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추억을 그리다 : 최민화 개인전 리뷰

critic & column | 2007/06/25 22:23


거리의 추억을 그리다

6월 항쟁 20주년 기념 최민화 회화전, 2007.6.7-2007.6.24, 문화일보갤러리

1987년 6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의 선두에 대형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를 그려 앞세우게 한 화가가 있다. 노숙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기 이전에 <부랑아> 연작 그렸으며, 기타를 튕기며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70년대식 캐릭터를 등장시킨 분홍 연작을 그린 화가. 몇 년 전에는 영화 포스터 위에다가 고대설화나 역사적 서사를 그려내기도 했던 화가 최민화다. 빠르고 얇은 붓질로회화의 맛을 제대로 살리는 그는 늘 그리다 만듯한 그림으로 ‘아, 내가 바라보고 있는이 화면은 사진이 아니고 그림이구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만들어주는 화가이다. 중국현대미술 작가들이 차이나 아방가르드라는 이름 아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미혹하기 훨씬 이전에 최민화는 저 날렵한 붓으로 분홍 연작을 그려내고 있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이름을 민화(民花)로 바꾼 화가 최민화가 20년의 세월동안 그린 1980년대 거리의 기억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전시가 열렸다. 50여점의 회화작품을 출품하는 이 전시는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서 열린 전시다. 모두들 시장가능성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이 시대에 화가 자신이 혼자서 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기념전을 연다는 사실만 봐도 이 예술가가 80년대 거리에 대한 기억을 얼마나 열렬하게 간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분홍전사>나 <고문> 등의 작품은 이번 전시 출품작들 가운데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작들이다. 대체로 최근의 얇은 그림들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의 표현적인 붓질로 단숨에 처리한 그림들이다.<삼민투> 등과 같은 80년대 후반에 그린 작품들은 잡지의 보도자신 위에 그대로 그림을 그려넣은 것들이다. 이래저래 분주했던80년대에 '사진을 재현해서 그리는 그림이라면 인쇄된 사진 위에 그린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뭐 있겠냐'는 생각에서 그렸다는 작가의 말을 새겨보면 사진과 회화의 위치나 느낌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출품작들은 대부분 가두투쟁의 장면들을 그려내고 있다. 소파에 눕듯 거리에 누워 군화발에 짓밟히며 끌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파쇼에 누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1989년에 그린 <쏘지마라>라는 작품은 한 인물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웃통을 벗고 앞으로달려나오는 유명한 사진 위에 그린 그림이다. 얇고 맑게 그리는 90년대 그림들과 대비되는 이 그름은 굵은 붓질로 툭툭 쳐서 그린 것이 사뭇 흥미롭다. 80년대 거리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장면들. 출품작들은 사진이 포착한 인물과 사건들을 재구성해서 그린 다큐멘터리 그림들로서 사실적인 재현과 초현실적인 재구성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림들이다. 87년 6월의 민주화 투쟁과 그 직후의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통일을 외쳤던 학생운동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켜보았던 역사들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다. 분홍의 깃발을 펼쳐든 사람들의 표정에서 아스라이 거리의 추억이 맴돈다.

최민화는 그림 그리기 자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50대 중진작가이다. 만약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회화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가치를 토해내는 화가주체로서의 삶에 완벽하게 젖어있는 작가이다. 그러한 화가 최민화가 이번 전시를 연 것은 20년간 벗어날 수 없었던 80년대를 그려내는 기념비적인 회화 작품에 대한 강박을 풀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나의 추측이 아니라 그의 고백이다. 이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고백한다. 80년대를 그려냈어야만 했다고 말이다. 전시서문을 쓴 이재현이 예술적 강박신경증 또는 울혈증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지점은 한 예술가에게 각인된 시대정신 또는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술적 표현의 저변에서 일렁거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회화의 효용성을 다시 생각한다. 지식으로서의 회화, 시대와 동행하는 회화, 나아가 시대가 상실한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회화.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전방위의 스펙타클한 재현시스템 속에서도 회화를 놓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최민화의 그림을 통해서 새삼 그림 그리기란 지식생산의 한 유형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그림이 온전히 몸으로 하는 예술로 성립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이미 대중적 소통체제로서는 종언을 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민화와 같은 화가 정체성을 가진 예술가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은 몸과 회화의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화가는 손으로 세상을 만나고 손으로 세상을 읽는다. 그 부지런한 손으로, 몸으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어쩌면 최민화에게 있어 모더니즘 예술 이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 그 너머 새로운 미술을 꿈꾸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근대적 예술가 주체로 우리 곁에 우뚝/우두커니 서 있다.

김준기 (미술비평, www.gimjungi.net)

* 아트인컬쳐 기고문

2007/06/25 22:23 2007/06/2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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