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돈 눈뜨게 해주세요
critic & column | 2005/01/25 16:21
눈먼 돈 눈뜨게 해주세요
김준기(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로 바뀐다. 말 그대로 ‘문예진흥원의 모든 권리와 의무와 재산을 위원회가 승계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 그 틀이 그 틀 아닌가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많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민간이 주도하는 ‘위원회’라는 점이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진흥하기 위한 ‘민간의 합의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별도의 지방문화예술위원회 설치 근거 규정을 두었으며 재단법인 설립 근거를 마련해서 지역협의체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위원회 산하에 공무원 파견 조항을 넣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민간이 운영하는 단체인 것이다.
민간합의체,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
참여정부 출범이후 지난 해 봄 국무회의를 거쳐 가을에 문광위에 상정되고 연말 본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기까지 수많은 논의를 거친 문진원의 민간위원회 전환이 드디어 올 여름의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 민간합의체라는 것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위원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문광부장관이 위원을 위촉하며, 위원회 산하에는 소위원회를 두어 실제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고 보니 각 분야별 1인의 위원이 해당 분야에 차지하는 위상은 한마디로 막강파워 그 자체다. 3년 임기의 위원을 누가 어떻게 맡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전통예술 등 문화예술 각 분야 인사를 균형감 있게 안배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장르별로 1인씩의 위원 자리가 할당되어 있는 셈이다.
문화예술진흥원원회를 놓고 파당을 생각해본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두어 개 정도의 단체가 떠오른다. 문학, 미술, 음악, 전통예술 등 적어도 열개 정도는 족히 채울만한 이른바 장르별 안배에 의해 11인의 위원이 위촉될 것이다. 민간합의체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위원회는 “기금운용계획안, 평가, 중요정책 수립” 등 명실공히 제반 업무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했다. 이렇듯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된다는 위원회에서 각 분야별로 1인씩의 위원을 정점에 두고 움직인다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1인의 위원이 한 장르의 정점으로 소위원회를 꾸려 일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방통행을 제어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임기를 만료한다고 해도 사람은 가고 조직은 남는다. 어떤 사람이 오느냐에 따라서 틀거리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사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 마련이 있어야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일을 한다. 아무리 시스템이 훌륭해도 그 시스템을 굴리는 사람의 마음이 곧지 않으면 일이 잘 될 턱이 없다. 그런데 사람 마음의 곧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해서 거꾸로 사람의 곧은 마음을 얽어놓은 것이 시스템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제각각인 생각들을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당파를 형성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편린이라고들 말한다. 상당부분 이 당파의 차이를 통해서 제각각인 생각의 차이에 대해 서로 이해를 구하고 차이를 조절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합의정신의 모태라고 믿고 있다. 세상의 이치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좁히는 일인 바에야, 문화예술계 민간 주체들의 깔끔한 합의를 기대한다. 다만 바라는 바는 모종의 이분법적인 구도에 의해 나눠먹기식으로 양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을 가동하는 사람의 문제다. 사람을 배치하는 문제다. 이 대목에 대해 어떻게 합의했는지 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꼼꼼히 헤아려볼 것이다.
눈먼 돈 눈뜨게 하는 위원회
위원회의 가장 큰 일은 기금 사업이다. 문예진흥기금을 분배하는 일말이다. 해마다 기금 분배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이 대목에 대해 몇 가지 보탤 말이 있다. 얼마 전 미술계의 한 열정적인 작가와 문예진흥기금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올해도 문예진흥기금을 신청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명망있는 학교의 미술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큐레이터로서 내가 아는 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에 만해도 40여회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가장 열심히 다른 작가들의 전시를 꼼꼼이 살펴보는 작가다. 그런 그가 번번이 기금 신청에서 낙방을 한다. 반면에 일년에 기획전 몇 번 할까 말까 한 작가는 버젓이 기금을 받아서 폼 나게 개인전을 치른다. 그것도 필요비용 이상으로 기금을 얻어 쓰는 경우도 많다. 어떤 작가는 이런 행태에 항의라도 하듯이 단돈 200만원만 신청했다가 문예진흥원 담당자에게 숫자를 잘못 쓴 것 아니냐는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은 그 돈만 있으면 충분히 개인전을 할 수 있다고 답했고, 결국 비슷한 선에서 지원기금을 받았다.
개인전 지원기금에 관한 뒷얘기들이 이 정도이고 보면 여타의 항목들은 오죽하겠는가. 해마다 여기저기 엄한데 들어가는 돈이 뭉텅이로 눈에 띈다. 미술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선수가 어떻게 작업하고 있고,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금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중구난방이다. 이것도 사람의 생각차이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현장에서 발로 뛰는 작가, 기획자, 비평가들은 문예진흥기금의 심사 결과가 이것저것 가려서 가장 무난한 결과를 도출하다 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저 그런 결과를 낳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눈먼 돈이라는 것. ‘재수 좋게 얻어 걸리는 놈이 재주 좋은 놈’이라는 속설이 통하는 판이다. 미술관 현장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로서 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가 “눈먼 돈 눈뜨게 하는” 위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문제의 선결 과제는 심의체계를 가다듬는 일이다.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내용을 심의에 반영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그 중에 구체적인 것 하나만 말하자면 이렇다. 심사위원 구성의 문제다. 현장에 밀착해 있는 작가와 기획자, 비평가의 현장의 매서운 눈매를 통해서 실사구시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교수 일색으로 채워서는 현장의 돌아가는 판을 읽을 수 없다는 지적에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작품을 보지도 않고 작품을 평가하는 관행을 줄여야 한다. 돌아가는 판을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한다는 것,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분권과 자치라는 기조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중앙집중식 기금 분배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작가들의 창작활동 지원을 작가들의 주소지별로 시군구 단위의 지방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지역분산의 묘미를 발휘해야 한다. 이 때 정말 유념할 사항이 있다. 서울을 하나로 묶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이 하나라는 상상을 버려야 한다. 서울은 정말 다르다. 강남이 다르고 강북이 다르다. 노원구와 성북동이 다르고, 마포구와 종로구가 다르다. 이 다름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술문화를 보자면, 어떻게 서울의 미술문화를 인사동과 사간동이라는 종로구에만 집결하고도 문화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철저한 중앙집중식 문화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서울의 문화 중심을 해체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서울의 각 구에는 구민이 살고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들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새로운 창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각 지역마다 적지 않은 규모의 문화인프라가 이미 대부분 구축되어 있다. 이 토양을 살리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영원히 특구 아닌 특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지원 방식에 있어서 선택집중과 소액다건의 정책적인 역할분담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정책적인 지원 방향을 선택하고 집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선호하는 상업주의 문화전략이 침투하여 황폐화할 위기에 놓인 분야, 장기적인 안목에서 꼭 지켜내거나 키워야하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미술은행제도에서도 기존의 상업화랑 시스템이 선호하는 장식성 위주의 컬렉션 가능성이 대두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공공성이란 이럴 때 발휘되는 것이다. 자본이 명령하지 않는 예술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말이다. 당장의 자잘한 먹거리를 나눠주기에 급급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돈 안 되는 예술이라도 우리 사회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예술을 지켜주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정말 필요한 것이 선택과 집중이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이리저리 갈라 쓰는 것보다 선택하고 집중해서 성과 있는 사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앞서 예를 든 작가의 경우처럼 다만 몇백만원이라도 지원받으면 큰 힘이 되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소액다건의 묘미를 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럴 때 지역별로 안배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창작에 매진하는 작가들을 지원하는 균형 감각을 도입한다면 문화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화향수권 확대와 작가지원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상에서 말한 심의체제 개선, 자치와 분권 기조 확립, 선택집중과 소액다건의 역할분담 등 몇 가지 작은 얘기들은 사실은 위원회 전환이라는 큰 틀의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되짚어본다. 어떤 시스템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이 지향하는 바가 진정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문제는 어떻게 합의 하느냐로 소급한다. 깔끔한 민간의 합의를 기대한다.
* <문화예술>지 2005년 2월호 기고문입니다.
김준기(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로 바뀐다. 말 그대로 ‘문예진흥원의 모든 권리와 의무와 재산을 위원회가 승계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 그 틀이 그 틀 아닌가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많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민간이 주도하는 ‘위원회’라는 점이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진흥하기 위한 ‘민간의 합의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별도의 지방문화예술위원회 설치 근거 규정을 두었으며 재단법인 설립 근거를 마련해서 지역협의체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위원회 산하에 공무원 파견 조항을 넣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민간이 운영하는 단체인 것이다.
민간합의체,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
참여정부 출범이후 지난 해 봄 국무회의를 거쳐 가을에 문광위에 상정되고 연말 본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기까지 수많은 논의를 거친 문진원의 민간위원회 전환이 드디어 올 여름의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 민간합의체라는 것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위원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문광부장관이 위원을 위촉하며, 위원회 산하에는 소위원회를 두어 실제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고 보니 각 분야별 1인의 위원이 해당 분야에 차지하는 위상은 한마디로 막강파워 그 자체다. 3년 임기의 위원을 누가 어떻게 맡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전통예술 등 문화예술 각 분야 인사를 균형감 있게 안배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장르별로 1인씩의 위원 자리가 할당되어 있는 셈이다.
문화예술진흥원원회를 놓고 파당을 생각해본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두어 개 정도의 단체가 떠오른다. 문학, 미술, 음악, 전통예술 등 적어도 열개 정도는 족히 채울만한 이른바 장르별 안배에 의해 11인의 위원이 위촉될 것이다. 민간합의체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위원회는 “기금운용계획안, 평가, 중요정책 수립” 등 명실공히 제반 업무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했다. 이렇듯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된다는 위원회에서 각 분야별로 1인씩의 위원을 정점에 두고 움직인다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1인의 위원이 한 장르의 정점으로 소위원회를 꾸려 일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방통행을 제어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임기를 만료한다고 해도 사람은 가고 조직은 남는다. 어떤 사람이 오느냐에 따라서 틀거리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사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 마련이 있어야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일을 한다. 아무리 시스템이 훌륭해도 그 시스템을 굴리는 사람의 마음이 곧지 않으면 일이 잘 될 턱이 없다. 그런데 사람 마음의 곧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해서 거꾸로 사람의 곧은 마음을 얽어놓은 것이 시스템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제각각인 생각들을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당파를 형성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편린이라고들 말한다. 상당부분 이 당파의 차이를 통해서 제각각인 생각의 차이에 대해 서로 이해를 구하고 차이를 조절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합의정신의 모태라고 믿고 있다. 세상의 이치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좁히는 일인 바에야, 문화예술계 민간 주체들의 깔끔한 합의를 기대한다. 다만 바라는 바는 모종의 이분법적인 구도에 의해 나눠먹기식으로 양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을 가동하는 사람의 문제다. 사람을 배치하는 문제다. 이 대목에 대해 어떻게 합의했는지 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꼼꼼히 헤아려볼 것이다.
눈먼 돈 눈뜨게 하는 위원회
위원회의 가장 큰 일은 기금 사업이다. 문예진흥기금을 분배하는 일말이다. 해마다 기금 분배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이 대목에 대해 몇 가지 보탤 말이 있다. 얼마 전 미술계의 한 열정적인 작가와 문예진흥기금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올해도 문예진흥기금을 신청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명망있는 학교의 미술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큐레이터로서 내가 아는 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에 만해도 40여회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가장 열심히 다른 작가들의 전시를 꼼꼼이 살펴보는 작가다. 그런 그가 번번이 기금 신청에서 낙방을 한다. 반면에 일년에 기획전 몇 번 할까 말까 한 작가는 버젓이 기금을 받아서 폼 나게 개인전을 치른다. 그것도 필요비용 이상으로 기금을 얻어 쓰는 경우도 많다. 어떤 작가는 이런 행태에 항의라도 하듯이 단돈 200만원만 신청했다가 문예진흥원 담당자에게 숫자를 잘못 쓴 것 아니냐는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은 그 돈만 있으면 충분히 개인전을 할 수 있다고 답했고, 결국 비슷한 선에서 지원기금을 받았다.
개인전 지원기금에 관한 뒷얘기들이 이 정도이고 보면 여타의 항목들은 오죽하겠는가. 해마다 여기저기 엄한데 들어가는 돈이 뭉텅이로 눈에 띈다. 미술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선수가 어떻게 작업하고 있고,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금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중구난방이다. 이것도 사람의 생각차이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현장에서 발로 뛰는 작가, 기획자, 비평가들은 문예진흥기금의 심사 결과가 이것저것 가려서 가장 무난한 결과를 도출하다 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저 그런 결과를 낳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눈먼 돈이라는 것. ‘재수 좋게 얻어 걸리는 놈이 재주 좋은 놈’이라는 속설이 통하는 판이다. 미술관 현장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로서 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가 “눈먼 돈 눈뜨게 하는” 위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문제의 선결 과제는 심의체계를 가다듬는 일이다.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내용을 심의에 반영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그 중에 구체적인 것 하나만 말하자면 이렇다. 심사위원 구성의 문제다. 현장에 밀착해 있는 작가와 기획자, 비평가의 현장의 매서운 눈매를 통해서 실사구시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교수 일색으로 채워서는 현장의 돌아가는 판을 읽을 수 없다는 지적에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작품을 보지도 않고 작품을 평가하는 관행을 줄여야 한다. 돌아가는 판을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한다는 것,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분권과 자치라는 기조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중앙집중식 기금 분배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작가들의 창작활동 지원을 작가들의 주소지별로 시군구 단위의 지방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지역분산의 묘미를 발휘해야 한다. 이 때 정말 유념할 사항이 있다. 서울을 하나로 묶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이 하나라는 상상을 버려야 한다. 서울은 정말 다르다. 강남이 다르고 강북이 다르다. 노원구와 성북동이 다르고, 마포구와 종로구가 다르다. 이 다름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술문화를 보자면, 어떻게 서울의 미술문화를 인사동과 사간동이라는 종로구에만 집결하고도 문화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철저한 중앙집중식 문화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서울의 문화 중심을 해체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서울의 각 구에는 구민이 살고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들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새로운 창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각 지역마다 적지 않은 규모의 문화인프라가 이미 대부분 구축되어 있다. 이 토양을 살리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영원히 특구 아닌 특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지원 방식에 있어서 선택집중과 소액다건의 정책적인 역할분담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정책적인 지원 방향을 선택하고 집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선호하는 상업주의 문화전략이 침투하여 황폐화할 위기에 놓인 분야, 장기적인 안목에서 꼭 지켜내거나 키워야하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미술은행제도에서도 기존의 상업화랑 시스템이 선호하는 장식성 위주의 컬렉션 가능성이 대두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공공성이란 이럴 때 발휘되는 것이다. 자본이 명령하지 않는 예술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말이다. 당장의 자잘한 먹거리를 나눠주기에 급급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돈 안 되는 예술이라도 우리 사회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예술을 지켜주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정말 필요한 것이 선택과 집중이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이리저리 갈라 쓰는 것보다 선택하고 집중해서 성과 있는 사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앞서 예를 든 작가의 경우처럼 다만 몇백만원이라도 지원받으면 큰 힘이 되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소액다건의 묘미를 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럴 때 지역별로 안배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창작에 매진하는 작가들을 지원하는 균형 감각을 도입한다면 문화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화향수권 확대와 작가지원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상에서 말한 심의체제 개선, 자치와 분권 기조 확립, 선택집중과 소액다건의 역할분담 등 몇 가지 작은 얘기들은 사실은 위원회 전환이라는 큰 틀의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되짚어본다. 어떤 시스템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이 지향하는 바가 진정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문제는 어떻게 합의 하느냐로 소급한다. 깔끔한 민간의 합의를 기대한다.
* <문화예술>지 2005년 2월호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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