과정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상호 교환 과정이 이뤄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섬세한 수공을 반복한다. 하여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숙련된 기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매끈한 거울 표면과 일획의 붓질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김기수의 화면은 그 자체로 대칭관계가 공존하는 극적인 서사를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거울과 녹이 공존하는 화면 자체가 지시하는 내용만이 아니다. 그 화면을 바라하는 관찰자는 작품의 형상과 더불어 화면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김기수가 제시하는 스테인리스 미러는 관찰자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거울은 매끈한 거울이 아니라 녹슨 철판을 새겨 넣은 불편한 거울이다. 또한 망치로 두드려 매끈한 표면을 일그러트린 망가진 거울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기수의 거울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일그러진 거울의 불편함을 통해서 실재와 반영의 불완전한 관계를 비판적 시각으로 재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매끈한 거울 표면을 파고든 녹슨 판재의 형상이 붓질의 느낌을 살림으로써 작가의 행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도 새겨볼만한 대목이다. 티끌하나 없이 깔끔하게 사물을 반영하는 거울의 질서를 비트는 예술가의 행위를 붓질의 흔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각 이미지의 일루전이 우리의 인식과 감성에 대해 작동하는 절차와 방법들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 물론 그가 물질과 환영에 관한 인식론적 접근을 연구자의 차원에서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학적 탐구정신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편집증적인 감성기제를 작동해서 사물과 환영, 존재과 반영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거울에 끼워넣은 녹슨 철판 조각들을 통해서 거울의 반영 작용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김기수의 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금속 패널을 짜맞춘 원이고, 다른 하나는 광목천 이미지를 담은 원이다. 그는 이 두 개의 원을 나란히 걸어둠으로써 반영과 은폐를 병치시킨다. 그는 금속 패널 옆에 페인팅 패널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드러냄과 숨김을 병치한다.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는 현현과 은폐를 상기시키는 일이다.

사물의 형상을 가려버리는 광목천 이미지를 그렸던 김기수의 일루전 회화가 사물의 형상을 반영하는 거울의 물질적 특성을 비트는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천으로 사물을 감싸서 묶어 놓은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려진 존재, 숨겨진 진실의 내러티브를 구사해온 그의 작업이 금속 패널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의 변주 단계로 접어들어 완숙한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애초에 그가 사물을 감싼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은폐 너머의 실존에 대한 갈구였다면, 근작들에서 나타나는 거울 이미지들은 실재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실재와 환영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일루전 회화의 단전적인 재현에서 일루전 게임의 단계로 진화하고 있는 김기수의 작품 앞에서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그 너머의 자신을 들여다 볼 일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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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5 05:06 2010/05/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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