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포착하는 빛의 언어 : 안종연
critic & column | 2010/01/27 07:28
시공간을 포착하는 빛의 언어
만남은 생산을 주선한다. 이 프로젝트는 문학과 시각예술의 만남에서 나왔다. 인간의 삶 속에서 죽음을 발견하고 시간의 주름을 읽어낸 소설가 박범신과 빛의 세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생성과 소멸을 포착해온 시각예술가 안종연이 만났다. 박범신은 [주름]에서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 소멸하는 존재들에게 헌사를 바쳤다.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통해서 나온 ‘시간의 주름에 관한 기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 존재에 관한 방대한 저작 속에 담긴 시간성의 문제는 시각예술가 안종연에게 성찰적인 모티프를 선사했다. 이전부터 빛과 공간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시간성의 문제에 천착해온 안종연은 박범신의 화두를 자신의 시각언어와 결합해 새로운 버전의 안종연 서사를 펼쳤다. 이들의 만남은 새로운 예술생산을 매개했으며, 나아가 탈장르 소통이라는 문화생산을 견인했다.
안종연의 출발은 여전히 빛이다. 그는 빛을 테마로 다양한 변주를 펼치는 과정에서 장대한 문학적 서사를 압축적인 시각언어로 재발견하면서 시간의 주름을 포착하고 있다. 안종연 서사는 기존에 존재했던 소설가와 화가의 만남에서 보여주었던 문학서사와 시각서사의 단선적인 만남을 넘어서는 심층의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적이다. 안종연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문학적 서술을 시각화하는 데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박범신 서사의 낱낱을 후행하기보다는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의 심급으로 단도직입했다. 그는 문학서사를 풀어헤친 형상회화에서 미니멀한 평면과 입체, 그리고 영상과 설치에 이르기까지 예술언어 전 영역을 두루 꿰뚫었다.
시간의 켜를 발견하는 가장 깔끔한 방법은 중첩이다. 사진 위에 에폭시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매번 색의 느낌을 달리해 줌으로써 맑고 투명한 계열 색을 얻어내되 그 가운데 안료의 중첩을 시간성의 축적으로 연결한 에폭시 작업들이 있다. 워낙 금속 위주의 강한 재료를 많이 다뤄왔던 터라 액체 성분의 에폭시를 붓고 굳히는 과정을 반복한 이 작업들은 작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그는 이 작업들을 통해서 새로운 표현 언어를 체화했다. 그는 재료와 기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작가로 유명하다. 탁월한 매체 장악력은 안종연의 최대 미덕이다. 언제나 새로운 상황과 대면해서 도전하고 실험하는 자세가 그의 언어를 고착화한 자기만의 언어가 아닌 유동적인 상호성의 언어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배경으로 쓰이는 프린트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유리 캐스팅 작업을 통해서 다양한 크기와 문양의 유리 입체를 얻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도 완결된 조형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빛을 투사했을 때 그 빛을 굴절해서 환상적인 빛 놀이를 펼치게 하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안종연은 이 ‘빛놀이’를 변형, 확장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생성한다. 이른바 원 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개념이다. 유리 캐스팅은 그 색과 문양으로 인해 빛을 조절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그것으로부터 나온 빛은 공간을 투영하는 판타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다시 사진과 영상으로 전환하여 제2, 제3의 작업으로 연결시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업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빛나게 하는 현란한 변주곡이다.
블랙 미러를 쪼아서 빛의 형상을 담은 <빛의 에젠> 연작은 맑고 깊은 안종연식 평면이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의 영성을 담고 있는 에젠(Ezen) 개념을 끌어들인 제목으로 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유도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의 존재를 통해서 영매로서의 예술(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빛의 여백> 연작은 컬러 스테인리스스틸 판재 위에 전동 드릴로 쪼아서 형상을 새기고 그것을 다시 열처리 과정을 거쳐 완성하는 안종연 특유의 기법으로, 물결의 파동이나 풍경 등을 통해서 빛의 확산을 시각화 한 작품들이다. 안종연 자신과 이 프로젝트의 동반자인 박범신 두 인물을 새긴 초상 작업과 더불어 이들 블랙 미러와 컬러 스테인리스 작품들은 근 몇 년간 금속 패널 위에 그림을 그려온 안종연의 독특한 시각 언어들이 얼마나 성찰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회화의 일루전이 불러일으키는 판타지가 매력적인 작품도 있다. <바이칼의 에젠>은 현실과 이데아 사이에 존재하는 도시의 모습을 담은 역작이다. 붓질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액체 성분의 에폭시를 부어 고착화 시키는 과정에서 얼어붙은 이상향의 도시를 펼쳐 보이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같은 개념의 페인팅 <폭설>과 비교해보면 표면 처리의 변주에 따라 그의 그림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여느 작품들에 비해서 비교적 명시적으로 소설의 서사를 끌어들여 상황과 장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캔버스 페인팅에 반짝이는 보석들을 붙이고 에폭시를 부어 만든 이 작품들은 페인팅이 여전히 강력한 시각언어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접근한 작품으로는 에폭시 드리핑 페인팅(epoxy dripping painting)을 꼽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평면 위에다가 에폭시를 붓고 그 위에 색을 얹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시간의 켜를 쌓는 수행성을 동반한다. 켜켜이 쌓이는 시간의 주름을 안종연은 물질의 중첩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 결과는 가장 심플하게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원의 형상이다. 문학서사와 시각서사를 연동시키는 데 있어 최소주의 방식을 채택하면서도 그 심급을 가장 깔끔하게 담아낸 작품이 <새날들의 시작> 연작이다. 이 작품들은 여러 겹으로 중첩된 에폭시 층에 맑은 안료를 반복해서 펼친 결과물이다. 경계선이 뚜렷한 원형을 이루는가 하면 진한 것에서 옅은 것으로 번져가는 형상, 동그라미의 선을 이루는가 하면 그 선을 깨트리거나 생명체의 원형질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평면을 넘어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시각성이 가져다주는 지각의 깊이를 실감하곤 한다. 녹슨 스틸 판재를 얽어서 만든 <빈 중심>은 평면에서 입체로 코드를 전환함으로써 공간을 생성하고 그 속에서 시간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예술적 직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각각 다른 크기의 판재 원들을 겹쳐서 입방체 타원을 만들어냈다. 인간 형상을 넣은 판재들이 켜켜이 겹쳐져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들 사이에서 영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시간성의 사유를 포착한 작품이다. 녹슨 쇠의 물성도 그러하거니와 판재의 중첩으로 입체를 만들고 그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이 작품이야말로 안종연 언어의 특성을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페인팅이나 드리핑 기법에 의한 평면 작품들과 더불어 철재, 목재, 사진, 영상 등으로 매체를 확장하는 안종연의 예술은 조명으로까지 이어진다. 안종연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리 공예술을 첨단의 조명기술과 연동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유리 캐스팅 안에 LED 조명을 넣고 그것을 거울 앞에 펼쳐서 볼록이나 오목의 원형으로 확장한다. 안종연의 조명술은 빛의 에너지로 시각적 판타지를 생생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공간의 확장을 끌어내고 시간의 주름이라는 일관된 주제로까지 연결해내는 통섭의 예술을 잘 보여준다. 입체와 영상을 결합한 <만화경>은 에폭시 페인팅 연작에서 얻은 이미지들을 다양한 화면으로 변주한 애니메이션을 거울 설치와 조명과 함께 연동함으로써, 켜켜이 확장하는 공간 속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시간과 공간, 즉 만다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빛을 이용한 안종연의 공간설치는 우주의 공간 속에서 시간성의 원형을 체험하게 하는 방대한 스케일이 시각 서사를 구축한다. 안종연의 시각 서사가 마침내 웅장한 장면과 상황으로 전개하는 곳이 바로 이 빛 공간이다. <빛의 에젠>은 유리 캐스팅으로 만든 다양한 구체들을 통과한 빛들이 펼치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그는 이 빛 공간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이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 생성과 소멸의 문제가 하나의 화두로 집약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그것은 그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빛의 세계이다. 그에게 있어서 빛은 예술언어의 출발이자 결말을 이룬다. 그 빛은 삶을 성찰하는 예술가의 영성과 직결한다. 영매로서의 예술가 주체를 향한 안종연의 걸음이 오롯이 담긴 것이다.
안종연의 세계는 예술과 기술, 물질과 비물질, 조형과 개념, 시각예술과 문학 등 서로 이웃하면서도 경계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영역과 범주들에 두루 걸쳐있다. 그는 예술 영역에 발 딛고 서서 그 범주를 확장하는 예술인일 뿐만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영역을 이어주는 메신저이다. 그는 예술과 그 바깥을 두루 꿰뚫는 인터아트(Inter-art)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양식과 활동방식을 무한히 확장한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지금 걷고 있는 길, 그리고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 모두에 있어서 안과 밖을 넘나드는 탈경계의 상호성은 그의 삶과 예술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그것은 예술가의 지위를 상호작용을 통해서 협업하는 사유의 실천가로 재정립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종연은 탈근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예술을 열망하며 예술체제의 전환을 실천하는 통합과 통섭의 예술가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안종연 개인전 (2010.2.3-, 학고재) 서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