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특정적 가치와 공공미술

critic & column | 2013/09/24 22:00


도시특정적 가치와 공공미술

김준기(미술평론가)

공공미술은 특정적이다. 공공미술이 특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장소의 특정성과 필연적으로 만날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의 제작을 지원하거나 주문하는 재원의 특정성과 만나고, 공공적인 의제라는 특정성과 만나기 때문이다. 재원의 공공성이야 기본 전제조건이라 치더라도 장소성과 의제의 문제는 좀 곤란한 형국에 놓이기 십상이다. 대체로 장소성의 범위를 작품 주변의 물리적 환경으로 국한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그 작품이 어떤 의제를 다루며 소통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고민이 적기 때문이다. 전시장과 같은 전문화한 미술문화 공간에서의 작품 설치는 작품을 둘러싼 주변 공간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작가의 선택 폭이 넓다. 그러나 그 바깥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미술작품을 위해서 주변 공간을 뒤바꾸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이 주변 환경에 맞춰서 자신의 모양과 크기, 빛깔 등을 결정해하는데, 공공미술의 이러한 낮은 처신은 ‘장소 특정성(site specific)’이라는 개념이 바닥에 깔린 개념이다.

특정 공간의 장소성은 작품 주변의 물리적인 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작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면면에 대한 섬세하고 신중한 헤아림도 매우 중요하다. 사용자들이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들은 작품을 어떤 각도에서 감상하며 그 동선은 어떻게 흐르는지, 그들의 몸이 작품과 만나는 방식을 어떤 것인지 등에 관해서도 배려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건축물미술장식품들의 경우는 장소 특정성을 고려하기에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인다. 건축설계 도면을 들고 작품의 위치를 선정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주제와 형태, 크기, 재료 등을 정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길 깔기와 나무 심기 등의 조경 작업들도 작품과는 무관하게 일방통행하기 일쑤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려고 해도 준공검사 맞추기에 급급한 현재의 제도로는 건축물과 그 주변을 이어주는 좋은 공공미술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건축주의 마음이 예술적 소통을 통해서 건축물과 그 주변의 장소성과 동행하는 차원의 수준 높은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데 있느냐 하는 점이 커다란 변수인데, 불행히도 그런 경우는 드문 게 사실이다. 작품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주의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와 같이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어느 것이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느냐 하는 공공미술의 잣대가 앞설 수밖에 없다. 예술가의 자율성은 시민사회의 공공성과 대결 국면을 맞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20세기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진리이다. 어쩌면 예술의 자율성을 운운했던 20세기가 누렸던 예술가의 지위는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기로 꼽힐지도 모르겠다. 모더니스트들이 얘기했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이념이 이미 상당부분 자본권력에 의해 잠심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는 어떻겠는가.

공공성의 견지에서 예술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장소성의 문제는 대체로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역으로 장소성을 절묘하게 살림으로써 날개를 다는 경우도 많다.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몇몇 공공미술 작품들의 경우에 장소 특정적 예술의 사례로 언급할 만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훔볼트 대학 앞에서 유태인 학자들의 책을 불태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만든 공공미술 작품은 낮은 공공미술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유태인인 미하 울만(Micha Ullman)은 야만적인 문명학살을 지하 서고로 표현했다. 광장 한 가운데 지하를 파고 그 속에 하얀 빈 책꽂이를 설치한 것이다. 밤이면 그 속에서 나오는 빛으로 마치 지난날 책을 불사를 때와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청계천 시발점에 세워진 올덴버그의 <스프링>은 장소 특정성을 철저하게 배반했다. 생태하천을 표방한 도심 속 하천 공원의 시점부에 세워지는 것이기에 많은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 기능을 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의 특정성과 무관하게 국외유명작가의 명품주의로 흘러버린 이 작품은 두고두고 실패사례로 언급될 것이다.

현대미술은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으로부터 출발했다. 현대미술 이전의 미술이 특정 공간에 묶인 것이었다. 모더니즘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은 그 처소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근본이 달라졌다. 대부분의 역사적인 명작들은 최초에는 특정한 장소에서 나름의 쓰임새를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대다수의 조각들은 건축물의 일부였다. 회화작품들도 제작단계부터 어느 공간에 배치될 작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의 주제와 형태와 색채, 재료, 크기 등을 결정한다. 미술이 독립적인 영역과 체계를 갖추면서 그 이전에 미술의 전제 조건이었던 장소의 맥락은 대부분 그 의미를 상실했다. 특히 20세기 들어서 본격화한 모더니즘 예술은 회화 그 자체, 조각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변모했다. 장소로부터의 해방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이념 아래서 매우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장소 개념과 상관없이 미술작품을 향유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미적 가치 운운하는 것도 이러한 특정 공간으로부터의 해방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작품이 공간이나 장소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미술작품을 하나의 예술적인 물질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질로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미술작품의 소통을 매개공간은 전시장이라는 공간이다. 전시장은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약속된 공간이다. 미술관이 하나의 제도 공간으로 자리를 잡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체계적인 제도를 만들어 온 것이다. 미술작품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전시장 공간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적인 진보이다. 전문적이고 전문적인 미술작품의 수집과 보존, 연구와 전시,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있음으로 인해서 미술계는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예술적 소통이 전시장 공간과 동일한 시각의 일방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데 있다.

서울 도심의 공공장소에 있는 미술작품들은 어떤 방식으로 장소와 만나는가?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이 있다. 돌조각의 형태미나 비례, 세부 표현 등을 따지고 들어 미학적인 평가 판단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조형적인 비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작품의 장소 특정성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해태상> 인근에는 가장 기념비적이고 상징적인 조형물인 <이순신장군동상>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군인출신의 정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화정치의 결과이다. 이 작품 자체로만 보면 탄탄한 조형성과 상징성을 가진 명작이다. 그러나 세종로라는 장소성과 이순신이라는 전쟁영웅의 동상이 공존하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다른 문맥에서 읽어볼 대목이다. 장소 특정성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예술을 진리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공미술은 이렇게 장소성을 오용하고 남용한곤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이 주문생산형 공공미술의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독일의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의 <모자상>은 작품을 둘러싼 공간의 조건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작품 감상을 좌지우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만큼 전쟁의 상처를 깊이 담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는가.” 전쟁의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든 이 작품에 대해 초라해 보인다거나 비극의 처절함이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논평들에 대해 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텅 빈 공간 속 한 가운데에 아들을 안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다. 건물 천정이 뻥 뚫린 상태여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다. 아무 장치도 없이 공간 한가운데 바닥에 놓인 브론즈 조상이 있고 그 위에 빛을 떨어뜨리는 천정의 구멍. 그것은 빛을 끌어들이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눈과 비를 끌어들이는 장치이다. 그 천정의 구멍 하나로 인해 이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도 많이 변했다. 도시의 곳곳에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건축물미술장식품법이라는 법제도 때문에 억지로 세운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획일적인 문화정치에 따라 동일한 작품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배치되는 일이 반복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60,70년대식의 직접적인 이데올로기 주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공간 가운데 우뚝 서서 주변을 지배하며 웅변하려드는 남근주의는 여전하다. 역사성이나 장소의 특수성과는 상관없이 알 수 없는 작가주의를 앞세워서 공공공간의 미술작품으로는 함량미달이라는 지적을 받는 경우도 많다. 물론 좋은 사례도 있다. 새로 지은 서울역사 앞에 있는 박기원 작가의 작품 <자-넓이>이다. 형태는 매우 심플하다. 철판과 돌로 만든 직각 자 형태의 기하학적인 구조물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외관상 얼마나 미적인 형태와 색채와 재질감을 가지고 감상자에게 미적인 감동을 전달하는가 하는 점이 감상 포인트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작품은 공공장소에 놓인 작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 의미심장한 논점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기능을 겸하고 있는 스트리트 퍼니처다. 그런데 그 공간은 대체로 노숙자들의 전용공간이다. 나는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저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저 작품을 잘 사용해 주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왜 저들만이 저 작품을 독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동시에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바꿨다. 서울역 안의 벤치들이 노숙자들이 드러눕지 못하도록 자리 사이사이에 팔걸이를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행태를 목격한 이후의 일이다. 그 작품이라도 있어서 역 앞에 드러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소수자에게 금지가 아닌 허용을 허락하는 공간을 만드는 예술작품이다. 이렇듯 공공미술 작품은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의미 해석의 폭이 달라진다.

인간의 삶이 집결해 있는 공동체와 장소성의 만남은 한층 더 깊게 공공미술이 영역을 확장한다. 경기도 평택의 사라진 마을 대추리 현장예술 작품들은 공동체와 예술가의 만남을 새로운 공공미술의 가능성으로 이끈 사례이다. 지난 2004년부터 3년간 이 마을을 찾은 수많은 예술가들은 마을의 장소성과 동행했다. 이들의 작업은 장소 특정성을 넘어 의제 특정성(issue specific)을 획득했다. 장소의 특수성을 반영한 작업이라는 공간의 조건뿐만 아니라 그 장소의 상황까지도 끌어들여 특정한 이슈를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의제 특정적인 예술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 곳곳에 고운 흙더미를 쌓아 둔 채 해를 넘기고 있던 대추리 마을을 찾은 이종구는 그 흙더미 뒤편 벽에 일하는 농부를 그려넣어 그 공간의 장소성을 절묘하게 살렸으며 동시에 그 마을의 이슈를 감동적인 예술 작품으로 남겼다. 이윤엽의 마을 박물관은 동네 곳곳의 버려진 집에서 수집한 잡동사니들과 주민들의 사진이미지들을 모아서 꾸민 오브제 설치 작업이다. 최병수는 부서진 대추분교의 잔해더미 위에 일상의 사물들을 매달아 솟대 작업을 했다. 대추리 예술은 장소 특정성을 의제 특정성으로 진일보시킨 커뮤니티 아트이자 액티비스트 아트의 좋은 사례들이다.

도시 속에 자리 잡는 공공미술 작품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량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건축물미술장식품들의 경우 장소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아직도 생산자 중심의 사고에 사로잡혀서 작가의 스타일 그 자체를 특정 장소에 개입시키려는 일방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와 예술 작품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장소성과 예술성이 동행이라는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의해서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공공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 개념과 공존하는 것이 공간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상호 의존적이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축선 위에 존재한다. 동시에 예술은 그 시간과 공간의 축선을 벗어나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추구한다. 이 명제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장소 특정성과 예술 생산 또는 향유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소 특정성은 예술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구원하는 개념이다.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의 개념 속에 뿌리 내린 판타지이자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도시특정적인 가치와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장소특정성과 의제특정성을 아우르는 뮌스터조각프로젝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1977년 이래 10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독일의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10년 단위로 변화해나가는 예술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도시의 실재공간을 대상으로 장소성과 역사성을 살리는 예술적 실천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뮌스터의 아트는 미술의 공공성과 현장성을 재검토하게 한다. 그것은 장소성의 문제와 더불어 의제와 결합하는 미술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서는 뮌스터가 애초에 재기한 도시공간 속에 스며드는 미술이라는 장소성의 이슈, 즉 물리적인 장소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장소나 지역의 역사성과 동시대의 이슈를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공공의 장소라는 특성을 드러낼 뿐더러 시민시회가 공유할 수 있는 공론의 정황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동시대 어느 미술행사보다도 전위적인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뮌스터는 연륜이나 규모가 베니스에 훨씬 못미치는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베니스의 노후한 시스템에 비해서 훨씬 더 열린 개념의 미술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을 만국박람회 개념으로 집대성해놓고 집단적인 관람문화를 이끌어내는 베니스에 비해 차분하게 도시의 장소와 맥락을 따라서 창작과 향유를 통한 문화생산의 분위를 이끌어내고 있는 뮌스터는 미술의 생산과 소비에 관해 진일보한 관점과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뮌스터와 카셀의 비교 또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뮌스터는 도시의 실제 공간 속으로 파고들어 작품을 영구설치하는 데 비해서 카셀은 현대미술의 첨예한 이슈를 중심으로 일시적인 전시 행사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일정한 공간에서 대규모 작품전시를 통해서 현대미술의 담론과 실천을 집중조명하는 카셀과 달리 뮌스터는 유동하는 관람개념을 가지고 있다. 작품이 흩어져있고 관람자는 도시를 유영하며 작품과 조우하는 방식이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곳곳을 질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제공하는 곳이 비단 뮌스터 뿐만은 아니겠지만, 자전거 여행과 미술작품 감상을 결합시킨 이 도시의 독특한 매력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말할 만하다. 호수와 녹지대, 오래된 건축물로 가득 찬 도시 곳곳에 작품들이 스며들어 있다. 사실 여느 도시에 비해 특출한 볼거리를 가진 곳은 아니지만, 뮌스터라는 작은 도시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는 것은 전시장이나 조각공원이 아닌 곳에 예술작품을 배치해두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자전거를 이용해서 혹은 걸어서 찾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하게 하는 배치의 미학 때문이다. 세계 유수의 대규모 미술축제들이 많이 있지만 뮌스터만큼 알차게 행사 이후 지속적으로 도시공간 속에 조각 작품을 남기는 축제는 드물다.

오래된 건축물과 호수와 녹지대로 가득찬 도시의 곳곳에 작품들이 스며들어 있다. 구스타프 메츠거 같은 작가는 장방형의 돌덩어리들을 매일 다른 장소에 옮겨서 설치하면서 갖가지 조형과 상황들을 연출해낸다. 안드레아스 지크만은 현대도시가 쏟아낸 합성수지 조형물들에 갖가지 기호들을 새기고 그것을 해체해서 거대한 구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지를 생성하고 소비해내는 방식을 뒤집어보고 있다. 마이크 켈리는 커다란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소와 말, 양, 닭 등 동물을 풀어 놓았다. 가운데는 소금기둥을 깎아서 만든 조각 하나가 서있고 주변에 영상 세 개가 매달려 있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끌어들인 작품이다. 소금기둥과 동물들과 영상이 어우러진 이 설치작업은 소금기둥을 핧아먹는 동물들에 의해 그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파트 알트하메르의 <길>은 잔디밭의 잔디를 일직선으로 길게 걷어내어 길을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무심코 지나쳐서는 도저히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업이다. 호수물을 끌어들여 다시 내뿜는 살수차 작품은 귀욤 빌의 작품 또한 일반적인 조각 개념을 위반한다. 작품의 조형적 요소보다 물을 정화한다는 메시지 자체가 중요한 작품이다.

뮌스터의 작품들은 단순하게 작품을 어디에 설치 혹은 배치해두었는가 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도시의 생태와 역사를 동시대적인 예술언어로 끌어안음으로써 예술적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안네트 베흐만의 <아스파(AaSpa)>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철제 담장 너머로 공사현장을 목격하게 한다. 도시의 수익창출을 위해서 온천을 개발해야 한다는 논쟁에 대해 실제의 상황보다 한발 앞서서 중장비들을 동원해서 거대한 공사판을 벌여놓은 것이다. 아트의 영역을 기성의 장이나 그 바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카셀도쿠멘타에서도 이와 비슷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카셀의 고성 아래 둔덕에 태국작가 사카린이 만든 계단식 논이 그것이다. 유럽의 고성에 동남아시아의 농경문화를 접목시킨 것이다. 현대미술은 이렇듯 문화유적지를 현대미술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얼핏 보아서 그냥 흙을 파헤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대지미술 작품은 인간이나 기계의 행위의 흔적 자체를 남기는 행위를 넘어선 현대미술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이나 볼륨, 숭고미 등과 같은 미학적인 문제들에 접근하는 미술의 문제에 수렴하는 이슈가 아니라, 지역의 현안이나 대륙을 횡단하는 이질적인 문화 접목 등과 같은 의제특정적(issue-specific) 미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뮌스터의 장소특정적이며 의제특정적인 미술은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 전방의 장소와 의제를 아우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모더니즘 미술 작품은 부르스 나우만의 역피라미드 작품이다. 25미터 정방형의 역피라미드를 땅밑 2.3미터 깊이로 파고들어 콘크리트로 마감한 이 작품은 1977년에 나온 계획을 30년만에 실현한 작품이다. 본격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경향을 보이는 이 작품은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주변의 환경을 각각 다르게 체험하는 현상학적 미학관점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어찌 보면 구시대적 발상이지만, 그러나 미술작품이 도시의 공간 속에서 관람자의 시지각 체험을 각성하는 일을 지속할 필요가 있는 한 여전히 유의미한 작업일 수 있다.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의 <색다른 뮌스터>라는 작품은 지난 30년동안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 참가해서 설치된 작품들의 미니어처를 만들어서 공원 잔디위에 설치했다. 한도시의 곳곳에 자리잡은 작품들의 다양한 형상과 색채를 동일한 공간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면서 실제의 도시 공간에 다른 크기로 설치되었을 때의 맥락과 비교해보도록 한 것이다. 조각이 장소와 맥락에 따라서 얼마나 다르게 읽힐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난 수십년간 지속된 뮌스터의 핵심 의제는 개입으로서의 조각이었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의 캐치프레이즈는 ‘지역적 상황과 환경에 개입하는 조각’이다. 이것을 비평적 용어로 부를 수 있는 말이 워크 인시투 아트(work insitu art)이다. 한국에서 주로 현장미술이라고 불러왔던 개념과 유사한 것이며, 조각심포지움의 형태로 열리는 현장작업미술축제와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현장미술의 일회성이나 조각심포지움의 작가중심주의 프로젝트와는 차별성을 가지는 것이 워크 인시투 개념이다. 여타의 작품생산과 향유의 개념과 차별화하는 워크 인시투 개념은 라티어 인시투(insitu)에 있다. 인시투는 장소와 상황의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장소특정성(site-specific) 개념이 강조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장소성 문제를 넘어선다. 장소성이 공간의 문제에 한정되어 있다면, 시간성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이 인시투개념이다. 특정한 장소는 영원불멸의 공간으로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상황과 조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시투 개념은 시공간을 총체적으로 투영하는 예술창작과 향유를 지향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조각은 어떤 좌표 위에 놓여있는가? 뮌스터조각프로젝트가 보여주고 있는 장소와 의제를 맥락화하는 예술프로젝트는 시스템 모방 이상의 진지한 토론과 실천이 있어야 실현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모두 함께 돌아볼 시점이다.

*이 글은 장소 및 내용 특정적인 공공미술에 관한 필자의 글들을 재구성하여 가필한 것이다.

2013/09/24 22:00 2013/09/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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