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08 : 허민, 조선전통을 이어받은 선비화가
critic & column/부산미술 다시 읽기 | 2008/06/10 13:53

김준기의 부산미술 다시 읽기 8 허민 : 조선전통을 이어받은 선비화가

운전(芸田) 허민은 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비 화가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반듯한 사람이었으며, 작고할 때까지도 화필과 번역원고를 끼고 살았던 예술가이다. 성장기의 그는 당대의 명가를 사사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운전은 이미 유아기부터 한학을 통달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 운전은 전문 화가이면서 동시에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한글로 번역한 학자이기도 했다. 전통회화론이 글과 글씨와 그림을 한 몸으로 보았던 데 비해, 20세기 서구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근대성은 그림을 글과 글씨로부터 분리해냈다. 학문하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이 직업적으로 분리되는 상황. 그것이 근대적 합리성이다. 허민은 20세기 한국사회가 당면한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서 진정한 문인화가의 길을 걸으며 고뇌하고 갈등한 예술가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학문과 예술을 공유한 유기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근대는 그것을 잘게 나누었다. 전문성의 강화에 의한 합목적적이고 체계적인 영역 분할. 그것이 근대가 요청하는 분화(分化)의 길이었다. 우리가 허민의 존재를 깊이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그가 근대문화의 충격 앞에서 전통사회의 격조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놓치지 않은 유기적 지식인이자 창의적인 예술가라는 데 있다. 허민은 시서화 삼절의 전통을 제대로 익힌 선비였던 그는 10대 초반에 사사삼경을 통달한 후에 실학에 관심을 가지고 박지원과 정약용에 빠져들었다. 그는 동의보감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 출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말년에 그는 열하일기 번역에 착수하기도 했다. 직업화가인 그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20세기의 충격 앞에서 우리 사회가 수천년동안 공유해온 회화적 전통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수천년동안 갈고 닦아온 수묵과 채색화의 회화적 전통은 일반명사 도화(圖畵)의 지위를 상실하고 동양화 또는 한국화라는 고유명사로 이름을 바꿔야했다. 19세기까지 그냥 그림이라고 부르던 것을 동양그림 내지는 한국그림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외부의 충격이 강렬했다는 얘기다. 조선사회가 공유하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새로운 충격 앞에서 그 보편성과 특수성의 지위를 바꿔나간 것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의 회화전통 또한 위상의 변화를 감수해야 했다.

박생광과 애호가 최범술이 기록하고 있는 허민은 일제 말기에 민족주의자들의 아지트였던 다솔사(多率寺)에 머물면서 변관식, 성재휴 박생광 등과 어울렸다. 허민이 작고하기 이틀전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박생광은 그를 다대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었던 소회를 밝히며 허민은 ‘너무 총명했기 일찍 갔다’고 말하고 있다. 해방 이전까지 김은호 사단으로 출발해 30대에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던 허민은 그러나 해방 이후 40세 전후의 10년간 침묵했다. 전언으로는 국전 심사위원 물망에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박지원에서 신채호에 이르는 민족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강고한 그의 성품으로 보아 해방 이후 굴절의 역사를 이어온 그 10년동안 그는 주류사회에 끼어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는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서울화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그가 평생 단재 신채호를 흠모하며 살았다는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방공간은 허민의 삶을 힘겹게 했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전라북도 익산에 머물었다. 그가 부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6년의 일이다. 한동안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던 그는 작고하기까지 10여년간 부산화단에서 눈부시게 활동했다. 그는 전통회화의 미덕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자신의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린 ‘달과 나무’, ‘나무’와 같은 그림은 대개 주문에 의해 그리는 신선도의 대가로 잘 알려진 허민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예술적 자율성과 창의력을 획득하고 있다.
10년간 은거하던 허민은 윤재 이규옥과 청초 이석우 등이 활동하고 있던 부산화단에서 청년기에 일궜던 화업을 재창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에 부산에 정착한 이듬해에 부산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고, 이허 1958년에 영도 대교로에 독지가의 후원을 얻어 동명서화원을 열었다. 유화계열의 작품을 하던 김남배가 1959년에 갑자기 김남배 동양화전을 열고 동명서화원전에 출품했던 곳이 바로 동명서화원이다. 백양다방을 경영하면서 부산 근대화단의 네트워커로 활동했던 김남배가 서양화가 딱지를 떼고 허민이 운영하던 공간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열었다는 점은 당시 허민의 영향력을 잘 가늠하게 한다.
허민은 고전과 현대를 동시에 담은 인물이다.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려서 신선도의 대가라는 칭송을 들었다. 신선도는 전통사회의 대표적인 관념적인 회화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그는 문기가 넘쳐흐르는 기명절지의 정물화와 세련된 감각의 화조도 등을 그렸다. 그는 관념회화 뿐만 아니라 진경산수 또한 많이 그렸다.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모습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수준에서 필을 구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0년 작 ‘쥐’나 이듬해에 그린 ‘소’ 등과 같은 작품은 마치 일러스트 카툰 한 컷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예서와 전서, 초서를 넘나든 다양한 서예작품들과 전각 또한 그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허민은 전통회화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창의력을 가지고 전환적 국면을 만들고자 했던 현대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에 그린 ‘산수도’는 기법적인 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열 폭의 그림들 가운데 어떤 부분은 전형적인 북종화 계열의 선묘 중심 회화 양상을 보여준다면, 또 다른 부분은 측필로 눌러 그린 남종화 계열의 미점(米點)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화제를 써내려간 필체 또한 미려하기 그지없다. 마른 붓질로 화면의 골기를 잡아나가는 센 붓질과 짙은 먹으로 수묵의 맛을 제대로 살려나가는 발묵의 묘미를 공유했다. 허민의 화풍이 수묵화의 다양한 미학적 태도와 방법론들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허민은 한국 근대화단의 성립 시기에 지식인으로서의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학파를 비롯한 새로운 교육체계를 거친 주류의 공간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선전을 통해 데뷔했지만, 국전은 달랐다. 그는 1958년에 국전에 참가해 입선 한 후 다시는 국전에 참가하지 않는다. 이후 작고하던 해인 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67년에 건강악화로 작고했다. 1977년에 작고 10주기를 맞아 사위 이재용의 노력으로 발간된 ‘운전허민서화집’은 그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가 서문을 쓰고 이구열, 박생과 등이 회고록을 실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서부터 말년까지의 많은 대표작을 수록하고 있다. 근대적 전형의 전문가 범주를 넘어서는 21세기 통합형 지식인 상을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조선전통의 학문과 예술을 한 몸에 지니고 20세기 한국사회와 대면했던 선비화가 허민이 있다. 새로운 문화사회의 이상을 꿈꾼다면 허민의 그림과 글들을 다시 한 번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허민(許珉 1912-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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