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위계를 넘나드는 아나키스트 펑흥치
critic & column | 2010/04/14 02:19

경계와 위계를 넘나드는 아나키스트 펑흥치
효율적 통치를 위해 등장하는 국가나 아니면 종족 공동체에 근거하는 이른바 민족의 개념이 생활공동체의 유기적인 틀로 순환하지 않고 민족 이데올로기나 국가 이데올로기로 굳어있을 때의 한계 상황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이 처한 국가주의 통제와 훈육의 필요성은 종종 아메라카라는 패권 국가와의 대결국면으로 인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은폐하곤 한다. 그것은 뉴욕의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는 전지구화와 맞물려서 또 다른 중심의 탄생, 또는 중심의 이동으로 읽히는 지역의 블록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이 의제는 오늘날 중국의 팽창과 전지구적 차원의 권력이동의 문제와 관련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출신의 예술가 펑흥치의 시각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대결 너머에 머물고 있다.
펑흥치는 동북아시아의 문제들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와 전지구의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제들을 다룬다. 그는 전쟁, 환경, 종교, 에너지, 제국주의, 국가주의, 자본 등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의 현실비판은 지역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이며, 국가 패권과 개인의 자유의 관계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는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시각은 반자본이나, 반국가주의, 평화와 생태의 관점 등과 같은 몇몇 가지 이념으로 특정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적 관점을 아우르는 사유체계는 인간 존재와 인류 문명 등과 같은 매우 깊은 뿌리로 환원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펑흥치의 관점은 아나키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나키스트의 시각은 사회붕괴의 위기, 전지구적 환경파괴의 위기, 그리고 핵무기와 같은 전쟁폭력 확산의 위기를 현대문명의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진단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체제를 넘어 현대문명의 위계적 권력구조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도자 없이’ 서로 도와서 공존할 수 있는 개인들의 창의적인 연대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의 관점은 여타의 경계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타이완에서 나고 자랐으며, 미국에 유학해서 활동했고, 지금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로서 그는 국가라는 틀 속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사유와 감성이 억압당할 수 있는지를 실존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펑흥치의 성장과 활동 배경은 아나키즘의 가치와 결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의 아나키스트 시각은 국가 단위를 넘어선 규율과 지배에 대한 대안적 성찰이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것은 종종 아나키즘의 진의를 벗어나 국가라는 기구만을 염두에 둔 이념으로 아나키즘의 사유 폭을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나키즘은 폭력기구로서의 국가를 주도하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인류 평화공존의 길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포인트는 국가가 아닌 개인의 창의적인 발상과 실천을 통해서 상호성에 입각해 삶을 꾸리는 일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그 배경으로 하는 펑흥치의 현실비판은 국가주의 비판을 넘어 개인의 자유를 향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그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아나키즘은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나 중국의 노장 사상에서부터 유럽의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지지한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나키즘은 일체의 지배를 부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재발견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사유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구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그것은 문명구조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는 상부구조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이 상황으로부터 탈피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사회를 재구조화 하고자 한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가진 창의적인 개인들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와 국가, 민족, 자본, 정치, 문화 등 이 모든 영역에 걸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한다.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된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은 정치운동과 결합하여 선구적인 자취를 남겼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Koutoku Syusui),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Osugi Sakae), 중국의 리스쩡(李石曾), 스푸(師復), 그리고 한국의 신채호(申采浩, SIN Chae-ho) 같은 선구자들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는 잘못된 번역어 개념을 넘어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 또는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 입장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다. 한 세기의 간극을 넘어 펑흥치라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동아시아 문명권의 국가 패권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아나키즘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를 넘어 전지구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우리시대를 성찰하는 데 있어 매우 유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의 세계는 19세기 유럽에서 본격화한 아나키즘 논의가 20세기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탈제도, 탈가치, 탈권력 등의 문제는 인간 삶에 관한 자유로운 사유와 감성을 토대로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가치를 중요시한 노장사상과 만나기 때문이다.

펑흥치의 비디오 클립 <200년>은 미국 영화 네쉬빌(NASHVILLE)의 사운드트랙 '200 YEARS'를 번안한 노래이다. 아메리카의 건국 초기 200년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노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터를 빼앗은 침략자의 반성적 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작가와 그의 친구 샤우허가 함께 노랫말을 새로 만들고, 그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홍군, 한국전쟁 참전, 기아와 내란, 지진, 홍수, 가뭄 등을 이겨온 고난의 세월이 미래의 영광을 위한 길임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인민을 위해, 당과 조국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여 200년 더 강성하자’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원곡과 마찬가지로 강대국 中華人民共和國이라는 국가 정체성 속에서 일로매진할 것을 촉구한다. 펑흥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가 패권을 강화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담긴 메시지는 여러 작품들의 문맥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 작가를 통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0년>의 내러티브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게 하는 것은 그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 작품과 함께 놓인 다른 작품들과의 문맥 때문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펑흥치의 국가주의 비판은 다국적 자본의 문제로 이어진다. <煤炭做的悍馬>(Hummer Made of Coal)는 이라크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의 군사용 다목적 다기능 차량인 험비(Humvee)를 응용한 트럭으로써 중국의 중공업회사인 쓰촨텅중(四川騰中)에 매각 합의했다가 스캔들이 일기도 한 브랜드이다. 펑흥치는 중국의 주요 에너지인 석탄으로 미국이 주도한 오일 전쟁의 상징인 이 차량을 만듦으로써 국가 사이를 넘나드는 에너지 문제의 실상을 풍자하고 있다. 생태자연을 거스르는 인류문명의 거래가 국경과 이념을 넘나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주의 차원을 넘어 다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임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전쟁 폭력의 문제들을 다루는 펑흥치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을 두루 꿰뚫는다. 그는 조각상의 특정 부분을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치환의 방식으로 충격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皆因南京大屠殺而死>(Both Died of the Nanjing Massacre)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시기의 수상을 지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얼굴을 난징 대학살의 여성 신체와 결합하여 잔인한 제국주의 폭력을 비판하고 있다. 의자에 손발이 묶인 채 둔부를 드러낸 여성의 누드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의 얼굴로 치환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DU-Baby>는 걸프전에서 사용된 열화우라늄탄의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은 기형아를 대중적인 캐릭터와 종교적 도상에 덧씌운 작품이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신의 아들 너짜(nezha)와 불교 조각인 반가사유상의 심하게 일그러진 두상을 통해서 2차 피해까지 유발하는 살상무기의 위험성을 비판한다.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문명으로 치닫는 당대 사회에 있어 종교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제이다. <Farfur, the Martyr>는 치환의 방식으로 성속(聖俗)의 문제를 다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신체에 얼굴을 미키 마우스 얼굴로 전치한 이 조각은 성스러운 희생과 전지구적인 차원의 문화제국주의를 한 몸으로 만듦으로써 여기에서 발생하는 역설을 이용해 종교와 대중문화, 성스러움과 세속의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God Pound>는 도교의 조각신상 수백 개를 바닥에 설치함으로써 개인들의 사소한 기복을 위해 소비되는 신앙의 대상들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복신앙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開光後的耶像-1>(Jesus in Jesus-1)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도상을 뒤섞음으로써 인간이 가진 욕망의 유사성이 종교에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落難神明像("Misfortune God)>은 버려진 (로또 당첨 기원용) 신상들을 이용한 사진 작업이다.

그는 인간 존재와 가장 밀접한 동물인 개를 등장시켜 인간 존재를 은유한다. 10개의 비디오 클립으로 이뤄진 <犬僧>(Canine Monk)은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개별적으로 선보였던 작품을 모은 것이다. 텍스트 위에 개 사료를 입혀서 개가 핥아먹게 한 후 이것을 리와인드(rewind)해서 마치 개가 혀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업이다. 펑흥치는 동서고금의 다국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개를 개입시켜 개가 쓰는 글을 주의깊게 관찰하게 만든다. 2006년 작 비디오 작업인 <道教符籙選<(Excerpts from the Taoist Protective Talisman) 역시 개가 쓰는 글씨이다. 개가 쓰는 도교 부적 텍스트의 유머와 시니시즘은 펑흥치 작업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2002년 작 <小丹尼- 奧地利製造 >(Little Danny)는 300개의 개인형으로 만든 설치 작품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체의 가능성을 상실해가는 인간 존재의 메커니즘을 성찰하는 작품이다.
펑흥치의 작품에서 아나키스트의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가 사회과학자의 시각으로 구조를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생활인의 자세로 일상을 들여다보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폭력에 노출된 나약한 개인의 상처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구조와 개인의 상호관계를 성찰할 수 있다. 폭력에 노출된 인간은 국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체제의 구조를 위로부터의 위계적 조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하는 구조로 파악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상호’라는 개념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개별적 주체들이 서로 공존하고 동행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한 배려와 성찰을 담고 있다. 그것은 국가체제 속의 국민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사회 속에서 개인을 발견하는 일이다. 진정한 아나키즘은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을 들여다보는 일과 생활세계에서 개인을 발견하는 일을 병행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와 시민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연구자나 예술가가 들여다보는 사회와 일상에 비해서 시민 자신들이 스스로 성찰하고 사유하는 생황세계 사이에는 모종의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예술가 주체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표출하는 데 의미를 두는 존재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아나키스트이다. 예술가는 우리사회의 현실에 관한 새로운 성찰과 사유를 생산하는 지식인이다. 아나키스트의 태도를 가진 펑흥치의 작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술적 소통은 당대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패권주의의 위기에 처한 동북아시아와 전지구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제시하는 펑흥치의 지식생산을 각별히 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준기(金俊起, GIM Jun-gi,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