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과 살림의 액티비스트 : 정정엽 작가론

critic & column | 2004/08/16 16:40


신명과 살림의 액티비스트

김준기(미술평론가)

개념적인 퍼포먼스나 참여적인 현장미술 프로젝트를 가지고 전시장 바깥의 역동적인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액티비스트 정정엽. 그는 대학졸업 무렵부터 페미니스트 이슈를 안고 자신의 삶과 예술을 연동하고자 했던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술운동가로서 20년 세월을 지내온 정정엽을 제대로 헤아리는 일은 한국현대미술의 변천사를 좇아야 하는 만만찮은 일이다. 이렇듯 눈부신 활동의 이면에 자리잡은 ‘화가 정정엽’의 진면목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오늘날의 다원적 예술 개념과 제도, 관습에 비추어 상당히 새로운 예술가 상의 한 유형을 소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일차적 목표는 두렁과 입김이라는 한국현대미술사의 금자탑과도 같은 창작 소그룹의 멤버인 정정엽을 화가 정정엽으로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액티비즘과 페미니즘 사이에서 선 '화가 정정엽'의 모습만을 앙상하게 부각할 일은 아니다. 오늘날 예술가의 지위를 거리와 전시공간으로 이원화하여 사고하는, 그리하여 전시장에서의 미학적 성취와 거리에서의 공공적인 성취를 갈라놓으려는 낮은 단계의 예술인식은 점차 양자간의 통합적 시각에 의해서 그 간극이 메워지고 있다. 나는 전시장과 현장을 오가는 정정엽의 양수겹장을 통해서 탈근대적 지형의 21세기형 예술가의 한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화가 정정엽을 제대로 읽어내되 그의 한 면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룹활동을 통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모색해왔으며, 그 가운데서도 개인 창작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온 예술적 실천가이자 실천적 예술가인 그의 진면목을 짚어 보는 과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최초의 꿈
정정엽의 미술(인)단체 활동 내역은 화려하다. 대학을 졸업한 해부터 미술동인 두렁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1985년), 터 그룹전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현장 활동을 했으며 이듬해인 1987년에는 인천에서 현장미술집단 갯꽃 활동을 했다. 1989년의 결혼과 이듬해의 출산은 그를 여성정체성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화가의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1987년에 시작한 여성미술연구회 정기전은 1994년까지 지속됐다. 1997년에는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함께 활동해오고 있다. 1994년 이래 인천미술인연합의 회원이며, 2003년에는 미술인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단체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많은 단체활동에 참여하고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도 평면회화 작업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익명성을 강조한 두렁이나 갯꽃과 같은 집단창작, 현장지원 활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한 것은 오늘날 정정엽의 회화세계를 열어놓은 소중한 밑거름이다. 그는 상황이 변화하는 만큼 천천히 움직이면서 시대에 몸을 맞춰 살아나가고 있다. 두렁 시기에는 판화 작업들을 남겼고,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한 여덟 차례의 <여성과 현실전>은 오늘날 그림 그리는 정정엽을 지켜낸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의미심장하게도 여성미술연구회라는 모임을 해소한 이듬해에, 그리고 <민중미술15년전>이라는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전시가 열린 1994년의 바로 다음 해에, 정정엽은 21세기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대학 졸업 후 10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금호미술관(98), 인사미술공간(00) 인천신세계갤러리(01), 서호갤러리(02)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정정엽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상황 가운데 중요한 흐름을 관통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 예술가, 특히 화가정체성을 꾸준히 지켜온 정정엽과 창작동인 또는 미술인단체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 두렁, 갯꽃, 터, 여성미술연구회, 입김, 민미협, 미술인회의 등이 그것이다. 정정엽은 미술단체 활동과 소그룹 활동을 거의 멈추지 않고 이어왔다. 예술가에게 있어 단체활동이란 예술가적 아우라와는 좀 무관해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작가에게 꼭 필요한 일정한 자유로움과 시간에 치명타를 입으면서까지 정정엽이 단체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불평만 하다 살다 갈 수는 없어서, 맨 땅에 헤딩을 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그 헤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예술가의 몸부림이었다. 촌스러움은 이제 현대인의 죄악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말이다. 그러나 이 촌스런 어디쯤에 한국미술이 있지 않을 것이다. 절대 세련된 그 무엇이 될 수 없는 제3세계 예술가의 운명 같은 것. 이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활동에서 오는 억압적 요소들은 그를 적잖이 힘겹게 했다. 단체의 정체성에 갇혀버리거나, 집단에 기대어 막연한 낙관성 속에 위안을 얻으며 안주해버리거나, 단체 작업과 개인 창작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상황에 빠져 버리면 그 힘겨움은 개인 창작 주체를 갈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수렁에 빠져들게 한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작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를 단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80년대에야 시대에 대한 자기희생적인 헌신성 하나면 만사형통이었지만, 이후 좌표부재의 시대를 지나면서 작가로서의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정정엽 스스로 다짐한 바, 타성에 젖지 않으며 열린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따라서 폐쇄적인 미술구조가 여전히 그 안과 밖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작가로 살아간다는 문제 그 자체’를 실험하는 것과 같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족쇄로 남아있다. 스스로 뛰어들지 않음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역으로 족쇄를 차고 있는 정정엽의 고민은 창작의 고통보다 더 큰 실존적 고뇌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작가로서의 삶을 지켜내는 진정성의 문제가 아닐까.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여기 저기서 툭툭 발견되는 나를 총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미술의 안과 밖을 살필 때 비로소 내가 보일 것이다. 더구나 내가 여성이라는 실존조차 미술적 상황으로 끌어들이는 데 이르면, 나는 어쩌면 미술에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부분 최초의 꿈을 포기하고 미술의 폐쇄적 성벽 안에서 고고한 척하면서 기생하는 생존방식에 몰두하고 있는 즈음,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위해 꿈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예술은 바로 꿈꾸기, 그것이 아니었던가. 관념과 수사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 허망한 꿈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꿈. 비록 거대한 구조가 이미 제 속도를 내고 있을지라도, 실패와 상관없는 꿈이야말로 진짜 꿈이 아닐까”

신명의 공동체, 살림의 미학
정정엽의 그림 그리기는 이미 고등학교 때 웬만큼 이골이 나있었다. 수도꼭지, 욕실, 화분 등 그의 그림 그리기 대상은 학교 안의 모든 것들이었다. 그리는 일 말고도 인사동 일대에 전시를 보러 다니고 전시 감상문을 쓰는 일이 이 시절의 주요 관심사였다는 점 또한 오늘날 정정엽의 부지런한 걸음에 비추어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이 시절 현대미술의 공허함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말한다. 1980년대 초반의 내노라는 논자들의 비평문을 탐독하면서 세상에 점점 눈을 떠가던 대학시절, 그는 졸업을 앞두고 민화반을 만들었다. 한국의 미의식, 미적 기준을 찾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터’라는 이름의 동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이래 대학졸업까지 미술대 학생 정정엽을 오늘날과 같은 유형의 20여년 삶을 살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을 법도 하다.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건네 보았다. 얼기설기 맞춰본 정정엽의 변모 이유는 대체로 이렇다. 당시의 현대미술계가 직면한 변화의 요구와 새로운 미술 흐름의 강렬함이 학생 정정엽을 이끌었다는 점이 가장 주요했다. 그에 앞서 자신 앞에 놓인 뻔한 길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중요했을 것이다. 방임적이면서도 헌신성이 있게 자식들을 길러낸 그의 어머니는 얘기 듣기로 상당히 센스있는 분인 듯했다. 그 모성의 힘은 정정엽을 굳센 여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가 소소하게 던지는 말 몇 마디에 뚝뚝 묻어난다.
청년 정정엽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운명적으로 찾아왔다. 두렁을 만난 것이다. 두렁은 1983년에 창립예행전을 열고나서, 1984년 10월에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는데, 이때 정정엽은 대학 4학년이었다. 학교 앞에서 두렁 창립전 찌라시를 발견한 그는 두말할 것 없이 그 장소에 찾아갔다. 이후에 신촌에 자리잡은 문화공간 애오개소극장을 드나들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곳은 당시 민중문화운동의 모태가 된 곳으로 김지하, 오윤, 김봉준, 이애주 등 쟁쟁한 문화운동가들이 집결한 곳이다. 대학생활을 통해서 준비된 미술운동가 정정엽은 후에 미대졸업생의 신분으로 민중미술운동의 거대한 축을 이런 두렁의 멤버로 합류했다. 1980년대라는 시대가 언명한 민족과 민중이라는 두 가지 큰 물꼬를 만난 정정엽은 그 험난한 물줄기에 몸을 맡긴 것이다. 초조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청년 정정엽은 호랑이굴에 들어간 것이다. 공동체성, 대중의 신명, 소통의 미술을 지향했던 두렁의 정신은 그의 작가 세계를 연 첫걸음이었다.
정정엽은 두렁에 가입하면서 ‘평생 가난하고 외로움 등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 그림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단체활동을 하면서도 개인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끈기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작업 욕구를 버리지 않고, 사회에 눈뜨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비장하게 다짐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성적으로 가난을 크게 불편해 하지 않는 체질인데다가 20대 중반에 인생 길게 보고 느긋하게 가기로 결정한 것은 정정엽 그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두렁이라는 그룹은 당시의 한국의 미술 구조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한국적 상황 속에서 태어난 한국의 리얼리티였다. 당시의 허구적 상황에 대응한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서구의 미의식에 대항하는 자생적인 힘을 가지고자 한 것이다. 한국적 토양 속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미술흐름의 한 축을 이루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활동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의 낭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낭만성보다 훨씬 더 뚜렷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두렁의 가치는 크게 집단창작과 걸개그림의 개발로 집약된다. 집단창작 방식은 기존 미술계의 게임의 법칙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 내는 것이었다. 갤러리 미술관 안에서 특정인들에게만 통용되는 그림 소통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단창작이라는 창작 방법론은 걸개그림을 창출했다. 걸개그림은 대중들이 모였을 때 함께 그 장소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각장치로서의 역할을 위해 고안된 방식이다. 공동창작은 개인의 성과로 남아 예술적 아우라로 귀결되는 개인창작에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동시에 익명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책임성과 창작 열의가 떨어지는 주필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두렁은 우리의 미형식을 고민하면서 나온 소그룹이다. 민족적 미형식을 찾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두렁의 화두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전통이라는 맥락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형식적 모태는 민화양식이었다. 그들의 주목한 민화의 중요성은 복고취미와는 다른 것이었다.
전통의 단절과 서구미술에 대한 대항적 없는 역사적 단절을 거부하고 단절 이전의 정서를 회복해보고자 한 것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담고자 한 것이다. 그 조형적 방법이 민화의 형식미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산업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두렁의 대응은 무대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성에의 동의이며 형식미학에는 문제제기의 지점이 있다. 한국적 미의식을 개발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공동체적 신명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민화를 방법론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민화에서 미의식의 단초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군부의 전통 찾기는 전체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통을 끄집어냈지만, 두렁의 전통 찾기는 한국적 에너지, 한국적 미술에너지의 전통성 동양 중국에 귀결되는 동양화라는 한계와 모순을 벗어나 서구 모더니즘 수용 일색의 상황에서 한국적 미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대중의 미의식 민화를 끄집어낸다.

부드러운 시선과 낙관적인 미의식
두렁이란 논과 논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람과 사람 사이 삶과 삶 사이에서 길이 되고 쉼터가 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이름으로서, 서구미술사조 일변도의 흐름에 다른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다. 이름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그러하거니와 두렁은 민족공동체의 전통적 가치로부터 태동했는데, 이후 대중사회, 독점자본의 시대를 만나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삶을 의미있는 실천으로 만들려는 행동주의 성향으로 진화해갔다. 그들의 예술행동은 사회와의 결합방식을 모색한 것이었다. 제도미술의 흐름 속에서 시각언어 게임에 집중된 것이 현실과 발언이었으므로, 미술판 안에서 보면 현실과 발언이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두렁의 그림은 비판적 리얼리즘의 미학적 주관주의와는 달리 철저하게 노동현장을 위해 근거로 한 것이었다. 정정엽의 개인작업 또한 두렁의 지향과 흐름을 같이 한다. 이 시기 그가 남긴 몇 점의 판화 작품들은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건강한 미의식을 담고 있다.
<봄날에>(도판1)는 화분에 작은 꽃을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어눌한 듯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어머니가 보여주는 것은 투쟁하는 민중으로서의 노동자상을 강조했던 당시의 대다수 목판화들과는 달리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을 담고 있다. 두 손으로 곱게 바쳐 든 새싹처럼 말이다. 이렇듯 삶과 일에 대하여 낙관적인 미의식을 가진 판화작업들을 통해서 우리가 되짚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후 90년대를 건너가면서 이념적인 질곡을 넘어서는 저변의 힘, 즉 생명성과 여성성이라는 화두를 일찍이 자신의 몸 속에 담아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목장갑>(도판2)은 삶의 진한 체취를 담고 있다. 목장갑을 빨아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목장갑을 빨아서 널어놓는다는 것. 이것은 일하는 사람의 굵직한 존재감과 계급성을 담고 있을뿐더러 그 너머에 있는 목장갑을 비벼 빤 한 사람의 잔잔한 손길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정엽 특유의 부드러운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빨래줄에 널어놓은 목장갑으로부터 우리는 고흐의 구두가 묻히고 다닌 대지의 생명력과 농부의 진한 노동을 담은 존재의 울림을 읽어내듯이 목장갑의 한올한올을 찍어 놓은 정정엽의 작업에는 아무런 과장없이 노동의 과정을 순수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노동에 대한 건강한 미의식을 통해 체화된 계급성을 담고자’ 했던 이 작품들은 당대의 흐름에 비켜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응대하려는 작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조응하는 것만큼 표현하려는 진정성의 표출이다. 거창하게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더듬이로 만나는 세상을 표현하는, 그리하여 개인적 감성 코드가 폭넓게 드러나는 그런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초기작에서는 거창한 구호보다 잔잔한 생활인의 모습을 통해서 삶의 미학을 끌어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여기까지 보면 이 작가가 낙관성을 헐렁한 낭만성으로 이어낼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없지 않으나, <이불을 꿰메며> 등의 판화와 <몸살>, <당신의 휴식> 등의 작품을 보면 현실의 고단함을 통해서도 풍부한 노동자의 미의식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절은 두렁과 인천에서의 갯꽃 활동 등 현장실천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시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문제를 집단 정체성에 귀속시키지 말고 개인 정체성 문제 차원에서 접근해 들어가고자 했던 작가의 문제의식을 확인하게 해준다.
부드럽고 낙관적인 성품의 정정엽은 인천의 부평공단에서 현장투신 활동을 한다.(1986년)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현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곧 미학적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노동현장에서의 미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동현장에서 미술은 그 영향력이 너무나도 미미했다. 때문에 정정엽은 그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정정엽은 현장투신의 당위성을 안고 현장으로 갔지만, 미술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정엽에게 있어서 미술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자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존을 문제이기도 했다. 미술은 그를 존재하게 하는 틀이었다. 작업이란 그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두렁의 산개정신은 그렇게 구성원들을 실존적 몸부림의 현장으로 인도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를 불문하고 그것 자체로 의미있는 선택이었다. 이후의 또 다른 선택에 대한 문제는 그들의 실존적 언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정엽은 산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으로 선택한 것이다.
노동미술은 오늘날 여성, 환경, 생태, 생명, 정치, 인권, 소수자, 통일 등의 다원화한 미술이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1980년대 참여 미술의 갈래 가운데서 민족미술과 쌍벽을 이룬 중요한 흐름이다. 크게 보아서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달리 민중적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이 흐름은 당대성과 현장성을 중요시 했는데, 두렁에서 갯꽃으로 이어지는 정정엽의 활동은 그의 작품 세계가 삶의 현장의 역동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노동미술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기 위해 만화와 판화와 이동식 걸개 등을 고안했다. 따라서 노동미술은 의미생산 영역에서의 실천적인 역할보다는 체험적 삶의 현장에서의 선전선동 기능에 무게를 두었다. 이것은 예술적 성과로 남기보다는 당대의 공공성에 주목한 것인데, 이를테면 예술의 복무이론 같은 것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정정엽과 같은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듯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의 노동미술도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미술이라는 개념은 ‘노동현장’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에 대해 그 개념과 의미를 시각예술의 본령으로 삼아 파고들수도 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노동의 가치를 몸의 철학으로 끌어내고, ‘소외된 노동’에서 ‘창조적인 노동’으로 진화해 나가기 위해서 시각이미지로서 균열을 내는 일은 정정엽의 초기작을 가늠하는 노동미술의 중요한 화두이다. ‘참여주체로서의 개인 : 창작의 주체로서의 개인’ 사이를 오가는 당시의 정정엽의 고민도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다. 일과 놀이와 삶과 사랑과 투쟁을 함께 가져가려했던 노동의 꿈, 노동미술의 꿈. 정정엽의 최초의 꿈이 구체화된 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정엽을 노동미술과 관련하여 읽을 때, 개인적 차원의 작업으로 규명해본다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 1987년 이후 시민운동으로서의 민주화 투쟁은 계급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전기를 만들어주었다. 노동자들의 계급운동은 이제 막 걸음마 단계였다. 독재의 폭압 속에서 임금 노예로 살아왔던 노동자 계층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현장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정정엽은 1986년에 부평공장으로 갔다. 그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당시의 정황을 자신으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회고한다. 삶의 문제를 제대로 다뤄야 유의미한 의미생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소신은 ‘체험을 통한 미학적 체감의 장’으로서 공장을 선택하게 했다. 삶의 정서를 체감하여 자신의 정서로 만들어 내겠다는 야심만만의 계획은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괴리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예술영역에서의 미술에 비해 노동현장에서의 미술은 그 지위와 역할이 달랐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린 현장에서 예술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노동운동에 투신한 ‘학출(학생출신) 정정엽’에게 열일곱 꽃다운 나이부터 공장에 다닌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라. 가서 그림을 그려라”. 현장을 벗어난 그는 몇 달 쉬었다가 인천으로 가서 노동운동 지원활동을 하는 미술패 ‘갯꽃’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이 두렁의 ‘산개’ 시절이다. 논두렁은 노동현장으로, 밭두렁은 만화, 판화, 걸개 등의 생활예술 활동으로 흩어진 것이다. 적절한 때에 흩어진다는 것은 긴 여운을 남긴다.

여성주의와 행동주의
정정엽의 여성주의 미술전략은 노동미술을 하던 시기부터 나타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가 자연스럽게 여성주의 미술을 몸에 익힌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적 자아 찾기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미술하기를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 활동을 통해서이다. 이 동인들의 지속했던 <여성과 현실전>을 통해서 꾸준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젠더의 문제를 고민해온 그는 상황이 변화하는 만큼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와 어법을 찾아냈다. <먼길>(도판4)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 즈음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바뀐 할머니의 이불을 배경에 그려둔 작품이다. 배경의 이불 문양이 담고 있는 세월의 기억이야말로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장롱 속에서 꺼낸 어머니의 이불 같은, 세월의 켜를 읽을 수 있는 그림이다. <집사람>(도판3)은 취업 공고판 앞에서 한 아이는 등에 업고 한 아이는 손을 잡고 선 주부의 모습을 잡아냈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대에 부천 역곡역으로 쏟아져 나오는 검은 비닐 봉지를 든 아줌마들의 일상을 그린 <식사준비>(1995)는 살림을 전담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매일 밥을 차리는 여성을 담은 <밥상>(1995)이라는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졸업후 10년만에 개인전을 열기까지 여성미술가들과의 동인활동은 정정엽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첫 개인전은 단체활동 결혼과 육아 등을 거친 30대 중반의 나이에 치른 <생명 아우르는 살림전>이었다. 살림이란 여성적 현실이 개인의 실존 한가운데 들어오면서 특히 살림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된 시기이다. 잔잔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치열한 현실의 한 단면도를 녹여내며 감싸 안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90년대 중반의 변화된 지형 속에서 여성주의 이슈를 부각시킨 정정엽에게 있어서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삶 속에 있는 여성을 그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중미술 개념 안에서 나타나는 ‘여성을 대변하는 미술’이 아니라 ‘생활 속의 여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망사천에 먹으로 그린 벽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을 그린 그림 <집사람II>(도판7-1)은 드로잉 설치 작업이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줌마’는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전형이다. ‘보따리’를 이고 가는, 하늘을 이고 가는 세월의 켜를 잡아내는 정정엽은 실체를 그린다기 보다는 실존을 그리는 화가이다.
1990년대 초반에는 김인순이 주축이 되어서 ‘여성미술연구회’ 내에 현장실천 소집단 성격의 창작집단 ‘둥지’를 만들었는데, 여성노동자 지원활동을 위해 걸개를 그리는 일 등이 주요 활동내역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세련된 노조 포스터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이제는 노동운동 진영에서 자체적으로 시각 디자인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부터, 현장미술운동가들은 노조가 전문화, 조직화 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현장미술운동가들의 역할이 역사적 사명을 다한 것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이들의 활동이 역사적으로 폄하될 하등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정정엽은 ‘오히려 시대 속에서 그 흐름에 충실하게 역할을 했다’고 자평한다. 시대와 조응하면서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대지와 접촉하면서 땅을 더듬듯이 작업한다’고 말이다.
‘입김’은 정정엽의 예술활동을 이전의 현장미술운동가에서 20세기 후반의 행동주의 예술가로 바꾸어 놓았다. 임김은 스터디 그룹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막연한 양성평등에서 여성주의라는 철학적 외연을 체화시켜나가는 과정을 밟았다. 1994년의 여성미술연구회 해체는 단체의 속성상 그 역할을 다했다는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는데, 이후 몇 년의 공백을 거쳐 다시 단체활동을 시작한 그는 화가 정정엽과 행동주의자(activist) 정정엽 사이에서 더욱 단단하게 여성주의자로 거듭났다. 입김의 아방궁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여성들의 미술축제였다. 축제의 놀이개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미술과 놀이의 결합을 모색했다. 출산과 임신 등 여성들만의 경험을 놀이화 한 것이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가부장 문화의 상징은 종묘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종묘점거프로젝트에서 이씨 종친회와 유림과 정면 충돌했다. 대중과 접점을 형성하기에 공원이 그만이었고, 게다가 남성중심주의의 중심지에서의 점거 퍼포먼스라니,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종묘공원에 치맛자락이 깃발처럼 휘날리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앵그르의 명작 터키탕을 패러디한 작품을 보는 시민들의 시각적 충역은 예상보다 컸다. 결국 전주이씨와 유림에 의해 행사를 망치는 불상사가 있었고, 긴 법정 투쟁에서 입김은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양성평등을 그들의 견지에서 일부분 구체적인 성과로 얻어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진정한 액티비스트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남성중심의 무엇을 뒷받침하는 형식을 깨뜨리는 작업이며, 물량주의와 자기과시적 폐쇄구조를 깨뜨리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낱알의 생명을 그리는 화가
두 번째 개인전 이후에 정정엽은 온갖 곡식들로 가득찬 곡식 연작을 한다. 붉은 팥 녹두 완두 고추더미 등을 하나하나 그려내는 수공적 과정을 거쳐 모든 알곡이 존재를 갖도록 했다. ‘생명이 키워지는 속도와 그려내는 속도가 얼추 등가를 이루는’ 작업태도는 그가 이루는 작업세계와도 닮아있다. 세 번째 개인전은 붉은 팥 시리즈이다. 곡식이 단지 풍요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징그러움, 지난함, 그로테스크한 정서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곡식 그림의 단초는 첫 개인전의 출품작인 <봄나물>(도판5)이다. 광주리에 가득가득 담긴 봄나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일 자체가 주는 며느리이며, 아내이자, 어머니인 주부화가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담은 것이다.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자루에 담긴 곡식은 이제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전면적인 곡식그림으로 바뀌는데, <흐르는 대지II>(도판7)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화면 전체를 붉은 색의 팥으로 가득 채우는 혹은 부분적으로 비워두는 방식으로 낱알의 수행성과 더불어 강렬한 단색조의 색면을 만들어 냈다. 그런가 하면 <생산>(도판6)과 같은 그림은 자궁의 형상에 팥알을 배치한 중의적 어법을 구사함으로써 곡식과 여성의 몸이 공유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를 배가시키고 있다. 2003년도 작품 <씨앗>(도판10)은 단색조와 평면성을 유지하던 곡식 그림을 입체적 볼륨이 드러나는 그림으로 변주해 내기도 한다.
정정엽은 무엇을 재현하느냐 하는 주제의 문제를 어떻게 재현하느냐의 문제에 방점을 찍는다. 이것은 시각예술에 있어서 조형 언어의 도구적 기능에 관해 충분히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는 주제에 따라서 언제든지 그리는 방법을 달리해왔다. 두렁과 갯꽃 시절의 판화들, 여성미술연구회 동인전에서 보여주었던 두터운 유화들, 그리고 이후의 개인전에서 이어진 곡식, 나무, 몸 등 각각의 이슈에 맞게 달라진 그의 평면작업들은 이러한 태도를 뒷받침하는 정정엽식 다이네미즘이다. 곡식그림은 한알 한알 꼼꼼하게 곡식 낱알을 그려내는 과정을 거쳐 나가면서 말그대로 ‘몰아지경의 수행성’에 빠질 법도 한 집요한 그리기의 산물이다. 그가 곡식그림을 그린 것은 당연히 그 속에 담긴 생명의 메시지 때문이다. 이점을 호들갑스럽게 다시 언급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작가가 탐닉하는 이 소재에 담긴 의외의 흥밋거리이다. 정정엽은 곡식의 색에 주목하고 있다. 검정콩, 팥, 완두콩 등 각각의 곡식 안에 색이 있다. 온갖 색이 다 들어있다. 곡식은 풍요와 생활과 생명을 가지고 있다. 곡식알을 일일이 그린 행위 자체에서 나오는 헌신성과 진정성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이었으며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노동의 집결이다. 아크릴도 아니고 유채물감으로 농사짓듯이 하나하나 낱알을 그렸으니 메시지의 여하함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물감 자체에 담긴 노동의 가치만으로도 경탄할 일이다.
<나무-도시에서>(도판8)는 먹과 아크릴을 쓴 나무그림인데, 이 작품 역시 정정엽스러움의 대명사 같다. 신도림과 구로역 사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는 나무들을 마치 팥알 그리듯이 침엽수의 잎새 하나하나를 그려낸 작품이다. “내가 그려주지 않으면 누가 눈길이라도 주겠는가”. 그의 말은 풋풋하고 덤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정정엽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새겨들어야 한다. 하찮은 생물에게도 생명현상이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시각과 인간사회의 가치나 규범에 의해 왜곡당하는 생명현상을 목격하고는 치열하고 진진하게 수없이 많은 잎새 선을 그었을 그의 손길을 생각해볼 일이다.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 <여자>(도판9)는 여성의 몸을 그린 일련의 연작들 가운데서도 작가 자신을 그린 수작이다. 그는 이러한 몸 그림을 통해서 유화나 아크릴 뿐만 아니라 먹을 사용함으로써 회화작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게 대면하는 매체와의 긴장관계를 넓혀나갔다. <집사람>(2002)은 여성의 팔뚝에 새겨진 집 문신을 통해서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집사랑 정체성으로 각인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스를 만나면 그리스를 그리고
정정엽의 최근작들인 그리스 기행 연작들은 평면회화에 있어서 정정엽의 역량을 잘 드러내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발화의지를 펼치는 데 적절한 방식을 끌어다 쓰는 그의 회화 방법이 각각 성공적인 결과를 낳고 있을뿐더러 농익은 화가의 손길을 뚝뚝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기행전>(사비나미술관, 2004)에 출품한 그의 작품들은 그리스의 문화유적을 풍경의 방식으로만 다루거나 신화의 네러티브를 평면회화에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풍경으로 읽어냄으로써 속이 꽉찬 화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들은 직설적인 신화나 역사, 풍경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가 당대에 던져주는 물음에 관한 깊은 성찰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아테네-역사의 기둥>(도판11)은 기둥 위에 선 일인시위자들을 담고 있다. 그리스유적지라는 것이 남은 것은 대부분이 돌기둥인데, 그는 이 돌기둥을 그저 일차원적인 유적 이상의 것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그리스시대에 돌기둥 위에 올라가서 대중들을 향해 연설을 하던 철학자들의 모습을 현재화한 것이다. 전구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익숙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대의 시대성을 담아낸 것이다. 그림 속에는 학대받는 이라크 포로, 아들의 초상을 들고 있는 강경대 어머니, 세계화 반대 시위자, 고문 받는 사람, 일인시위를 하는 병원노조원, 정신대 할머니나 인도 여인 등과 같은 제3세계 여성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돌 색깔을 붉은 색으로 바꿔서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보여주려는 시각적 장치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사상을 간절하게 설파하던 그리스 철학자의 고독함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이 혼돈의 세계 속에서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일인시위자들의 모습이야말로 부서진 유적을 살아있는 것으로 다시 읽어냄으로써 폐허의 미학을 절감하게 하는 도상들이다.
<돌아누운 여자>(도판12)는 수천년동안 발전해온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초라함을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리스식 시민참여민주주의 속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2500년 전에 발원했으나 아직도 이정도 밖에 성취되지 못한 초라함을 역설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을 뒤로한 채 ‘돌아누운 여자’는 그의 페미니즘적인 정치의식을 은유적으로 풀어낸 그림이다. 화면은 붉은 바탕에 검은 선묘로 이뤄져있다. 그리스의 도자기의 색면 배치 방법을 빌어 쓴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정정엽은 모든 대상들을 입체적 볼륨감 없는 평면으로 처리하고 있다. 또한 기억의 지층 속에서 잊혀져가는 흔적을 띄엄띄엄 배치해 둠으로써 파편화 한 유적의 흔적들을 담았다. 평면화된 화면은 필력을 드러내며 군데군데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 뒤로 돌아누운 여성의 실루엣을 그려 넣었다. 그들만의 리그, 그리스 민주주의의 허상에 대해 차라리 눈을 감는 심정으로 돌아누운 여성을 그려 넣는 정정엽의 방식은 다시 한번 정정엽스러움을 확인하게 한다.
이 그림이 또 다른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비교적 얇은 그림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먹그림에서 모필의 먹선이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간 것 같은 간결한 맛을 가지고 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회화기법에 대해 슬쩍 던지는 한 마디로 자신감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리는가’하는 회화적 방법은 이미 역사속의 선배들이 다 실험해 놓은 것들이 너무도 많으므로, 자신은 그것들을 내 몸에 맞게 변용해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는 방식보다는 ‘무엇을 그리느냐’ 특히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작가의 관심사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는 숲 그림에서 유난히 잔 붓질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 선 하나하나의 느낌에 심취하는 동어반복의 미학, 무아지경의 취미에 대한 역설적인 비판의 일환으로 풍경 속에 무수히 많은 점들을 찍어 넣고 있다. 이렇듯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도발을 감행하는 화가의 끝없는 도전 주제는 자기 몸에 맞는 시각언어를 개발하고 그 품목을 늘여나가는 과정이다. 그런가하면 곡식을 그릴 때는 농사짓는 마음으로 낱알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그렸던 정정엽이 <돌아누운 여자>를 그릴 때는 쓰윽 지나가는 경쾌함으로 많은 것을 덜어낸다. 이것이 정정엽 그림의 미덕이다. 이러한 화가의 덕목은 여행 내내 부지런히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올리브의 바다’를 비롯한 다양한 스케치 작품들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적과 신화로 남은 그리스라는 서구문명의 원형이 오늘날 동북아시아의 한 화가에게 가져다 준 것은 껍질뿐인 폐허의 미학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고대와 당대를 초월하는 역사적 시간성의 지평을 확산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논란을 이끌어 낼 줄 아는 작가가 그림까지 잘 그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적인 화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전형성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액티비스트 feminist-activist
두렁 이래 입김에 이르기까지 정정엽의 창작소그룹 활동과 여성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은 그를 구성하는 실존의 근저 정황이다. 그는 이러한 삶의 실존적 정체를 작업에 담아내고 있다. 그를 둘러싸고 다층적인 정체성의 요소들은 그 수준에 따라 시각언어의 적절한 방식을 찾아 훌륭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작업을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평면 회화 작품을 ‘닫힌 공간에서의 기호’로 파악하고 형식 기호학적 입장에서 평면회화의 프레임에 갇힌 기호의 유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의 기호’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사회 기호학적 입장에서 삶의 현장과 거리나 공원 등으로 열린 공간에서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자는 액티비스트로서의 성향이 강한 두렁과 입김의 정체성을 나눠가진 정정엽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두렁의 신명, 공동체 같은 개념이나 입김의 행동주의, 여성주의 등의 틀을 포괄적으로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정정엽은 다음의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형식적 전형성을 거부한다는 점, 페미니즘 예술을 지향하다는 점, 그리고 포스트 80년대 세대라는 점이 그 세 가지이다. 첫째는 특정한 형식적 전형을 만들지 않고서도 평면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아이콘을 개발하고 주리줄창 반복과 변형을 일삼아서 수십년을 연명하는 형식주의 미술가들의 전형은 정정엽의 작업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가 심미적 회화성에 무관심하다거나 무감각한 것은 절대 아니다. 한 우물 파서 밀어부쳐도 승부수를 띄우기 힘든 미술판에서 상황과 주제에 맞게 그림을 바꿔낸다는 것은 그룹활동이 아닌 개인작업의 여정에서는 채택하기 쉽지 않은 방법임에 틀림없다. 둘째는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룹활동에서나 개인창작 활동에서나 정정엽을 예술가로 살아가게끔 하는 근본 동력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여성으로서 이땅에서 살아나가고 있다는 그야말로 리얼한 실존의 문제를 집요하게 작업의 소재와 주제로 채택해왔다는 점이다. 그의 페미니즘은 어느 날 큰 이야기가 실종된 후에 휴행처럼 번지던 페미니즘을 ‘나도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대학시절부터 두렁과 갯꽃, 여성미술연구회, 입김 등의 단체활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심할 수 없는 순수성과 헌신성,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민중미술운동가로서 80년대 세대의 정체성을 이어오면서 미술계에서 살아남은 드문 면면중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민중미술계열의 작가였다는 점은 미술판에서의 명성과 화랑가에서의 현실적 이익에 별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정엽은 자신의 두렁 활동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소화한 멤버이다. 이러한 그의 과거는 여타의 단체활동을 거치면서 공공성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지역성이라는 화두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작가와 대화하고 자료를 들춰내는 과정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정정엽의 전략과 전술을 가늠해왔다. 그것은 ‘양다리 작전’으로 ‘미끄러지기 전법’이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들은 정정엽을 욕망하는 미술가이면서 동시에 이지적인 활동가이게 만들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와 이 시대의 모순 앞에서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힘으로 한길을 내달려온 작가이다. 이러한 작가 상은 사회운동과 미술운동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데에서 벗어나 양다리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예술은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규정하고 있는 억압적 기제를 깨부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예술영역과 삶의 영역을 넘나들며 양쪽에서 공히 대사회적 파급력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듯 자신을 단련시키며 새로운 작가상을 만들기 위해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필요한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삶에 반응하는 예술, 미술의 가능성과 한계 또한 솔직히 인정하면서 그 한 복판에서 예술하는 방식 자체에 관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미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길. 그것이 바로 두렁 이래 입김에까지 이르는 정정엽의 미술가단체 활동이 안겨준 축복이다. 미술제도의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개인작업과 단체활동을 병행해나가며, 미학적 진정성과 사회정치적인 발언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 그것은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역편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신화 앞에서 무력하게 체제내의 욕망덩어리로 남지 않기 위한 선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제3세계 한반도 남단에서 태어난 자신의 숙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선진국의 일등국민이 아닌 문화식민지의 제3세계 민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랐고, 그 질곡을 헤쳐 나오면서 불혹을 넘겼다.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말이다. 예술가로서 고독하고 가난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가난에 대해 선택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평생작업에 임하기로 한 그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이것은 정정엽을 리얼리즘계열의 두렁 출신 작가로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게 끊임없이 변모하는 작가로 살아온 기본 조건을 명확하게 밝히는 중요한 포인트다. 세상과 조응하는 방식의 문제, 즉 리얼리즘적 태도의 문제다. 나는 이것을 ‘태도로서의 리얼리즘’으로 규정하고 있다. 태도로서의 리얼리즘이란 작품의 조형언어에 있어서 전면적으로 대두되는 전형성의 문제에서 벗어나, 세계를 인식하는 기반으로서의 현실에 대해 예술적 참여와 개입을 전제로 하는 현장성과 그것으로 인해서 담보되는 공공성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작업 또는 작가적 태도를 말한다. 그는 작업 욕심이 대단한 작가이면서도 ‘이상하게 작품에 눌려있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사람됨의 그릇이 크거나 세상을 향해 열린 자세 때문일까? 나는 그것이 정정엽 특유의 양다리 작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야말로 태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뚜렷하게 각인된 아이콘을 남기지 않았다. 그 시대에 충실한 삶을 담아왔을 뿐이다. 그의 야심은 명품 한 점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점의 삶을 담은 따스한 그림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자폐 없이도 고독을 노래할 수 있고, 포용력 있는 계급성을 보여주고 싶고, 사심 없는 작업욕심을 부려보려는” 정정엽의 야심만만한 양수겹장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도판 목록
1. 봄날에, 27*35cm, 목판화, 1988
2. 목장갑, 27*35cm, 목판화, 1987
3. 집사람I, 116*91cm, 캔버스에 유채, 1991
4. 먼길, 130*30cm, 캔버스에 유채, 1993
5. 봄나물, 233*80cm, 캔버스에 유채, 1995
6. 생산, 130*130cm, 캔버스에 유채, 1997
7. 흐르는 대지II, 180*70cm, 캔버스에 유채, 1997
7-1. 집사람, 천위에 아크릴릭, 110*350cm 여섯 조각, 2000
8. 나무-도시에서, 116*3200cm, 캔버스에 유채, 2001
9. 집사람, 76*56cm, 종이에 먹, 2002
10. 씨앗, 172*116cm, 캔버스에 유채, 2003
11. 아테네-역사의 기둥,  220 x 160cm,  캔버스에 유채, 2004
12. 돌아누운 여자, 사이즈?, 캔버스에 유채, 2004

2004/08/16 16:40 2004/08/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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