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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서사의 교차 혹은 공유, 시각서사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3/25 08:45


시각과 서사의 교차 혹은 공유, 시각서사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영화와 미술을 소재로 한 이번 전시 <시각서사>는 현대 시각예술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서사성의 문제를 영화예술의 관점에 견주어 살펴보는 미술작품 전시이다. 20세기 초중반의 시각예술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20세기 후반 이후의 시각예술은 무언가 보여주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고 있다. 요컨대 시각성 일변도에서 시각성과 서사성을 함께 가져가려는 쪽으로 시각예술의 의미와 범주를 넓혀온 것이다.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시각적 요소와 ‘보는 이야기’라는 서사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종합예술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들의 연속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술인 것이다.
미술과 영화는 ‘시각 이미지를 보여 준다’는 것과 ‘서사적 이야기 구조를 배치하고, 배열한다’는 점에서 시각성과 서사성을 각자의 본령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듣고 이야기를 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양자의 관계는 적극적인 교차 혹은 공유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탈현대의 시각예술이 시각성에다가 서사성을 입히는 쪽으로 변모해온 바, 이 전시가 주목하고 있는 시각과 서사의 문제는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성을 강조하는 시각예술 작품들이 서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야말로 광범위하게 종합적인 예술장르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서사적 구조에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는 예술장르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예술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무언가 보여주는 것을 동시에 구사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서사적인 시각이미지를 그 결과물로 남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사성을 강조하는 시각예술은 (그림을 움직여서) ‘이야기를 보여 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0인의 출품 작가들은 설치, 영상, 회화, 입체 등 시각예술의 각 영역에서 영화예술과 접점을 형상할 수 있는 서사와 시각의 문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왔다. 이들의 작품은 편집의 미학, 서사의 접점, 시각의 공유라는 세 가지 요소에 따라 각각의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잘라 붙인 그림들 : 편집의 미학
영화와 시각예술의 상호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편집의 미학이다. 제작과정의 규모를 놓고 생각해보면, 영화는 감독, 배우, 연출자, 촬영감독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만들어 내는 프레임들을 모아 하나의 필름으로 만들어낸다. 반면에 시각예술은 철저한 개인의 자신에 대한 고뇌와 사투,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어나는 크고 작은 담론들을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어 낸다. 양자 모두 의미 전달을 위해 ‘편집’이라는 특정한 절차를 거친다. 영화에 있어서 ‘편집’은 서사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이며, 동시에 작품의 내용을 좌우하는 요소이다. 영화의 편집자가 펼치는 편집의 묘미를 시각예술이라는 영역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미지들에 관계성을 부여하는 작가들의 손길이다. 그것이 평면회화이든, 영상작품이든 간에 영화의 편집자와 예술가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쉽게 놓쳐버릴 수 있는 모습들을 자르고, 붙이고, 재구성하여 의미를 강조하거나 때론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김범수의 작품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한 컷 한 컷의 그림이 이어져있는 서사의 담지체로서의 극장 상영용 영화필름을 시각적인 효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색이나 면의 요소로 환원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김범수의 관심사는 서사를 시각으로 환원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가 고정된 화면으로서의 한 컷의 장면을 이어 붙여서 동영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영화필름의 근본적인 물질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시각과 서사가 편집의 미학에 의해 상화 교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러한 필름 작업은 앞으로 서사를 시각으로 환원한 것에서 다시 영화필름이라는 물질이 담고 있는 서사의 담지체로서의 특성을 살려서 그 물질의 서사성을 드러내는 쪽으로도 변모할 것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강홍구의 작업은 대중문화로서의 영화를 끌어들인 이미지 조작 작업의 90년대 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 영화 세트장을 담은 사진 작업으로도 이어지는데, 워낙 영화 자체에 관해 방대한 정보를 가진 작가라는 점, 나아가 허구와 실재 사이에서 서있는 예술가의 지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맥락을 관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의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1996년이라는 제작년도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읽어내야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명장면을 스틸 컷으로 끄집어내서 거기에 주인공의 얼굴을 작가의 얼굴로 바꿔치기한 후 출력해낸 작업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패러디 작업이 예술가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많은 대중들이 인터넷상에서 유포하는 패러디 작업의 원조인 셈이다.
이중재의 편집 작업은 또 다른 차원의 영상제작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영상, 설치, 웹미디어 등 뉴미디어 아트의 다양한 방법들을 갈파해온 작가로서 그의 실험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이렇듯 기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에서도 기발한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다. 기성의 고정된 이미지를 재편집함으로써 다른 문맥을 만들어내는 편집 작업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수많은 영화들의 장면을 따다가 재편집함으로써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와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소기의 목적에 부합하는 내러티브에 맞도록 재구성했다. 이중재의 영상은 스크린 쿼터 폐지를 반대하는 집회 장소에서 상영했던 프로파간다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작업이다.

그림을 듣다 : 시각 혹은 시각성
시각예술이 다루고자 하는 보여준다는 것의 의미를 영화예술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온 것이 실험영화의 역사이다. 초기의 실험영화들이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들에 의해 많이 제작되었던 점에서 그렇다. 오늘날은 영화의 이미지들을 현대미술의 소재나 주제로 끌어 쓰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점에서 시각예술과 영화예술의 시각성 공유 개념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두 영역이 서로간의 미래상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양자의 교차점을 확인해보는 작업이었다. 나아가 미술과 영화의 역사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이며,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린 ‘시각’ 예술로서의 공통점을 가진 예술이라는 점을 확인해보는 자리라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박태규는 극장영화의 간판을 전시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작가이다. 그 자신이 극장간판을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자신의 작업 자체를 극장간판의 요소들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표정이나 동세들을 포착해서 영화의 내러티브 전체를 끌어내는 하나의 고정된 화면으로서의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기성 영화의 서사를 간판 그림에 압축해서 전달하는 작업을 서서히 스스로 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회화작업과 서로 주고 받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광주천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그 영상을 선전하는 간판 그림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광호의 사진, 그림, 영상 버전을 동시에 보여주는 태몽 장면 혹은 사건은 회화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는 태몽을 꾸는 어머니를 연출사진으로 뽑아내고 이것을 토대로 정교한 회화작품을 만들어낸 후 그림 앞에 선풍기를 놓고 카메라를 돌려서 동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손으로 그려낸 고정된 화면으로서의 회화작품과 카메라 렌즈를 통해 실체를 재현하는 사진과 동영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교한 게임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연출은 회화의 특성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동원된 것인데, 확연하게 다른 매체적 특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대 예술이 채택하고 있는 매체구분의 파괴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어서 차분하게 읽을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박화영은 꿈에서 나타난 뒤죽박죽의 이야기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영상작품을 통해서 서사의 시각화가 작가 주체의 의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각예술가가 만들어내는 내러티브가 문학이나 영화의 일반적인 내러티브와 차별성을 확보해나가는 방법이랄지, 전일적인 구성체로 존재하는 듯한 대상들이 파편화하고 분열하는 장면을 통해서 시각 혹은 시각성이 가지는 조작과 은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영상 실험들은 긴 시간의 작업과 꼼꼼하게 앞뒤를 가려야 하는 구성능력을 바탕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영상 작업의 밀도를 따져보기는 데 있어 매우 모범적인 작업으로 보인다.

이야기를 보다 : 서사 혹은 서사성
영화가 내러티브 구조에서 출발하고, 시각예술이 시각효과를 강조한다는 이분법적 견해를 넘어서 두 장르의 예술은 서사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영화와 미술은 각각 시각성과 서사성을 향해 새로운 실험을 이어왔다. 특히 현대미술에 있어서 서사의 회복이라는 부분은 포스트모던한 미술지형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 미술이 시각성으로의 환원적 태도를 보여왔다면, 그 이후의 미술은 서서성으로의 확산적 태도를 보여왔다는 것이다. 따사서 현대미술 속에서 서사의 요소를 읽어내는 것은 작품을 읽어내는 것과 거의 등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와 미술 양자 모두는 내용과 표현 형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서사의 접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예술은 영화의 서사구조를 강조하거나 무너뜨리면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처럼 사전에 구성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성과는 다른 차원의 감성적인 코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김창겸은 회화와 입체와 영상 작업을 통해서 실재하는 물질로 존재하는 재현적 시각이미지와 비물질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시각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자화상 위에 빛의 요소인 슬라이트 프로젝션 이미지의 마오쩌뚱을 투사해 물질과 빛의 두 가지 이미지를 비교해서 보여주거나 석고로 만든 이미지 위에 동영상을 투사해서 물질과 비 물질, 공간을 점유한 오브제와 시간성에 의해 구현되는 동영상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김창겸에게 있어 물질과 비물질, 실재와 비실재의 문제는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작들에 보여준 미술의 본질이나 내부를 지향했던 서사구조에서 사회와 역사,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구조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박경주는 외국인 노동자가 지자체 선거 후보로 등장하는 가상의 선거유세 퍼포먼스를 하고 그것을 다큐멘터리 동영상으로 담아 전시장에서 상영/전시함으로써 예술가의 내러티브가 시각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미디어의 특성을 활용하는 매체미학의 독특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말해서 매체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기법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논점을 형성하지만,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나아가서 그 매체 활용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매우 큰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경주의 매체활용은 아티스트(artist)와 액티비스트(activist)의 지위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독창적인 것이다.
박혜성은 앵그르의 명품회화 <샘>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보여준다. 고정된 화면 위에 존재하는 회화적 내러티브를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동영상의 영화적 내러티브로 전환함으로써 시각예술에 있어서 서사 혹은 서사구조의 존재방식을 탐색하고 있다. 그가 회화의 내러티브를 동영상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다른 비디오 클립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때 작가의 이야기 구성 능력뿐만 아니라 스스로 세트와 소품을 다루고 이미지 조작을 가할 수 있는 미술가로서의 능력은 그의 영상작업을 회화 작업이나 영화 예술과는 다른 독창적인 시각예술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김세진은 90년대 후반의 초기작 이래로 영상작가로서의 실험을 지속해왔는데, 최근에는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통해서 미술가로서의 영역을 보다 넓게 확장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뚜렷한 차별성은 서사적인 요소를 보다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번 전시의 출품작에서는 드라마의 장면들이 조악한 세트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드라마 세트 촬영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한 장의 세트 사진으로 장소를 설정하고 그 앞에서 인물들이 연출된 대사와 동작들을 보여줌으로써 극적인 사건의 전개를 이끌어나가는 드라마의 통속적인 이야기전달 방식을 멀찍이 물러선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와 미술의 교차를 통해서 시각과 서사의 관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이 전시 <시각서사>는 10인 작가의 여러 매체 작품들을 통해서 현대미술이 담고 있는 서사의 회복 현상을 간접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20세기 시각예술이 모더니티 기재의 발현과정에 편승해서 서사구조를 배제하려는 일련의 시각성의 본질 탐색으로 내달음질 했던 것에 비해 탈근대적 시각의 미술이 이야기구조를 끌어들이는 과정을 영화라는 종합예술 영역과 비교 검토해본 것이었다. 여기 10인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미술 작가들과 미술 분야 평론가 그리고 영화 관련 종사자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눈 결과물들을 통해서 탈근대적 시각예술 지형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 자그마한 실마리 하나를 잡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5/03/25 08:45 2005/03/25 08:45

뮤지움토크 3 녹취록 : 김범수, 이광호 + 이건수, 장윤현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2/24 15:43


김준기 : 오늘 두 분 작가 그리고 두 분 초청패널을 모시고 뮤지움 토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작가들끼리의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여기 세분이 오셨기 때문에 좀 달라지겠습니다. 먼저 김범수 작가님이시고요. 이광호 작가님, 그 다음에 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님, 장윤현 감독님 오셨습니다. 그러면 먼저 작품 보여주시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범수 : 저는 김범수라고 합니다. 오늘 보여드릴 제 작품은 최근의 작업으로 시작해서 7~8년 전의 작품까지 보여드릴 건데요. 제가 여러 가지 슬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건 한 작가가 하나의 오브제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변화되고 진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밑에 있는 작품은 원래 2003년도에 헤이리 페스티벌에 냈던 작품인데요. 작품이 놓일 장소가 원래 황인용 씨의 음악실이었거든요. 음악실의 이름이 카메라타였는데, 제 작품이 공간의 개념을 많이 이용하는데요. 그래서 그 음악실에 맞는 게 어떤 것이 있을까 해서 패턴중심의 파장의 효과, 음의 확장이라고 할까요. 그런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구성이 들어갔습니다. 정면이고요. 이런 어떤 패턴화 되어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는 확장이라는 의미하고 연관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낱개의 패턴이 여러 개의 전체의 패턴하고 합성되면서 전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의미로부터 시작된 것이죠. 나중에 질문을 주시면 받겠습니다.
이건 드로잉 처음 시작했을 때 했던 거고요. 이 작품 역시 헤이리 페스티벌에 냈던 작품인데요. 이 작품 제목은 큐브라고 정했거든요. 이 디자인은 건축하시는 김기환 선생님이 해주신 것이고요. 가로 세로 공간의 크기가 3m, 3m여서 작은 우주공간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들어갔던 것인데요. 이 안에 들어가서 하늘을 바라보면 별을 볼 수 있고요. 제 작품과 자연이 동화되는 영역을 확장해보고 싶어서 이런 형식을 시도해봤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패턴화 시키는 앞의 파장의 작품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작품이 공간위주로 설정되었다면 이건 작은 45cm의 공간 안에서 패턴화 시키는 구상인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저게 패턴화 되면서 서로가 상반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런 패턴위주로 두 종류의 작업을 제가 하고 있어요.
이런 패턴화 된 과정이 예를 들면,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우리가 이런 문양들을 흔히 우리 주위에서 봤을 수도 있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단청의 문양이라든가 격자문양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과 비슷한 내 몸에 배여 있는 문양위주로 문양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2002년도 작품인데요. 지금 시립미술관에 있는 작품이고요. 2002년 미디어시티에 참가하게 되어 가지고. 저 작품이 저기 없었을 때는 그냥 유리였는데 그 공간을 개인적으로 살려보고 싶은 생각에 안 쪽에 필름을 해서 붙인 것이죠. 안에서 조명을 만들어서 유리 밖으로 보이게 구성을 한 것인데요. 현재 시립미술관에 상설로 되어 있고요. 하나의 문제가 뭐냐면 안쪽이 모래 샌딩이 되어 있어서 웬만한 접착제로 붙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아픈데 조금 떠 있는 상태입니다. 처음엔 저걸 할 때는 영구적으로 저기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3개월 정도의 기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서 제가 보기에 지금 흉할 정도로 지금 떠 있는데 조만간에 가서 보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시립미술관에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 사이즈가 가로 9m 60cm에 높이가 7m 90cm로 알고 있는데. 이건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첫 개인전으로 2001년도 사간갤러리에서 한 것인데요. 한 6개월 제작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구조적인 작품을 시작한 것입니다.

김준기 : 안에는 아크릴구조물로 되어 있나요?

김범수 : 네, 안에는 아크릴로 일일이 구조물을 만들어서 제작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름에 아크릴을 붙이지 않아서 저 상태는 그냥 필름상태입니다. 이것을 그때 당시작업을 찍은 것입니다. 이건 제가 아까 보여드렸던 콜로세움의 작업과정을 찍은 것인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만든 것을 세 피스를 엮어서 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저의 작업 베이스는 조각이기 때문에, 겉 모형을 만들어서 반대로 띄어내면 아까 그 흰 태가 남죠. 그 세 개를 이어 붙여서 하나의 콜로세움을 만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2002년도에 한국에 와서의 작업이고 이 작품이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처음에 필름을 만나면서 작업했던 결과를 전시했던 작품이에요. 이 때는 설치개념위주로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가볍게. 저것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인 작업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전시장에 설치를 했어요. 이것은 아까의 디테일이고요. 이쪽이 벽이고 왼쪽부분이 작품이 되겠죠. 이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졸업전으로 오픈스튜디오를 한 것이고요. 저기 보면 필름에 스카치테이프 붙인 자리가 있는데, 이 작품을 벽면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그것을 띄어내서 만들어진 작업입니다. 이것은 뉴욕에서 전시했던 작업이고요.
저 형태가 필름을 펼쳐놓으면 저렇게 곡면으로 변화가 되요. 그 형태가 재미있고 천장에 상승되는 효과, 벽면에 그림자가 형성되는 이미지도 흥미로웠어요. 이것 역시 하나하나 다섯 개를 만들어서 가로세로 180cm정도의 입체적인 회화작품 형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필름의 그림자가 천장에 비춰져서 드라마틱한 효과를 만들어내죠. 이것도 97년도 작품인데요. 오픈 스튜디오 할 때 두개의 화면으로 스크린을 만든다고 생각을 하고 제작을 했던 것이에요.

김준기 : 이건 지금 필름을 어떻게 이용한거죠? 부착을 한 것입니까?

김범수 : 그냥 필름만 부착을 해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거죠. 제가 초창기에 제작한 것입니다.

김준기 : 그럼, 보관상태는 굉장히 안 좋겠네요.

김범수 : 근데 지금도 괜찮아요. 접착력이 좋더라고요. 이건 아까 했던 것을 한국에 들고 와서 개인전을 한 것이고요. 이건 초창기에 스튜디오에서 설치한거고, 지금 보시는 작품이 처음에 영화필름을 만나면서 만들었던 작업입니다. 지금의 이런 형식과 비슷한데요. 이것 역시 필름하고 스카치테이프만 붙인 것이겠죠. 그 전에는 몰랐다가 이 전에 보여줬던 작업에서 빛을 받으면서 그림자가 형성되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까지 보여줬던 작업들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제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스튜디오필름을 펼쳐놓기만 했었는데 조금 전에 보여드린 형태를 처음 만들었을 때, 그것이 우연히 아침에 작업실에 가보니 태양광선에 그림자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조명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런 부분이 재미있어서 계속 만든 거죠. 처음엔 그냥 걸어놨다가 입체도 만들고, 그러면서 제가 원하는 형태가 나오기 시작한거죠. 그러면서 큰 회화작품으로도 발전이 되고요 그림자도 강해지고요. 그러다가 똑같은 형식을 입체설치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다양한 형태의 구성이라고 할까요. 조명을 좀더 명확하게 하거나. 그 다음에 시간이 걸리지만 진화가 되면서 곡선을 만들게 되면서 복잡한 드로잉식의 형태가 나오게 되죠. 전체적으로 조명을 쓰면서요. 이러한 부분들이 재미있어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이에요. 뉴욕에서는 시간하고 장소, 경제적인 면 등 여러 가지가 안 되서 아크릴을 사용 못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한국에 와서 큰맘 먹고 아크릴을 사용하게 된 거죠. 제가 원하는 형태의 거대함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이때부터 시작을 한 것이죠. 밑에서 천장으로 조명을 사용해서 지금 여기선 잘 안 보이는데 형태 색감 그런 전체적인 아우라를 형성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드로잉도 좀 여기에 맞는 그런 식으로 좀 더 구체화된 형식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초창기 작품에서 좀더 디자인화, 패턴화된 양식을 만들어간 거죠.

김준기 : 이상 김범수 선생님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초청패널의 총괄말씀은 이광호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함께 얘기해보겠습니다. 다음은 이광호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이광호 : 안녕하세요, 이광호입니다. 지금까지 제 작품들의 특징들을 정리해보면, 시기에 따라 또는 대상의 변화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96년 첫 개인전부터 99년 ‘삼인전 ’시기에는 주로 시선의 문제에 주목을 했고, 결혼 이후에 저의 개인사를 고백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리고 2002년 ‘이중간첩’전을 통해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시선을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합니다. 첫째로는 제가 시선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요, 인간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봄과 보여짐의 관계입니다. 저는 오fot동안 짝사랑만을 해 와서 어떤 사람을 자신 있게 마주 본다는 것은 한때 저의 간절한 소망이었고, 이것은 그림을 그리게 한 동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림 상에서의 시선의 문제입니다. 제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대상들은 서술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고, 관객의 시선을 이동하게 함으로써 서술성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그림과 관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선의 상호작용입니다. 관객은 그림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림을 보는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봄과 보여짐의 복합적인 시각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림을 통해 구체적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림에 대한 착상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스케치북에 끄적이는 과정에서 떠올랐습니다. 혼자 있다는 외로움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부재의 대상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그래서 이 여인을 탁자 위에 있는 이 사진에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두 컵의 손잡이를 나와 그녀의 위치에서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컵들 사이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사랑이라는 글씨가 가려진 것은 그 글씨를 보여주고 싶다는 저 내면의 희망을 역설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하는 방식입니다. 내면의 고백을 직접 말로 한다는 것이 저의 성격상 어려운 일이어서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그림이 언어적이고 서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이러한 '자기고백적 성향' 에서 기인하는 것이 크고 또한 저의 언어적 콤플렉스를 그림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철심과 오른손은 드로잉을 캔버스에 옮기면서 등장한 것이고, 그림 전체를 마치 화면 속의 스케치북처럼 설정하는 증거가 되고, 화면 밖에는 실제로 저의 오른손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고백의 대상은 이 여인에게서 나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기를 계속해서 객관화하는 것이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의 특성은 시선의 존재에 대한 설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그림 앞에서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나를 상정하고, 이 나를 그림 뒤에서 훔쳐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상단의 카메라의 시선은 이런 나를 향한 것 같다고 느낍니다. 저는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자 피하듯이 시선을 이동하게 되는데, 화면을 거슬러 올라가 한 쌍의 인물에게로 향하면서, 연인처럼 보이는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불륜의 관계일 것이라는 불온한 상상을 해봅니다. 이것은 물론 저의 심리가 만들어 내는 개인적인 해석이므로 일반관객은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 카메라의 시선은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타자의 응시로서 작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욕망의 눈'과 이에 대응하는 '타자의 감시'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더 진전되면서, 내 시선과 욕망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카메라의 눈은 '타자의 눈'이 아니라, 바로 나를 관찰하는 자로서의 '또 다른 나의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 뒤에 존재할 것 같은 그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원 그림에 구멍을 뚫고 앞의 상황을 응시하는 이 남자의 뒷모습은 바로 '제 자신'입니다. 이것은 두 작품을 그림의 앞, 뒷면으로 가정하는 방식인데, 이 경우 두 그림은 시선이 존재하는 상황을 두 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되며, 봄과 보여짐의 개념이 드러나는 상황을 재현한 것이 됩니다.
작품의 제목 '3초'는 그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대충 보는 관객을 의미합니다. 등장인물들은 개인전에 오셨던 분들로 저의 은사님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은사님 중의 한 분은 '그림은 3초면 다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림을 너무 평가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가하는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럴 경우 그림은 우리의 삶과는 별 상관없는 감상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림을 본다는 것은 관객 자신의 기억과 경험, 지식, 의미 같은 것들을 주체적으로 그림에 투사하는 행위이고, 그럼으로 해서 관객과 그림 더 나아가 관객과 화가가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대화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3초라는 말에는 이렇게 서로 이해하려는 관용의 태도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림보기가 진정한 대화의 장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삼인이 모여서 삼년간 다른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했는데, 97년 ‘Inter-View’, 98년 ‘회화술’, 99년 ‘그리기/ 그림’ 전시입니다. 시선의 체계와 그것의 해석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주제로 한 전시가 ‘Inter-View’전시고, ‘회화술’전에서는 관찰, 묘사, 재현의 방식에 대한 삼인의 태도와 실천에 관한 고찰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기/그림’전에서는 삼년간의 결과물들을 정리하면서 각자의 발전가능성을 점검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그림은 친구와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렸습니다. 그림을 서술해보겠습니다. 리히터의 그림에서 인용한 촛불의 방향과 그 빛이 퍼지는 모습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책상 위의 물건들은 친구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라이터와 담배꽁초가 배열된 모습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리 정돈하는 친구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또한 문학 평론집과 국어사전은 언어적으로 정확하려는 그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 단어들은 그날 밤 그가 밤새 생각했을지도 모를 어머니에 대한 단상입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제 의도에 의해 상황을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자의 관계와 대조되게 저는 꾸부정한 자세로 혼자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작업을 할 당시에는 조형적 구성의 이유 때문이거나, 실재의 경험에 비추어 대수롭지 않게 그린 겁니다. 그리고 저의 직접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그려진 것들의 의미는 때로 관객에 의해 그 감춰진 속뜻이 해석되기도 합니다. 어느 관객은 이러한 모습을 친구에게 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의지하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또한 잠자는 포즈를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보면 저의 언어적 콤플렉스 같은 심리적인 고충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 그림은 의도된 상징과 의도되지 않은 무의식적 상징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의 포즈에서도 느껴지듯이 저와 모델의 관계는 친형제 이상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제가 이 형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삶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무기둥에 걸려 있는 여러 가지 도구들은 실제로 물건 모으기를 좋아하는 형의 취향이자, 삶을 꾸려나가는 방법에 대한 저 나름의 존경의 표현입니다.
다음 작품은 작업실 벽에 그림이 놓여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의 작품들에서 보셨듯이 저는 생활 속에서 경험한 개인적인 체험을 작업의 출발점이자 그림의 소재로 삼습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제 경험을 타자의 입장으로 대상화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려는 것이고, 그림을 삶과 밀착시킴으로써 저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난 몇 년 동안 저와 가족의 삶을 소재로 하였던 작품들을 시기 순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결혼하기 이전의 그림에서 제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은폐적이고 훔쳐보기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처럼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을 그린 적이 없었습니다. 손을 맞잡고 서로 마주보는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제가 오랫동안 짝사랑만을 해오다가 비로소 제 아내와 마주보게 된 온전한 사랑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보는 동시에 보여 지는 이중적인 시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여 진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존재감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장치했습니다. 아내의 손을 맞잡은 채, 제 왼손에는 손거울이 들려있고 제 등 뒤로 사각거울이 이젤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림은 제가 손거울을 통해 바라 본 풍경의 일부분을 확대해서 재현한 것입니다. 만약 관객이 책과 포스터 글씨의 좌우 뒤바뀜을 단서로 추측한다면 그림이 그려진 실제 상황을 상상하면서 손거울 안의 남자의 시선으로써 그림을 감상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하고 낯선 시선의 움직임을 연상시킵니다.
아내의 손에 저의 손을 살며시 얹고 있는 모습은 마주봄을 통한 교감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아내와 태국에 여행 갔을 때 한 호텔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렸고 마주봄의 상황을 극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관객은 방 안의 이색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병실에서 영혼이 바라보는 풍경 같다고 얘기한 이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제 그림에 대한 오해가 그림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원래 저희 부부는 아기를 가지기 힘든 사정이 있었는데, 이 당시 의사로부터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다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그림이 떠올랐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다른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고귀한 성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95년도에 이태리 여행을 했었고, 그때 안젤리코의 벽화를 직접 보면서 커다란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아기를 바라는 저의 간절한 바람에 이 그림이 떠올랐고 그림 상의 이오니아식 건축공간과 몇몇 상징물들을 자연스럽게 제 그림에 인용했습니다.
그림에서 아내는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작품을 보고 있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이 비둘기조각은 아내를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아내에게 곧 기쁜 일이 있을 거라는 저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왼쪽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제 조카가 천사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반면에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저 은밀해 보이는 공간은 낯선 여자가 제 머리를 만질 때 느껴지는 야릇한 상상을 암시합니다. 여기 이 헝클어진 잡풀은 이러한 저의 복잡한 심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망대로 아내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배가 어느 정도 불렀을 무렵의 모습입니다. 아내와 배속의 아가가 함께 제 그림을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가장 행복한 마주봄의 순간이자 그림과 삶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기에 제가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이 됩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온 바로 직후의 모습은 저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지금도 작업실에는 이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좀 전에 보신 <머리 깎기>의 연작으로서 그 이후의 변화된 현실상황을 이전 그림에 대신 넣었습니다.
그럼,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태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님이 아기의 태몽을 대신 꿔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당시에 어머님의 몸이 안 좋으셔서 빨리 쾌차하시라는 기원의 심정으로 그렸습니다. 호박 꿈을 꾸셨다고 하시기에 아버님이 대추나무에 매달려 있는 호박을 따는 상황으로 연출을 했고, 어머님은 그림에서 보시듯 그 꿈을 꾸고 계십니다. 어쩌면 저에 대한 기원을 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원래 호박은 남자아기를 상징한다는데 이점은 어머님의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왼쪽은 그림이고 오른쪽은 사진입니다. 이놈이 그림을 그릴 당시 아기의 모습입니다. 꿈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마치 실재의 현실처럼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한편, 저는 이 그림을 한 여름에 선풍기를 쐬면서 근 한 달 반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그림을 멀리서 살펴보려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 우연히 선풍기가 어머님을 향해 바람을 보내는 광경을 발견했습니다. 선풍기의 시원한 바람이 어머님의 치유를 돕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저는 대단한 충만감을 느꼈고 이 영상을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이전의 사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에 접근하고 이를 통해서 좀 더 많은 관객들로 그 교감의 폭을 확장하자 하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 입니다. 그래서 영화사의 협찬을 받아 ‘이중간첩’이라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고 거기에서 떠오르는 시각적인 잔상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중간첩’전 전시를 준비하면서 다음 전시에 대한 기획안이 떠올랐고 아직까지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현대음악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님입니다. 그 분이 일생 동안 견지해 온 삶의 실천으로서의 예술관은 저에게 예술가의 초상 같은 것이고 만약에 전시를 한다면 윤이상 선생에 대한 헌정 전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삶과 음악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저와의 어떤 감성적인 교차 지점을 찾아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보시는 그림은 윤이상 선생의 미망인인 이수자여사와의 첫 대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제 경우 결혼과 아내의 출산 등과 같은 제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그림의 구성형식도 단순하고 함축적인 양상으로 변화했습니다.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간명한 이해와 그것을 재현 하는 묘사의 방법으로서 유화기법에 대한 탐구와 실험을 계속해 왔습니다. 전통적 유화기법은 요즈음 제가 구사하는 방법이며, 최근에 이르러 나름대로 체계화된 방식입니다.
시대별 유화기법의 특징을 대략적으로 요약해 봤습니다. 예술가가 매체나 재료를 선택하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단순한 테크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화가의 성격과 기질 등을 이해 할 수 있는 비밀 같은 것들이 숨어있습니다. 제가 요즈음 그리는 방법은 튜브 물감이 개발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격렬한 붓질에 의해 작가의 감성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성격 탓도 있고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전통유화기법은 우리가 흔히 그리는 식으로 대상을 보고 직접 화면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드로잉과 밑그림을 통한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대상을 재현 해내는 일종의 계획된 그림입니다.
보시는 그림은 유화를 이용한 최초의 예술가중 한 사람인 로베르 캉팽의 부부초상화로,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과장된 표현이 없는 간소한 외양은 인간의 내면성까지도 전하는 듯 합니다. 초기의 유화기법은 템페라 위에 유화의 투명성을 이용해 여러 번 덧칠해져서 색이 우러나오는 효과를 줍니다.
그림은 제가 플랑드르의 미술과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소품들은 제가 의뢰인에게 미리 부탁해놓은 것으로 의뢰인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입니다. 저는 이 소품들이 인물의 개성에 대한 어떤 의미를 갖도록 적절히 배치했습니다. 모짜르트에 관한 책, 캠브리지 대학을 상징하는 타올, 시가박스의 습도계, 러시아산 여우털 모자, 이런 것들은 모두 의뢰인의 지식과 교양, 고급취미와 같은 귀족적인 자부심을 상징합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의 방향이나 주먹 쥔 손의 표정도 그러한 자긍심과 연관이 됩니다. 반면 오른쪽 그림의 여인은 이런 남편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연출했습니다. 소품들은 기다림, 약속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유화기법을 지도하기 위해 작업과정의 변화를 모아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준비한 내용은 전통유화기법의 방식에 제 나름의 기법을 가미한 것입니다. 예, 그럼 여기까지 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김준기 : 김범수 선생님과 이광호 선생님을 모셔서 말씀 들어보았는데 많은 질문사항이나 얘깃거리가 많을 것 같은데, 어차피 정해진 시간이니까 정리를 잘 하면서 해야 하겠죠. 그래서 정리를 잘해주고 얘기를 잘해주실 두 분을 모셨습니다. 한 분은 장윤현 감독님이고 한분은 월간미술 이건수 편집위원장님이십니다. 두 분이 아무래도 영화나 미술, 서사 비주얼 이런 부분에 전문가들이시니까 두 분 작품을 주제로 중심으로 주제에 부합하는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이건수 : 일단 저는 전시가 시각서사라는 제목인데 전시에 맞는 컨셉과 전시를 이끌어가는 논의하고 출품된 작품과의 관계라 할까. 대개 서사적, 내러티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잘못하면 내러티브의 컨셉을 표피적이고 한정적인 요소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미술 속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을 애써서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다보면 보여 지는 것들이 대부분 구상적이랄지 미장센중심의 회화들이죠. 그러니까 도구나 설치 인물들을 동원하여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그것을 제시해가는 이러한 형태라는 거죠. 그것이 미술에서 영화나 다른 장르의 미술하고 만나면서 얘기를 풀어가는 방법은 조금 조심될 부분입니다. 또 미술 쪽의 입장에서 좀더 정체성이라 할까, 진정성 같은 것들을 좀더 고집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고요.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학교강의를 하든지 밖에서 이렇게 보면 미장센의 그림, 이야기를 꾸며가는 내러티브의 그림들이 대게 다른 장르, 특히 영화나 어떤 사진이나 다른 비주얼한 매체에서 받은 영향을 입체적으로 풀어가는 경향을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미술을 영화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몇 가지 기초적인 방법론들이 있겠죠. 말하자면 영화의 매트박스 비율이라고 그럴까요? 일대 얼마라는 비율대로 해서 트리밍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이나 사물들의 인물들을 영화적인 앵글과 비율대로 트리밍을 한다든지 이런 비율로서 회화에 적용시키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웃 포커싱을 하고, 줌인을 하고, 클로즈업을 하는 방법을 통해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 또 어떤 사람들은 하이키하고 로우키를 작용을 해가지고 색깔이 날아간 듯한 효과를 줄 수도 있죠. 또 형체를 희미한 선만 남아 있으면서 추상성까지 구사하는 것이나, 로우키를 어떻게 해서 어둠 속에서 형체들을 확인하는 그런 방식이 있겠죠. 또 많이 행해지는 것은 하이퍼리얼리즘과 같이 거의 사진하고 맞먹는 초정밀하게 리얼하게 묘사하는 그런 것들을 꾀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거의 일차적으로 끝나버리고, 회화에서는 그런 것을 어떤 영화나 다른 매체를 해석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이퍼 리얼리즘 같은 경우를 들면, ‘아, 이사람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렸다’ 하는 문제를 갖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이 기술이 있다’ 내지 ‘이 사람 그림 잘 그린다’라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미술 쪽에서 봐야 될 입장은 이것이 정말 정밀하고 세밀하게 그려놨지만, 이것이 사진하고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그림이라고 하는 것을 갖고 있구나 하는 입장이 하이퍼리얼리즘이지, 그림이 추구하는 것이 똑같은 사물을 베끼고나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간과하기 쉽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러티브를 가지고 미술에서 이야기한다는 컨셉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하는 것이고, 회화라는 입장에서 정체성을 가지고 시작하는 입장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풀고 싶습니다.

김준기 : 일단 여기까지.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라는 문제를 어떻게 따져봐야 할 것인가를 문제제기해주셨고. 그러나 이제 회화에다가 플러스 미술 쪽에서 접근하는 영상작업 이랄지 설치작업 속에서 내러티브를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비주얼한 내러티브라는 것이 설정가능한지, 이런 문제까지 말씀해주시고 있고요. 문학적 서사나 영화적 서사와 다른 시각미술의 서사라는 것이 어떤 건지 어떻게 가능할지. 그런 것을 차후에 말씀할 수 있을 것 같고. 구체적인 작품에 관한 언급은 이제 장윤현 감독님께 듣고 나서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윤현 : 어쨌든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저희가 영화라는 작업을 할 때 필름은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재료예요. 필름 자체는 그 재료가 어디론가 투사된 그림을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거든요. 필름이 비쳐지는 스크린만을 보게 되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필름이 가지고 있는 재료가 다시 재 상영 될 수 있다는 것들이 굉장히 좋았고요.
김범수 작가의 작품은 결국 그림자와 빛과의 연관성, 그리고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인해 제작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영화를 하다 보니까 말이지만, 지금 소재로 사용되었던 필름은 색감만으로 선택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나아가 아까 콜로세움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아 저게 어떻게 보면 20세기의 콜로세움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민주적인 방식이라든지 콜로세움이 가지고 있는 의미라 할지... 제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을 저런 빛으로 보여줬다는 것이 내용이 가지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가 일차적으로 소화하고 있는 느낌이나 그런 것까지 같이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작품을 설명해 주셨는데요. 홍콩영화하고 한국영화, 미국영화가 같이 섞여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예술적인 느낌만 보다가 그 얘기를 듣고 보니까 디테일한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세히 필름을 봤는데 이게 비춰진 그림이 아니니까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어떤 작품형태로 크긴 하지만 좀 더 그 그림자가 디테일하게 잘 보이면 조형적인 그림의 느낌보다는 조금 더 이야기가 늘어가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작업하시는 방식들이 더 확장될 수 있고 더 의미 있게 비춰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광호 작가님은 제가 계속 만나온 작가입니다. 제가 공교롭게도 영화 ‘접속’하고 ‘텔 미 썸싱’ 두 작품 다 이광호님의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어요. 영화에서도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 시점의 문제, 시선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갖고 있긴 하지만, 누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느냐, 누가 그 이야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되느냐, 뭐 이런 거에 따라서 감동이 전해지는 느낌이나 서술하는 방식들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화면을 놓고, 화면을 만드는 사람이 보는 시선과 거기에 대상이 되는 사람의 시선이 어떻게 교감을 하는가에 관심이 많이 있었어요.
실제로 ‘접속’을 할 때는 한 작품을 제방에 걸어놓고 그것을 계속 보면서 이야기를, 아까 말씀하신 약간의 오해와 같은 해석들을 계속 얘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텔 미 썸싱’ 할 때는 제가 시나리오를 이광호 선생님께 드리고 그 안에 물론 주인공이 그림을 그려야하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부탁을 드린 것도 있었지만, 그림이 갖는 이미지, 또 그 영화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생각하고 계신지, 이런 부분들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까 티저광고를 말씀하셨는데 저한테 이미지로 그려주신 그림을 저희가 티저포스터로 사용을 했어요. 그 그림을 보고 영화를 보신 분들은 다른 말씀을 많이 하세요. 그 포스터를 못보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포스터를 보신 분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라고 할까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나 느낌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가 그 티저포스터와 연관을 지어서 많이 생각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좀 전에 이광호 선생님의 여러 가지 지나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최근의 그림에 대해서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그게 ‘이중간첩’전을 할 때 예전에 그리셨던 그림만을 상상하고 갔는데, 그 그림의 경향과 굉장히 다른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아주 짧지만 짧은 순간에 지나가는 영상이 주는 느낌 그리고 저는 그 스토리를 알았기 때문에 스토리가 주고 있는 이미지와 묘하게 충돌하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이게 단순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그것을 해석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나 관점이 굉장히 다양하면서도 많이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이미지는 굉장히 단순하고 평범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스토리를 알고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작가가 상상하고 있는 세계를 근접해 갈 수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전하고 다르게 제가 좀 더 가깝게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안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준기 : 진심으로 여쭤보는 건데요, 진짜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나요? 왜냐하면 큐레이터 평론가 이런 사람들이 그림을 본다는 것은 직업적인 그런 일이 되어가지고 여쭤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극장에서는 스토리에 빠져들고 울기도 하고 몰입도 되거든요. 근데 회화작품 전시장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서는 사람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거니와 저로서도 이제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좀처럼 없어요. 그래서 저렇게 말씀 하시는 것이 좀 부럽기도 하고. 어떠세요, 이건수님?

이건수 : 장 감독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완곡하게 부드럽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김범수 선생님은 제가 잘 모르니까 사실 작품은 미디어시티에 나온 거 보고 알고 있고, 이번에 월간미술에도 나옵니다. 첫 페이지에 크게 두 페이지에 걸쳐서 작품을 넣었어요. 근데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장 감독님이 완곡하게 말씀하셨지만, 이 ‘시각서사’라는 것이 영화적인 면을 미술에 부여할 때, 아까 김범수 선생님의 작품이 이 컨셉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냐 하는 것에 대해 저는 조금 부정적인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저건 설치이고 하나의 평면을 겸비한 입체 컨셉으로서의 그림이라는 거죠. 저것이 어떤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영화필름이라는 재료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 자체가 어떤 내러티브를 양산하는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하고는 조금 색다른 작업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오히려 저런 작업은 만다라 같은 종교적인 의미의 구도자가 재료들을 배치시키면서 근원적인 형상을 찾아나가는 입장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필름을 사용했다고 영화하고 접목시키는 생각은 버려야할 것 같아요.
김범수 선생님 작품이 그 작품자체로는 굉장히 의미 있고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미디어 쪽에서 자꾸 건드리는 것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미디어시티서울에서도 미디어시티하신 분들이 미디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냐에 모호한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전에 한 번 말씀을 나눠보았는데, 그 사람들이 미디어아트에 대한 개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디지털아트다 미디어아트다, 그러니까 우리가 회화를 브러쉬 아트라고 안 그러잖아요. 미디어아트라는 것에 미디어라는 개념을 너무 앞세워가지고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거죠. 아무튼 그럼 면에서는 김범수 선생님을 그런 면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안 좋다고 보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패턴화하고 만다라 같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가고, 조금 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을 활용하는 기계가 어떻게 개입됨으로써 그림자 현상, 영화라는 비쳐진 그림자, 그림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더 폭넓게 영화와 접목시킬 수 있을 것 같네요.

김준기 : 다른 말씀을 또 해 주실 것 같은데, 일단은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말씀을 까먹지 말고 기억해주시면 좋겠고요. 저로서도 이제 이건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이 작가가 이 작품을 출품한 것이 시각서사라는 전시에 적합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런 거죠.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의 시각예술 회화나 조각이 아닌 오브제를 이용한 설치작업 중에서 영화와 관련된 주제나 소재를 채택하고 있는 작품을 이 전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 작품이 지나치게 소재주의 쪽으로 소재만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지적해 주신 거고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주제와 연관해서 한번만 더 틀어보면 재미있는 지점이 생깁니다. 필름이라고 하는 것은 1초에 24컷이 지나가면서 움직이는 것으로 영상 잔상이 남게 되는데, 저 필름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라는 물성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죠. 즉 서사를 감지한 물건, 물성 그 자체를 가지고 서사는 어디론가 증발하고 패턴이라 할지 비주얼요소로만 환원이 된다는 것이죠. 보통 이 전시 전체가 보여주려는 것은 비주얼로부터 내러티브로 확산되는 것 같은 그런 뉘앙스인데, 이 작가의 작품은 유독 내러티브자체를 꽁꽁 묶어가지고 비주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어요.
작품 설치할 때 작가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이 자체가 패턴이나 문양 색채로 존재하긴 하지만 서사적인 요소는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을 했더니,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주제의 어떤 영화의 필름을 가지고 작업을 할 때는 그 내러티브를 또 다른 조형요소로 끌어들이는, 그 영화의 내러티브가 시각장치로도, 단지 패턴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조형성 자체로 서사 내러티브구조를 가지는 쪽으로 업그레이드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렇다면 앞으로 좀더 비주얼과 내러티브라는 것에 대해 다음 작품부터 기대를 좀 해봐야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지금 상태에선 확산이 아니라 환원이라는 정도의 재미로 작품을 보는 관람 포인트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이건수 : 지금 말씀이 재미있는데, 지금 이미지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쪽으로 많이 해석하고 그림읽기를 시작하는데요. 만약에 거꾸로 이야기가 증발되어버리고 연결된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옛날에 이미지를 가졌던 오브제로서의 필름 한 조각, 두 조각 이렇게 남아있는 쪽으로 환원된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오히려 그런 부분들을 많이 확대 부각을 시키셔서 이미지가 완전히 증발되어서 하나의 신체 같기도 하고 박제된 것 같기도 한, 이미지로서의 필름의 모습으로 작업을 진행시킨다면 훨씬 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그런 식의 이야기들을 해 준다면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김준기 : 선생님은 어떠세요?

김범수 : 저는 작업을 하는 입장이니까 지금 말씀하신 부분들, 저번에 김준기 실장님하고 말씀드린 부분들이 앞으로의 제가 작업을 해나갈 과정이겠죠. 지금 작업을 한 7년 동안, 필름을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제 나름대로 진화를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경제적인 부분이 항상 걸려있기 때문에 기계장치나 새로운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제약을 받죠. 근데 저번에 말씀드린 것은 예를 들어, ‘텔 미 썸싱’을 제가 영화를 보고 필름을 구했다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숨겨진 감성들이 떠오를 것 아닙니까. 그런 부분들을 말씀드린 거죠. 선생님이 말씀하신 부분 역시도 공감하는 부분이고요. 작가로서 하나의 오브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영화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색감으로 보여 지는 부분들은 회화적인 요소, 조각적인 요소, 설치적인 요소가 가미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거죠.

김준기 : 네. 아까 하시려던 말씀 계속해서 부탁드립니다.

이건수 : 이광호 선생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혼자 짝사랑하는 팬이었어요. 선생님께서 그림을 하시는 방법론들을 제가 굉장히 재밌어했고, 제가 기자생활을 처음 할 때부터 그림들을 찾아다니면서 잘 봤어요. 혼자서 잘 보고. 그래서 좋아하는 그림들이고요. 아까도 설명을 드리려고 했지만, 그림이 단순히 무엇을 재현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무언가를 만들고 과거역사와 맥락을 만들려고 하는 신호들이 좋아서 굉장히 좋았어요. 시점의 문제,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과의 관계의 문제로 그림을 활용하는 것도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전체적으로 관점이나 시점이 르네상스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은 또 아닌가하는 생각도 합니다. 르네상스 사람들도 시점의 문제를 굉장히 모색을 한거고 아까 말한 작품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소품들을 통해서 얘기가 되고 시점과 보는 방법론에 대한 게임들을 했는데, 그것을 이제 우리의 현실 일상으로 바꿔서 표현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또 어떤 식으로 한 차원 더 진행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이 있습니다.
역시 이광호 선생님의 특징이라 한다면 이전에 했던 자기의 일상서사들을 풀어가는 시선의 문제들인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궁금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광호 선생님 작품이 시선의 문제를 갖고 하는 우리나라의 몇몇 안 되는 작가 중 한분이기 때문에, 굉장히 이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나 서사성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몇몇 안 되는 작가 중에 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풀려가고, 또 어떤 식으로 회화의 정체성을 갖는 문제로 갈 것인가가 관심입니다. 그래서 시점의 문제는 모든 화가의 문제이고 옛날부터 화가들이 갖고 있는 문제로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제 생각을 조금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가 있잖아요. 미셀 푸코가 쓰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이 계속 연구를 하는 작품입니다. 제가 그 글을 조금 읽어 봤는데, 과연 <라스 메니나스>가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선의 문제가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요.
작품을 보면 이제 공주하고 시녀하고 개, 난쟁이도 있고 화가가 벨라스케스가 큰 캔버스를 걸고 바라보고 있는 장면도 있고 뒤에 거울에 비취진 왕의 근처의 그림도 있잖아요. 미셀 푸코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점을 깨는 1호탄이라고 얘기하거나 바로크를 여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얘기해요. 재현의 성서라고까지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높이 찬사 받는 이유는 단순히 화면 안에 과거의 시점처럼 우겨넣어서 액자 속에다 만들어놓은 것에 있지 않고, 화면의 시점 교차와 이동과 공간의 트임을 통해서 계속 옆으로 확장하는 것에 있죠. 근데 대부분 미셀 푸코나 사람들의 관심은 공주와 주변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게 왕의 부처고, 화가도 또 왕의 부처를 바라보고 있고, 또 캔버스에 그려있는 것도 왕의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시점의 통일이 뭐가 중요하냐면 왕의 부처의 시점과 화가의 시점, 그 그림을 보는 관객의 시점이 일치해야 한다는 거죠.
대부분은 벨라스케스가 그 리고 있는 그림은 왕의 부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10년 전에 프라도미술관에 가서 한번 봤어요. 그 사이즈가 벨라스케스 앞에다 걸쳐놓은 캔버스사이즈하고 똑같더라고요. 거의 3m~4m에 달하고 가로가 169cm인데, 벨라스케스 앞에 있는 캔버스 크기가 <라스 메니나스>의 크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저의 궁금증은 사람들이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캔버스 앞면엔 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저는 그게 아니고 그 자체가 <라스 메니나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얘기가 되어야지만 벨라스케스는 지금 자기가 그려놓은 그림의 풍경을 보고 있는 거고, 그 다음에 관객도 그 그림을 보고 있는 거고, 왕의 부처의 시선을 봐서도 그 그림이 지금 보이고 있는 거죠. 그래야 그 세 개가 일치가 되지, 안 그러면 일치가 안돼요. 만약 벨라스케스가 왕의 부처의 얼굴을 그렸다면 그 시점이 성립이 안돼요. 왕의 부처를 그렇게 크게 그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3m나 되게요. 그러니까 저는 제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대한 해석들이 그림읽기의 하나의 방법이라는 거고, 이광호 선생님이 그런 재미난 작업을 하시는 거죠. 저는 아까 부인 손잡고 뒷거울을 보는 그런 장면들에서도 보았듯이 그림의 시점이나 이런 것들이 유익한 면이 있는데, 그것이 그 시점, 게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과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실 지가 궁금합니다.

김준기 : 질문들이 재밌죠. <라스 메니나스>는 우리가 앞에 가져다 놓고 보면서 얘기를 들었으면 실감이 났을 텐데요. 지금 하신 말씀들은 새로운 학설이시죠?

이건수 : 네. 저 혼자 그냥.

이광호 : 근거를 한 번 찾아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증명만 된다면 굉장히 유명해지실 것 같은데요.

김준기 : 기존 미술사가들의 학술을 뒤집는 새로운 학설이죠.

이광호 : 저는 그 시녀들을 개념적으로만 이해를 하거든요.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를 못하겠어요. 제가 <꿈의 세계>를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해드리자면, 과거 르네상스 시기 화가들이 도전했던 시선의 분배를 제가 다시 끄집어내서 나도 한 번 해 보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그 당시 느꼈던 상황, 아내와 마주봄의 상황을 그리게 된 절실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마주본다는 자체가 저에겐 큰 의미였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처음엔 두 손을 그렸어요. 그러다가 이것을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재현할 수가 없을까 해서 2개의 거울을 장치한거죠. 제가 그 작업을 하면서도 너무 머리가 아프고,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작업을 하면서도 너무 헷갈리는 거죠. 나중에는 제 그림을 글로 옮길 때도 굉장히 머리가 아팠어요. 몇 사람을 동원해서 가능한 이야기인지 확인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 오늘 말씀드린 거예요.

김준기 : 좀 엉뚱하겠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을 드리고 싶은데요. 예를 들면 거울 그림이랄지, 수태고지를 사용한 글이랄지, 머릿속에 내러티브가 있잖아요. 그것을 시각이미지로 재현하겠다고 하면, 회화보다는 예를 들어서 동영상작업이 휠씬 더 효율적으로 내러티브를 구현하는 것이 수월하거나 혹은 보는 사람들에게 간명하게 내러티브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굳이 한 폭에다가 구겨 넣으려고 애를 쓸까하는 거죠. 예를 들어 저 그림도 ‘태몽’이예요. 그래서 ‘첫 번째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빠져든다. 그러고 이제 호박을 땁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3~4가지 정도로 잘라서 기승전결로 내러티브를 만들면 쉬울 텐데요.

이광호 : 쉬울까요?

김준기 : 아니 뭐 동영상 만드는 사람들에겐 쉬울 테니까요. 그런데 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캔버스위에다가 집약된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는 회화적 내러티브를 하는 건지, 해야 되는 건지 하는 생각들을 해보는 거죠. 거기서 회화의 독자적인 존재가능성이 나오는 거고요. 또 심지어는 저렇게 회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분도 나오고. 그런 점에서 저의 질문은 화가들보다는 영화감독께서 답을 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윤현 : 말씀하신 부분에서 정말 회화가 가치가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요. 영화의 가장 큰 한계는 감상의 시간입니다. 어떤 이미지를 감상하는 데에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감독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보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작가와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동영상작업이 굉장히 편하고 쉽다고 생각하지만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감독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의 폭 같은 것이 대단히 협소해요. 그림은 몇 개월을 감상할 수도 있고, 가만히 앉아서 수 시간동안 볼 수도 있고, 또 아까 말했다시피 3초를 슬쩍 지나가면서 볼 수도 있는 거죠. 관람형태가 많이 다르고 그것으로부터 이미지를 생각해내는 나의 사고 작용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충분히 생기기 때문에 동영상을 보는 것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제가 한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단순화시키고, 선택해서 어떤 이야기구절을 만들어 2시간이라는 시간 안에서 압축해서 집어넣는 과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회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광호 선생님의 작품 중에 선풍기가 등장하는 작품을 처음 보면서, 저는 그게 동영상이라는 것보다는 뭔가 이 그림이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림에서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제가 볼 때는 내러티브의 전달이라는 것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어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악이 주는 느낌, 또 다른 물체가 그림하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고 들어가느냐 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동영상을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회화에서 가져주는 내러티브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준기 : 우연히 올라가 있다가 관람객들이 있으면 말을 시켜요. ‘이 동영상은 어떻게 만든 것 같아요?’하고요. 다른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오면 가끔 안내를 하니까요. 그러면 ‘뭐 이거 그냥 스틸컷에 동영상해서 만들었겠지, 기술적으로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나오지만, 일반 관람객들은 ‘그림 앞에 놓고 찍었네요’ 라고 바로 정답이 나오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의도하신 바가 상당히 많이 적중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래 그림 만져보면 안되는 거잖아요. 관객한테 지금 괜찮으니까 살짝 만져보라고 그래요. 회화작품은 캔버스위에 물감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그 앞에 있는 건 만져도 안 만져지는 것이잖아요. 이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물질로서 존재하는 회화와 빛으로만 존재하는 가변적인 이미지의 동영상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고, 여러모로 그렇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인 것 같고요. 계속해서 이건수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수 : 사실 서사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미술의 기원이랄까 미술의 가장 기초단계에서 시작하는 것은 서사성에 있죠. 애초의 미술의 탄생과 관련된 기록성 같은 문제들을 보면, 그 당시에 기록은 그림이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죠. 사실 이집트 상형문자나 라스코 동굴벽화,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같은 것들을 미술로 하느냐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오늘날 파인아트로 생각하는 진정한 미술로 접근했겠는가 하는 거죠. 하나의 이미지로서 말을 전달하는 문장부호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나 문자, 글이라는 것 과 이미지하고 회화 간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고, 거기에는 서사성이 개입되어 있죠. 그리고 로마나 그리스의 기록하는 벽화의 부조 같은 것에도 알렉산더 대왕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전부다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거고요. 또 조각에 열주가 있잖아요. 올라가면서 얘기가 풀어가는 서사구조가 있어요. 러시아의 성상 같은 것을 보면 테두리그림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은 영화거든요.

김준기 : 영화필름처럼요.

이건수 : 그러니까 저는 그런 개념들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해석해서 다시 재현한다고 하면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오히려 회화에서 그런 서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런 역사적인 기초적인 소스들을 보면 예전에 다 해 놓은 게 있습니다. 영화도요. 그런 요소들을 찾아서 지금에 와서 다시 한번 보여주는 그런 의미들이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영상에 관심이 있고 해서, 제가 충격을 받은 전시로서, 예전에 좋아했던 사진 작가 듀안 라이트라고 있었어요. 시퀀스 사진 4장을 가지고 1시간 30분짜리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더라고요. 딱딱 4장 찍어놓고 밑에다가 글을 쓰죠. ‘한 남자가 어디를 갔다’ 이런 식으로요. 그 방법이 4컷의 사진으로 하나의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하거든요. 컷과 컷 사이의 공간들을 우리가 상상하게 만드는 거죠. 충분히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영화라고 하는 것들이 극장에서 봐야만하고 또 영사기로 돌려서 틀어야하고 그런 영화적인 서사를 꼭 그런 공간에서만 체험할 것이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영화의 서사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화의 서사성을 획득을 하는데 미술의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그것을 풀어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매체적인 특성이 회화는, 화가가 봤고 화가가 체험했고 화가가 생각했던 것들을 다 끌어 모아서 하나의 그림 한 장으로 만들어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동의를 구해야 하는 그런 입장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미술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 하나의 집약매체이지 확산매체가 아니거든요. 모든 것들의 경험 모든 시간과 운동 같은 것들도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어 놓고 이것으로 귀착시키는 거지만, 음악이나 다른 멀티플 한 매체들은 시디 한 장에 찍고 그것을 백만 장을 찍어 확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것이 소통하는 시스템이나 그것이 풀어가는 이야기들이 달라진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훨씬 더 멀어지는 것이 더 회화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지금 미술관들이 전부다 대중 쪽으로 안가고 산으로 도망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미술이 자꾸 대중적이다 라고 하면서 소통 커뮤니케이션의 경로로 나가는데, 이게 루트가 맞아야 되는데 서로 결들이 다르니까 대중화가 안 되는 거예요. 세속화가 되고 상품화가 되는 것이지 대중화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미술이 ‘너희들이 값어치를 몰랐다’는 식으로 화가들이나 미술관들은 전부 도망쳐서 산속으로 들어가고, 교회같이 너희들이 미술을 체험하려면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사막을 건너서 산 넘고 물 건너 와야지만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거죠. 이런 개념의 전복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럼 회화가 가지고 있는 매체적 특성들은 어떻게 풀어가고, 거기에 어떻게 서사성을 넣고, 어떻게 해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준기 : 그 질문 어떨까요. 지난번 뮤지움토크와 지지난번 뮤지움토크 때 나왔던 것인데요. 서사라는 것이 우리의 인식구조, 감상체계 속에서 텍스트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선입견이나 오해 같은 것이 혹시 있을 수 있어요. 문자로 존재하는 것이 내러티브라는 것이죠. 그것은 문학의 힘이 가장 크겠죠. 문학적 서사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영화도 사실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문학적 서사잖아요. 거기에서부터 출발하고 오히려 비주얼한 것은 부차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판소리 같은 경우는 음을 담아서 들려주는 것이고 회화는 문학적 서사를 한 화면에 배치하고 관계를 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럼 과연 모든 서사는 문학으로 연결되는 것이냐는 거죠. 그랬을 때 문학으로부터 파생하는 모든 서사의 종속관계들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나 하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거꾸로 돌?
2005/02/24 15:43 2005/02/24 15:43

서사의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구원 : 이병희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2/12 11:52


* 이병희님이 쓴 월간미술 2월호 전시리뷰 원고임.

서사의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구원

이병희

1. 서사의 해체 - 이 때 해체된 서사는, 모더니즘적 거대서사이다.
사비나 미술관의 <시각서사>는 미술에서의 서사의 재구성, 혹은 서사의 해체와 구원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물론 이 전시는 현대미술과 영화의 관련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미술 자체 내에 있던 서사에 관한 논의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미술에서의 서사의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에 있었던 반성들을 새로운 전망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영화의 경우, 문학에서의 영향으로 서사성을 강조하고 내러티브의 완결성을 강조했던 것은 아마도 표준적 스튜디오 시스템에 기반한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의 시기인 1930-1950년대일 것이다. 그렇지만 헐리우드 이외의 지역과 최소한 1960년대 이후 헐리우드에서도 서사에 있어서 갖가지 실험과 새로운 관람형태가 창출되는 등 계속해서 새로운 맥락들을 형성해오고 있는지 오래이다.
한국미술에서만 해도 1990년대의 경우 모더니즘 미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재현에 있어서 이미지와 시각성에 관한 지난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와 서사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들이 미처 채 이루어지기 전에, 급하게 이미지와 실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도 사실이다.
서사의 해체를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문학 분야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서사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은 일종의 모더니즘적 거대 서사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거대 서사의 해체는 이후, 그 밖의 서사, 마이너 서사들을 다시 써가는 움직임으로 이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반성중의 하나는 서사의 주체와 재현의 주체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흐름들 속에서 사비나 미술관의 <시각서사>에서 이야기하는 서사는 좀 다른 것을 제안해야만 했다. 관습적으로 이야기하듯이 기승전결이 있다, 구조가 있다 등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서사라면, 그 서사는 해체된 모더니즘적 거대 서사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는 한국에서만 해도 10여 년 전에 이미 해체된 서사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지금의 서사는 다른 관점에서 조망되어야한다. 서사 해체 속에서 우리는 이미 서사의 기술 방법과 읽는 방법 모두 다각화되면서 텍스트성 자체가 해체되고, 재현의 문제 또한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도마에 올랐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서사의 회복은 바로 이러한 철지난 서사를 다시 이끌어내는 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는 방식, 그리고 읽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미술을 포함하여 문학, 영화 등 각종 예술과 문화의 장르들 속에서 서사를 적극적으로 써나가는 주체는 생산자라기보다는 작품과 마주하여 자신의 판타지를 끌어들여,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는 관람주체라는 사실이다.

2. 서사의 재구성 - 포스트모더니즘 서사 전략을 리뷰하다.
사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가들의 경향을 일견해보더라도, 1990년대 중반에서부터 최근까지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짐작할 만하다. 우선 출품작 중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작품은 강홍구의 (1996)이다. 강홍구는 상업영화나 광고의 대표적인 광고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주인공의 자리에 작가 자신의 얼굴을 삽입하여 편집하였다. 편집된 디지털 이미지는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개인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상업영화포스터나 광고이미지들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작가의 얼굴이 삽입된 광고를 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욕망의 실체가 부질없음에 마주치게 된다. 그렇지만 작품이 갖는 초현실적 특성 때문에, 관객은 대중문화로부터 받는 허망함을 버리고, 다른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팝아트의 방식과 일치하며 대중문화 비판과 동시에 그것을 역이용하고, 재맥락화시키는 교묘한 지점에 위치한다.
모더니즘적 거대서사를 해체하는 방식 중에서, 키치와 패러디 등은 매우 중요한 전략 중 하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중재의 <엉클샘>(1999), 박혜성<샘>(2001)과 같은 작품은 이런 전략을 잘 보여준다. 이중재의 작품은 대중문화로서의 상업 헐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를 대립적 구도로 보고 제작한 작품이다. 작품 제작의 목적이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을 전달하는 방식 또한 매우 간명하고, 대중적인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오히려 거대서사의 전달방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패러디와 키치의 면모를 띤다.
박혜성의 <샘>의 경우, 앵그르의 샘이라는 작품을 동영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여기서 앵그르의 회화로서의 미적 가치를 발휘하는 샘의 물줄기가 정말로 화면 가득 메워지면서, 앵그르라는 미술사 내에서의 거장의 지위는 매우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의 소재는 유럽의 희고 매끈한 여인의 몸이 아닌 동양인의 작고 아담한 몸이며, 이 여인이 들고 있는 물동이로부터 물줄기가 정말로 쏟아져 내려 결국 그 여인을 잠수시킨다는 점에서 박혜성의 패러디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게 된다.
사실 서사에서 부딪치는 재현의 문제를 미디어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재현의 과정을 폭로하고 오히려 시뮬라크르로서의 현실을 긍정하도록 이끌어내는 가운데 서사의 해체는 더욱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김창겸의 <편지>(2000)에서 관람객은 편지를 써내려가는 시간에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화자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편지가 다 쓰여지고 나면, “당신은 정말 존재했었습니까?”, “나는 존재했었습니까?”라는 마지막 편지의 문구처럼,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석고덩어리들을 마주하여 당혹스런 재현장치의 배신감을 맛보게 된다. 이 배신감은 은폐된 것들의 폭로에서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김범수 과 이광호의 <태몽>이다. 이들은 매체사용의 과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 속에서 오히려 매체 조작으로 인해서 은폐된 이야기와 감성들을 드러내려고 한다.
김범수의 의 경우, 다 쓰고 버린 필름을 다시 모아서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디자인적으로 재구성해내려 하며, 그 속에서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또한 이광호의 <태몽>은 회화, 사진, 영상이라는 매체들을 단지 이야기전달의 매체로 이용한다. 그리고 각 매체에 따라서 재현되는 같은 내용이 조금씩 다른 효과들과 그 차이들에 주목한다.
매체가 이야기 전달매체로서, 그리고 기록매체로서 충실한 기능을 하는 동시에 보다 도발적으로 관람객에게 그 기록과 소통에 참여하도록 하는 역할에 주목한 것은 박경주와 박태규이다. 박태규의 <광주천의 숨소리>(2004)의 경우 일종의 홍보효과에 주목하여 영상과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여기서 영화간판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영화간판의 상징성과 현장성을 포함한 이미지 효과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박경주의 <이주노동자 선거유세 퍼포먼스>(2004)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미디어로 재현한 셈이다. 이는 미디어의 기능 중 환상을 조작하고자 하는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며, 현실과 미디어 사이의 아이러니를 노출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실사회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여준다.

3. 서사의 구원 -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관람주체의 구원이다.
해체된 거대 서사는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며, 또한 무엇에 의해 구원될 것인가? 구원이란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박화영의 (2002-2003)를 참조할 수 있다. 박화영의 작품에서 관람객은 체험을 통해서 내러티브를 써낼 수 있다. 박화영의 미디어 설치는, 관람객에게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관객은 화면의 장면들과 소리들을 체험하는 가운데 연상되는 강한 감각에 자극받는다. 사실 박화영의 작품에서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재구성하려하면서 작품을 체험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는 매우 엽기적인 이야기로 재구성되기도 하고, 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람객이 자신의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욕망의 바다>(2002)에서 김세진은 매체사용에 있어서 이미지의 중요성을 매우 강하게 노출시킨다. 전형적인 TV 삼류 드라마를 연출하는 장면을 찍었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는 매우 어색하고 너무 상투적인 대사와 색깔들, 그리고 매우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배경 세트를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 작품은 김세진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매체 전달의 패러디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 예컨대 필름작업이나 싱글채널비디오 작품과 비교해본다면 김세진이 이 작품에서 강조한 것은 오히려 서사를 써나가는 데 있어, 이미지의 역할을 강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세진의 작품들에서는 일종의 일상의 무의식에 관한 폭로와 적극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작품 내에 존재하는 내러티브의 틈을 보여줄 뿐 만 아니라 그 틈 속에서 이미지 효과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이미지로부터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해당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 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서사 구원의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여, 작품의 내러티브를 다시 써가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이건, 동영상이건 간에 우리는 이미지와 만난다. 우리가 이미지와 만난다는 것은 이미지를 읽어내거나, 분석하거나, 거기에서 어떤 느낌을 받건 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작품에서 지극히 오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행복한 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끔은 매우 소극적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무의식적인 어떤 부분을 들킨 것처럼 수치스럽기도 하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우리가 이미지와 만나서 소통하고, 작품들로부터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는 시점이다. 이 시점은 우리가 작품과 단 1초를 대면하더라도 우리의 무의식 속 욕망과 작품의 욕망이 불현듯, 혹은 우연히 공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에 이미지가 재현을 위한 지표로서 기능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의 지표 없는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고 있다. 더 이상 재현이 불가능한 이 시대에, 관람 주체는 판타지 속의 시각과 상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해체된 서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일종의 시뮬라크르임을 알게 되어, 그것을 부정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뮬라크르는 단지 허구라거나, 버려야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뮬라크르라는 실재의 징후는 우리가 서사를 재구성하게 되는 출발점이자 단서이다. 우리는 이 단서로부터 출발하여 우연적인 환상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새로운 우리의 현실을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주체가 될 필요가 있다. 관람주체, 즉 우리가 서사를 다시 써나가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 더 정확히 말해 무의식에조차 씌여지지 않는 무의식 내의 공백에 다가감으로써만 가능하다.
환상이 현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증대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매체들이 어떠한 우열을 가릴 수도 없이 제각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그렇지만 현실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때 서사의 구원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는, 즉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서사를 쓰는 관람주체의 역할 회복이다.
2005/02/12 11:52 2005/02/12 11:52

‘사비나 재개봉관’의 현재 상영작 안내 : 반이정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2/12 02:22


포커스 : '사비나 재개봉관'의 현재상영작 안내

* art in culture 2월호 포커스에 들어갈 글이다. 사비나의 <미술과 영화 - 시각서사>에 대해 썼다.

‘사비나 재개봉관’의 현재 상영작 안내

리뷰를 할 때, 전시 내용물(출품작과 작품 배치)과 기획안(주제) 사이의 빈약한 연관성을 볼모로 삼는 비판은 가장 보편적인 미술 비평의 한 방식이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언제나 썩 내키거나 통쾌하지는 못하다. 그건 객관보다는 주관에 호소하는 개별 작품(물성)과 주관보다는 객관에 근거해야 하는 주제(비물성) 사이에서 빗어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설정인 탓이다. 언제나 작품과 주제 사이의 느슨한 유대에 간신히 빌붙어 기획되는 오만가지 전시를 “이게 전시 주제와 뭔 상관이래요?!”라며 볼멘 소리하는 것도 한 두 번이면 질린다. 어쨌건 선명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전일수록 논리의 십자포화에 노출될 위험성이 그만큼 고조된다. 분명한 사실관계를 지나치게 밝히는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그래서 잔치를 기획하는 주인공보다는, 초대받은 잔칫집에서 문제꺼리만 찾아내 트집 잡는 악역이 딱 어울리는 게다~. 전시 기획이 안고가야 하는 피치 못할 애로사항을 감안하더라도 사비나의 신년대작은 그 호감 가는 주제를 안일하게 취급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됐다. 예술을 세분하는 장르로서, 미술을 그것의 한참 후배격인 영화에 견주어 관조하려는 시도야 그동안도 있어왔고 여전히 고무적인 연구 과제이다. 영화의 지위가 이 바닥에서 최강자로 급부상한 현실을 감안하면 그런 비교 분석은 더욱 소중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가 제시한 ‘미술과 영화 - 시각서사(視覺敍事)’라는 무게 잡은 타이틀은 눈에 걸린다. 모두에서 투정했듯, 이 야심찬 주제가 타이틀로만 붙박아 놓았을 뿐 어떤 모양새로 구체화된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내놓은 기획안은 대충 이런 것 같다.

① 미술과 영화는 각각 시각과 서사에 큰 비중을 뒀다.

② 하지만 현대미술은 시각은 물론 서사에도 적지 않은 배려를 하는 것 같다.

③ 그 결과 작금의 미술은 ‘편집’, ‘시각’, ‘서사’라는 영화미학의 키워드와 공유한다.

④ 자! 그럼 그 미술 속의 영화적 실체를 보여주겠다. 전시 시~작!

나는 우선 이 같은 기획의 전제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비구상을 포함한 모든 미술품이 충분히 서사적이고, 영화 역시 과도한 시각성을 담보로 존립한다는 논박은 차라리 구차하다. 오히려 ‘시각과 서사’가 고려되지 않은 예술장르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따질 문제다. ‘거의 없거나 아주 없다’가 답일 게다. 한편 또 다른 영화적 키워드로 언급된 ‘편집’ 또한 지나치게 포괄적인 접근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미술과 영화가 기존에 각각 시각과 서사에 비중을 뒀고’, ‘요즘 들어 미술이 서사를 배려하는 것에 주목하여’, ‘편집, 시각, 서사라는 영화미학의 키워드가 미술계에서 관찰된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전제 속에 해당되는 미디어 작가가 어디 이번 출품작가 뿐이겠는가? 기획자의 머리 속에 들어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나의 추측을 간명히 적어볼까 한다. 사비나의 이번 전시는 기획 취지에서 밝힌 것처럼 미술과 영화 사이의 창작 문법에서 관찰되는 모종의 접점에 착안했기 보다는, 다분히 겨울방학용 시즌물의 성격을 고려하여 ‘딜레탕트 적 견지에서’ 미술과 영화 사이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포획될 만한 공통점-관객들도 쾌히 승낙할 수준의-에 입각한 기획물이다. 하여 미술 속에서 ‘영화적 자취’나 ‘익숙한 영화코드’만 노출시키면 쉽게 먹고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쉬운 예를 이번 출품작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명백하게’ 영화적 요소의 차용(영화 스틸에서 그대로 가져온 강홍구, 쓰다 남은 필름쪼가리를 재활용한 김범수가 이 경우),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6mm 기반 동영상(드라마를 패러디한 김세진, 개별 영화 클립을 몽타쥬 한 이중재),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기획안의 관철에 힘이 부쳤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미술관 전면과 장내에 듬성듬성 비치된 ‘영화 간판(박태규)’이다. 이제 관객 입장에서 전시와 주제(‘미술과 영화’)사이의 관계를 부인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페어 플레이가 아니다. ‘시각서사’라는 다분히 아카데믹한 전시 타이틀은 그래서 도에 지나치다 못해 부담스러운 감이 있다.

* 메모
1. 이제 할 얘기는 기획자의 몫이어서, 평론가의 훈수가 어울릴지 모르겠다. 비판 후에 “그럼 잘난 니가 한번 해봐!” 하는 소리 이따금 듣는 터여서 주제 넘게 한마디 해볼까 한다. 차라리 이렇게 갔으면 어땠을까. 영상 과잉 시대에 영상기술을 수용하면서 미술의 본령과 독창성을 확보한 케이스에 한정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다. 출품작 중에 꼽으라면 이광호와 김창겸을 들 수 있다. (내가 전시와 학회를 헷갈려 하는 걸까? 이건 단지 겨울방학 시즌물일 뿐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아임 쏘리.)

2. 미술관 전면을 장식하여 화제가 된 영화간판 조형물은 영화간판장이의 수제(手製)가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볼거리 이상의 역할을 못한다. 역설적으로 더 이상 수제 간판이 선호되지 못하는 영화계 현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영화계의 속도감과 파괴력을 엉뚱한 방식으로 인식하려 드는 미술계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폭로한다.

3. 일간지 전시 보도를 검색해보니, 하나 같이 사비나가 제공한 보도자료를 열심히들 동어반복 하고 있다. “미술, 영화와 만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쓴 거냐들?

반이정 | 미술평론가 | dogstylist.com
2005/02/12 02:22 2005/02/12 02:22

뮤지움토크 2 녹취록 : 김창겸, 박화영 + 고충환, 박동현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2/06 22:53


작가 : 김창겸, 박화영
초청패널 : 미술평론가 고충환, 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 집행위원장 박동현
2005.1.22( 토) 오후3시, 사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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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 전 시간에 이어 두 번째 뮤지움 토크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김창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박화영 작가의 작품을 보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김창겸 : 안녕하세요. 김창겸입니다. 일단 설치작업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여기에 보시는 내러티브는 거울, 어항하고 꽃이고요, 이런 소품은 옛날다방에 항상 있는 그러한 소품이고요, 저기에 사람이 걸어와서 거울을 보게 되고 거울 앞에서 일련의 행위를 하다가 떠나가거든요. 근데 거기다 트릭을 만들었는데요. 거울에서 떠나면 그림자가 되요. 그림자가 돼서 나가죠. 그런 자체가 사실은 모순이 있어요. 우리가 거울을 떠난다고 해서 그림자가 되진 않거든요. 그렇지만 연속성으로 인해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되요.
거울 안에서 보이는 공간은 옛날다방을 의미해요. 사실은 서울 변두리를 돌아다니면서 찍었던 실제 다방이고요. 이 공간자체가 과거 다방을 허물고 전시장을 만든 곳인데 그 공간의 이름 자체를 사루비아다방이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인테리어 자체도 완전히 바꾼 것이 아니에요.
거울 안에 보여 지는 이미지는 현재공간을 투사하지 못하고 과거이미지를 투사하고 있죠. 역시 그 이미지가 그림자에 의해 여러 번 바뀝니다. 물고기가 있다가 때에 따라서는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테이블보도 바뀌었다가하는데, 저기에서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김준기 : 지금 저 인물들은 찍을 때 거울을 보고 찍는 건가요? 아니면 카메라를 보고 찍는 건가요?

김창겸 : 카메라를 보고 찍은 거예요. 전체 제작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어요. 스튜디오에서 사람 인물들만 따로 찍고요. 또 거울만 따로 찍고요. 거울은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게 아니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요. 그리고 꽃도 따로 찍고 어항도 따로 찍고 해서 전부다 합쳤어요. 그래서 총 40개의 레이어가 보여 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이에 그림자에 의해서 상황이 바뀌는 트릭을 볼 수 있어요.
사실은 이 작품은 <편지>보다 더 일찍 구상했어요.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해결하지 못해서 이 작품을 <편지> 다음에 만들게 되었어요. 사물들의 이미지가 바뀌고 고정된 이미지가 없는 것은 제가 현재 과거를 생각할 때 너무 많이 가치관이 바뀐 걸 의미해요. 고정되었던 사건이나 가치관들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에 대한 상징, 재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엔 이렇게 석고이미지만 남게 됩니다.
다른 작품은 프로젝터가 천장에 설치된 작품이에요. 다방테이블이 있고, 주변에 소파가 4개가 있고요. 테이블위에 석고오브제도 있고 영상이 쏴지는 것입니다. 작품을 볼 땐 소파에 앉아서 볼 수 있고 주위에 서서 볼 수도 있고. 작품의 내용은 상투적인 겁니다. 옛날에는 다방에서 데이트를 했기 때문에 한 남자가 다방에서 기다리고 여자가 들어오고 커피를 마시고 좀 있다가 가고하는... 사실은 어떤 이미지들을 실제처럼 재현하는 거죠.
제가 사루비아다방이라는 작품의 구상을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광화문에서 보냈는데 거기서 데자뷰를 경험했어요. 1980년대 이 자리에 있었는데 상황이 틀리다는 거죠. 현재는 월드컵을 응원하고 있는데 80년도에는 데모하다가 최루탄 때문에 쫓겨서 도망 다니던 기억들, 그리고 그런 다음에 제가 어디를 갔던가를 추적을 해보니 상징적인 다방이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광장에서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갈수 있었던 곳은 다방이었죠. 그때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때 갔던 곳은 학교가 아니라 다방이었다는 거죠. 다방에서 모든 걸 했어요. 거기서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계획도 세우고.
이것도 역시 석고상을 놓고 그 앞에 다방 소파를 일렬로 두 줄 정도 놓고 소파에 앉아서 작품을 보게 되는데요. 저기에 보이는 그림자들은 한 사람의 이미지가 여러 그림자들로 된 것인데,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저게 내 옆 사람의 그림자인지 나의 그림자인지 착각하게 되는 효과가 있어요. 사실 이 권투이미지는 1977년 홍수환씨가 헥토르 카라스키야하고 권투를 해서 신화를 만들면서 이겼을 때의 그 필름이거든요. 옛날에는 다방에서 권투경기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어요. 그러나 오늘 날엔 축구응원을 위해 광장으로 나갔다는 것, 그러면서 사실상 너무 차이가 났고요. 그 의미가 틀려지는 거죠. 옛날 다방은 우리에게 광장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사루비아다방이라는 주제를 끌어들인 거예요. 설치작업은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했고요.
이와 관련하여 다큐멘터리 작업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를 해 주셨는데요, 다방이라는 문화를 생각할 때 빠질 수 없었던 기억으로 홍수환씨가 카라스키야를 이겼던 부분이 나오고요. 1980년대 이야기도 나오고요. 여기까지입니다.

박화영 : 소위 지금은 저를 비디오작가라고 명명을 해 주시는데, 개인적으로는 비디오작가라고 생각을 하진 않고요. 비디오 작가라고 불리어도 별 상관은 없는 것 같아요. 초기작업의 경우는 몇 가지만 살짝 보여 드릴게요.
이 작업 같은 경우는 비디오작업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하나의 Room Installation작업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육면체의 공간 안에 관객들이 그 공간에 들어와서 액터가 되는 거예요. 어떤 측면에서는 극적인 작업이에요, 씨어터적인 작업이고. 조각품이나 그림처럼 어떤 대상을 보러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 바닥에는 화면이 안 좋아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비닐 겹겹 사이에 물컹물컹한 덩어리들이 들어있어요. 이 작품의 메인작업은 밟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연출을 할 때 이 육면체의 공간이 마치 내가 내 신체 내부에 들어와서 내 육체 안을 헤엄치고 다니는 듯한 명상의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런 바닥에 물컹물컹한 환경이라는지, 사운드에선 의학박사가 심장병에 대해 강의하는 차가운 소리라든지, 어떤 신체내부의 액체나 심장소리가 들리죠.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서 하나의 분위기로서의 환경을 만들었던 작업이에요. 중간 중간에 사람들의 인터뷰 나오는 것들은 그냥 보러갔던 관객들이에요, 배우는 아니고요. 그래서인지 이런 작업은 다큐멘트하기 힘들더라고요. 하나의 대상을 찍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다큐멘트를 할 때 인터뷰에 응하고 싶은 경우 관객들이 이 공간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어요. 이 친구 같은 경우에는 병원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을 때 써늘했었던, 지하실에 갔을 때의 써늘한 느낌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던 것 같아요,
이것 역시 맛보기로 조금만 보여 드릴게요. 이것도 또 하나의 Room Installation개념의 작업으로 오래된 작업이고요. 갤러리 스페이스 안에서 모니터들이 사방의 벽들을 보고 있는 것이에요. 모니터가 깜빡이는 페이스가 하나의 맥박이 뛰는 것처럼 연출된 것이고 제목은 Pulse room입니다. 박동집이라는 작업이고, 이것 또한 <인큐베이터>만큼은 아니지만 관객이 하나의 씨어터적인 공간에 들어와서 체험할 수 있는 작업이고요.
이것은 <뜨거운 심장>이라는 설치작업인데요. 동판을 두드려 만든 실제크기의 심장조각이고요, 밑에 열판이 있어서 위에서 나오는 액체가 증발을 하는 소리에요. 그래서 어떤 저항의 연속 자체가 박동이 될 수 있도록 기획한 작품이고요.
다음은 <비상>이라는 영상설치작업이에요. 밑에 프로젝션 부분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이것은 16mm필름 에니메이션 작업이에요. 촬영한 데이터가 아니라 실제로 투명한 16mm필름리더에다가 한 프레임에 깃털 하나씩 실제로 붙인 거예요. 그러니까 영화 같은 경우에 1초에 24개의 프레임이 지나가니까 1초당 실제 24개의 깃털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고요, 2대의 16mm프로젝터에 의해서 투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1cm도 안되는 작은 깃털들이 모여져서 ‘발악’을 하는 듯한 커다란 날갯짓이 될 수 있도록 필름부분을 작업한 것이고요. 바닥에는 닭털, 오리털 같은 깃털들이 떨어져 있는데, 이것 또한 관객들이 공간에 들어와서 명상을 하거나 걸어 다니거나 놀 수 있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발목 높이에다가 붉은 색 레이더망을 처 놓았어요. 그냥 있으면 안 보이는데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깃털들을 가지고 놀거나 그러면 깃털들이 붉게 물들었다가 바닥에 떨어질 수 있도록 만든 작업입니다.
이 작업 같은 경우는 ‘Daily Kleenex Documentation’ 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요. 이 작업이 제작비가 가장 적게 든 작업이었어요. 여성분들 아시겠지만, 화장지울 때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그것을 하루에 하나씩 크리넥스 티슈에 찍어낸 게 다에요.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의 일기일 수도 있는 거고 하루에 대한 도큐멘테이션 일수도 있는 거죠. 굳이 말하자면 판화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얼굴이 판화 의 판, 화장품이 잉크, 콜드크림이 미디엄, 휴지가 판화지 인거죠. 그리고 손으로 누르는 게 프레스인 셈이고요.
일련의 지금까지 보여드렸던 설치작업들은 대체로 어떤 신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그런 단서에서 시작된 작업들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체로 사용하는 오브제나 대상들이 굉장히 하찮고 쓸모없고 어떤 대상으로도 안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97년도에 귀국하면서 금호미술관에서 귀국 보고전을 했었는데 그때의 설치 장면이에요. 대체로 그런 하찮은 것들을 매개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업들이 많아요. 다른 쪽 방에선 아까 보셨던 필름 작업이 보여 지고 있었고요.
이것은 Flush Opera 작업이고요. 이것은 P.S.1 Studio Program을 할 때 그냥 메인전시 말고 제가 자발적으로 재미삼아 한 프로젝트에요. 거기 있는 화장실이 남여 같이 쓰는 건데, 실제 사용 중인 화장실이고 볼일을 보러 오는 유저들이 오페라배우들인 거겠죠. 좌변기에 앉으면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게끔 되어 있고요. 사운드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있게 되니까 영어도 악센트가 되게 다양하잖아요. 한국사람 악센트 또 틀리고, 중국사람, 히스패닉, 러시안 또 틀리고요.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물 내리다’할 때 FLUSH를 말하는 거예요, 각양각색의 목소리로 그 단어를 녹음을 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FLUSH라는 음소들을 가지고 믹싱한 사운드가 이 공간에 테마음악처럼 나오고 있고요. 사람들이 여기서 볼일을 만드는 것이 작품이라면 작품이겠죠. 이게 파이프를 타고 가면서 사람들끼리 섞이는 그런 것들을 상상했었던 작업이에요.
다음은 비디오작업위주로 보여드릴게요. 처음 보실 작품은 한국제목으로 <소리>라는 작업이고요. 제가 귀국한 다음에 제 비디오작업 중에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봤었던 작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공중파에서 상영이 되기도 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봤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미술관의 상영관에서나 단편영화제 같은 곳에서도 상영되었던 작업이고요. 이 작업은 제가 귀국해서 마땅히 지낼 때가 없어서 부모님 집에 얹혀 살 동안 제작한 것입니다.
대체로 제가 작업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어떤 아웃라인을 세워놓고 작업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실제로 저 집 없는 강아지로 작업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보이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안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1년 동안 저 개를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그 때 제가 노트에 적었었던 단상들이라든지, 아니면 스냅사진, 일기에 적었던 자료들이 모아지니까 이거를 하나의 비디오 데이터로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1년이 지난 다음에 그것을 엮어서 <소리>라는 작업을 만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떠돌이 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많이 얘기하시지만 형식은 굉장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고 있고요, 사진 찍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사진들 같지만, 저건 동물의 왕국 찍기보다 더 어려워요. 동물의 왕국은 빵빵한 망원렌즈로 당겨서 찍으면 되지만, 저 자식은 얼마나 빠른지 아파트사이로 픽하고 가버리면 한 장 찍으면 ‘땡큐’인 거예요.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못 찍는 날도 굉장히 많았어요. 한 6개월 지난 다음부터는 이걸 작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데이터가 더 필요해서 길바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보이는 날도 많고 그랬었으니까요. 요지는 집 없는 개에 대한 정통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결국에는 저 녀석에게 투영된 저 나름대로의 어떤 자화상들을 봤었기 때문에 어떤 유대감들이 생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언어에 대한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 저희가 한국어라는 공통어를 구사하지만 여러분들이 다 느끼다시피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는 않잖아요. 제가 어떤 A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더라도 각자의 A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지, 절정의 소통을 이룰 수는 없는 것에 대한 좌절이 아닌, 그것에 향하고자 하는 의지의 연속이 작품의 주제가 될 것 같아요. 이 작업만이 아니라 어쩌면 여기서 상영되고 있는 작업도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작업의 전체적인 것을 보면 극복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의지의 연속들이 메인 스트림으로 계속 나타나는 것 같고요. 근데 그런 것들이 결국은 저희가 갖고 있는 신체가 개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샴쌍둥이였으면 이만큼 소통에 대한 갈망들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 사람이 배가 아프다고 얘기한다면, 내 경험에 의해서 배가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 그 사람의 통증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소통이 어려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여기선 ‘개’라는 엄연히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개체와 또 ‘나’라는 개체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기니까 여기서 끊도록 하죠.
다음, 금강산여행 처음 개시되었을 때 일민미술관에서 몽유금강전이라는 전시 때문에 작가들을 데리고 금강산여행을 갔어요. 그때 유람선 태워준다고 해서 냉큼 갔었어요. 유람선이 별로 좋지는 않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그 짧은 여행에서 비롯된 세미다큐멘터리적인 작업이고요. 이것도 역시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을 갖고 있지만 결국엔 다큐멘터리이기 보다도 분단된 나라와 분단된 자아와의 간극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보여줬던 작업이에요. 저기 마주보고 있는 둘 다 결국 저거든요. 제가 저랑 얘기 중 인거에요. 결국 혼잣말인데 마치 한 사람은 자기가 금강산간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둘이 싸우는 거예요. 그것이 어떤 분단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도 한 것이고요.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죠. 이번의 작업은 라는 비디오시리즈에서 나온 것 중에 한 토막이에요. 제가 2000년쯤에 싱가포르의 Theatreworks라는 실험극단과 같이 공동작업으로 작업을 했었어요. 궁극적으론 'Destimona'라는 멀티미디어공연의 비디오작가와 퍼포머로 참여를 했었는데요. 거기 한 부분으로서 Desti mona로, 사실 Destimona가 오델로 부인이름이잖아요. 'mona'라는 애칭을 가지고 나와서 현대여성의 스테레오타입에 의해 비틀어진 이야기를 짧은 에피소드로 대여섯 개쯤 만들었어요. 그것을 귀국 후에 신세계미술관에서 mona시리즈만 엮어서 멀티채널작업으로 보였었어요. 지금 이 '모나 이민국에 가다'같은 경우는 프로젝터 때문에 싱가포르에 한달정도 체류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아마 여러분도 다른 나라를 통과할 때 느끼셨겠지만, 공항통과하기가 아주 기분 더러운 경우가 많잖아요. 특히 여성 같은 경우 더 그렇거든요. 여성이 다른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고, 또 미혼여성이라 한다면, 마치 여기 와서 애를 놓고 눌러앉을 사람인 양 쳐다보는 듯 하는 거요.
저 같은 경우 사실은 싱가포르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로서 초대를 받아서 작가로 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직원이 오더니 여자가 싱가포르에서 한 달 이상 머무르려면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한대요. 근데 제가 당시 공연준비 때문에 너무 바빠서 못 간다고 그랬더니 특별히 하나의 서류에 사인하라고 들고 왔었어요. 근데 그 서류가 뭐냐면, 실제로 내가 임신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각서를 써야했어요. 정말 살다 살다 별 각서를 다 봤죠. 임신하지 않았음을 서류로서 증명을 해야 하는지... 그 때 정말 바쁘지 않았으면 객기 어리게 무슨 해프닝을 벌였을 테지만 일단 너무 바빠서 사인을 하긴 했어요. 일단 그 에피소드에서 출발에서 방금 보셨던 에피소드가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 i'm not pregnant’ 라고 선언하는 것뿐 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것들, ‘나는 톡 쏘는 성격이 아닌 것을 선언합니다’라든지...그래서 pregnant와 운율적으로 비슷한 단어들을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선언들을 계속한거죠. 아무튼 그것이 mona시리즈들이고요.
<크래커>라는 작업은 호암에서 처음 보였던 작업인 것 같아요. 원래는 투 채널 작업이고, 지금 보여드리는 것은 편의상 한 채널로 묶어놓은 거예요. 원래는 이런 프로젝터가 두개, 저런 식으로 싱크가 맞춰서 상영이 되고 있는 거예요. 이 작업 같은 경우는 ‘32’라는 숫자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에 대해 설명적으로 말을 하고 있진 않아요. 설명을 하자면 굉장히 어렸을 때 그냥 제가 벌렸었던 게임이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32살 되는 해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그게 뭐냐면, 어렸을 땐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논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저 혼자 놀다가 32라는 숫자를 정했었어요. 그 때 32라는 것을 어떤 하나의 죽음의 숫자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건 하나의 놀이였었는데 32살 될 때 생각해보니 이제 그 때가 된 거에요. 근데 당시 그 약속을 했던 꼬마는 없잖아요. ‘걔를 만나서 담판을 짓던가, 아냐 사실 난 더 살겠다든지, 그만 살겠다든지 해야 될 텐데 걔를 다시 만날 수 없겠구나’ 하는 사소한 발상에서 시작되어 비롯되었었던 투 채널 비디오작업이에요. 거기서 시작했지만 궁극적인 주제는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깔려있는 내러티브는 저 꼬마애가 어른인 여자한테 미끼가 되는 노란 크래커를 놓고 다녀요. 그러면 큰애가 받아먹고 다녀요.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빵가루 놓고 다니는 상황을 설정한 거죠. 길을 안내하는 어떤 악마 같은 아이예요. 근데 어른은 맛있다고 넙죽넙죽 받아먹고 다니고, 근데 제가 32개 이상 크래커를 안줘요. 중독이 되어서 그것을 계속 먹어야지만 내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젠 없는 거죠. 그러한 숨겨진 내러티브 하나가 있고. 메인작업은 아직 시작은 안했는데 조금 있다가 보시면, 채널이 더 분리가 돼요.
오른쪽채널은 아까 처음에 얘가 셈을 할 때 나왔었던 floor plan에 의해서 32개의 기억의 방을 방문하고 다니는 구조로서, 한 채널은 나가고 왼쪽채널에선 서울의 건조한 풍경들이 계속 나와요. 이것은 전후 상영을 하는 동시상영과 달리 정말로 투 채널을 동시에 트는 동시상영인거죠. 그래서 오른쪽채널에서는 기억의 파편들에 의한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단서들이 나오고요, 왼쪽채널에서는 다 서울 시내를 담은 것이에요. 모두 랜드 마크에요. 근데 왼쪽에 보면 저기 숨겨져 있는 게 보이죠. 권투하는 사람이라든지, 저기 달걀이라든지. 못 보는 사람들도 꽤 있더라고요.
말하자면 오른쪽 채널 같은 경우는 과거의 기억의 파편에 의한 어떤 개념적인 지도라면 왼쪽채널은 침묵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몰래 개인적인 랜드 마크를 심고 다니는 거예요. 랜드 마크라면 원래 남산타워, 명동성당이라든지 교보빌딩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랜드 마크로 작용을 한 거잖아요. 어떤 측면에서는 특히 지금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살다보면, 개인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회가 돌아가잖아요. 그러다보면 개인의 지표 같은 것이 굉장히 상실되는 것 같거든요.
궁극적으로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오늘날을 사는 자화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장 번화한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면에서는 서늘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이제는 꼬마애가 크래커로 저에게 지표를 제공해 주지도 않으니까 제가 스스로 저의 랜드 마크를 심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런 과정들을 어떤 함축적인 내러티브로서 보여주고 있는 작업이에요.
이건 여담인데, 작은 버선에서부터 큰 버선까지 신고 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미술잡지에서 이 작업에 대해서 글을 썼던 게 기억이 나서요. 그 글 도입부에 쓰였던 일화인데, 제가 대전에서 전시하고 있을 때 어린학생들, 초등학교도 안 된 오누이가 와서 보고 있는데 여자동생이 오빠에게 묻더래요. ‘저 사람 아까는 자꾸 버선, 양말을 신더니 왜 이제 벗어?’ 그랬더니 오빠가 ‘아까는 너무 추워서 양말을 신은 거고 이제 더워져서 안 추워서 벗는 거야’ 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더래요. 저는 그 상황에서 없었고, 글 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간접적으로 그 기사에 대해 들었던 것이지만, 저한테는 이 작업에 대해 말한 사람들 중에 그 꼬마애가 제일 나았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했었던 것과 가장 흡사했었던 것 같고 어떤 사학자나 영화평론가나 그런 사람들보다 더요. 근데 조금 그 친구랑 틀렸던 것은 제가 어떤 측면에선 비유적으로 춥기 때문에 여러 겹을 신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아직 춥지만 그래도 이젠 벗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벗었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비유적으로 얘길 하자면. 어떤 측면에서는 저의 어떤 내러티브가 있는 작업들이 기존의 친절한 기승전결식이라든지, 캐릭터가 서사의 전개를 이끌어 준다든지, 플롯이 익숙한 스토리 텔링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어떤 파편들을 가지고 관객들이 이어나가면 주관적인 내러티브를 생성할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서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미술이라는 영역에서 미술관에 오는 뷰어들은 한편의 작품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특히 이런 작업들을 보았을 때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오히려 그 꼬마애가 했었던 비유가 저한테는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거죠.
이것은 전시중인 작품인데. 지금은 DVD상으로는 <별일 없지? Ⅰ, Ⅱ>가 분리되어 있거든요. 이 작업이 원래 여기서 나오는 거고, 조금 있다가 보실 <별일 없지? Ⅱ>가 반대편 모니터에서 나오는 작업이에요. 아까 크래커라는 작업이 좌우로 투 채널이 동시에 상영되게끔 되어있다면 이 <별일 없지?>라는 작업은 앞뒤로 상영이 되게끔 되어있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보기가 어렵죠. 채널1을 보고 있을 땐 채널2를 볼 수 없고요, 채널2를 보고 있을 땐 채널1를 볼 수 없게끔 되어있는 작품이에요. 이것에 내러티브가 있다면 저 여자가 서울근교의 황량한 곳을 걸어 다니며 쓰레기들을 줍고 다녀요. 대체로 다 깨져서 쓸모없어진 것들이고요. 그런데 대체로 쓸모없어서 버려져 있는 것들은 날카로운 단서들을 가지고 있어요. 부드러웠던 유리잔이 깨지면 날카로움을 가진다던지. 그리고 저 여자가 저런 쓰레기를 줍고 다닐 때마다 신체의 일부가 없어져요. GIVE AND TAKE로 저 거울 조각을 하나 갖고 발하나가 없어져요. 그 날카로움을 하나씩 가지고 갈 때마다 사운드트랙이 하나씩 증가해요. 채널2에서는 저기서 버려졌던 것들의 온전했을 때의 모습들이 나타나요. 신체들이 절단되어 나가는 거니까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일부러 굉장히 그로테스크하지 않게 건조하게 자기신체가 절단되어 나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연출했고요.
마지막 엔딩 신을 보면 대사가 나오는데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나와요. 계기는 저희엄마의 안부 전화인데요. 대부분 부모님이 그렇듯이 꿈자리가 사나우면 전화하시잖아요. 그래서 엄마께서 전화 와서는 꿈자리가 안 좋아서 그런다고 별일 없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꿈에서 제 눈 한쪽이 빠졌데요. 저는 또 황당하게도 어느 쪽 눈이 빠졌냐고 그랬더니 왼쪽 눈이 빠졌데요. 그런 실제 황당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찰나에서 출발이 됐었던 작업이에요. 여러분들도 부모님들이 안부전화를 하시면 별일 없다고 하지만, 사실 별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별일이 있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다는 게 아니라, 사는 게 별일이죠. 신체가 다 붙어있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고, 주변사람에게 티낼 수도 없고...어쩌면 온전해 보이지만 이미 지금도 절단이 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거든요. 비유적으로요. 저렇게 별일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절단된 어떤 개체나 쓸모없어져서 날카로움을 가지고 널브러져있는 오브제들을 하나의 동격체로 본 것이고요. 그래서 걔네들의 노래들이 나오는 거예요. 아까 주었던 오브제들의 사운드 이펙트를 가지고 저런 리듬들을 만든 거예요. 어쩌면 약간 애니메이션 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개념적으론 채널2보다 이게 저에게 더 현실적인 트랙이고요. 왜냐면 실제 느끼는 것들이고 채널2에선 버려졌던 오브제들의 꿈, 그들의 분노 같은 것들이 맞은편의 채널에서 보여 지고 있어요. 사운드트랙에 나왔었던 단절된 파편의 음소들이 잘려져 있었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 음소들이 오브제들의 소리들과 같이 계속적으로 나왔었던 거죠. 두 트랙의 상영시간이 똑같고, 동시에 상영되어서 사운드들이 혼재해 같이 들리게끔 연출되어 있는 거고요. 예를 들어 지금 보시는 채널2의 장면이 아까 채널 1에서 주웠던 와인잔 인거죠. 이것도 거울조각에서 비롯된 거고요.

김준기 : 사운드도 대체로 스스로 만들어 쓰시나요?

박화영 : 네.

김준기 : 작업시간 무지 많이 걸리시겠네요.

박화영 : 요 작업 같은 경우는 짧은 편이죠. 이거는 아까 프레임들 지우는 것들 때문에 노가다가 많았던 작업이고요. 뭐 <크래커>나 <소리> 작업 같은 경우는 다 1년 넘게 걸렸고요. 이건 비교적 짧은 편이죠, 다른 작업들에 비해.
투 채널이 굉장히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유기적인 작품이에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으니까 <드라이브>까지만 보죠. 재작년 말쯤에 일주아트하우스에서 했던 작품인데요, 밑에서 보면 드라이브에요. 많은 작업들이 그렇듯이 참 다큐멘트하기가 힘들어요. 일주에서 전시했을 때는 지금 제가 떠드는 흑백채널이 가운데채널이었고요, 왼쪽에 피아노 청소하는 거랑, 오른쪽 위에 드라이브하는 것들은 좌우채널로 나오고 있었어요. 오른쪽 밑에 핀 가지고 노는 아이는 소형모니터에서 말하는 애 반대쪽에서 상영이 되고 있었어요. 그걸 지금 보기 쉽게끔 ‘밭 전(田)’자 모양으로 편집해 놓은 작업이고요,
첫 번째 채널에서는 제가 가상의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버려진 피아노에 대한 그것을 어떻게 습득을 했고 그것에 대한 단상들을 마치 인터뷰어가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가상의 인터뷰를 하고 있고요. 두 번째 드라이브하는 채널은 저 버려진 피아노를 소형자동차 뒤에 싣고 다니는 거예요. 저 범퍼에 의해서 실제로 피아노가 연주가 되요. 망치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것을 튕겨요. 그래서 두 번째 채널에서는 이미 분해를 해서 차에 실었어요. 집에 와서 그것을 분해를 해보니까 운전하고 다니면서 달리던 피아노인거죠. 세 번째는 그것을 어렵게 집으로 들고 와서 먼지를 터는 장면이에요. 먼지를 털면서 연주를 하고 있는 거죠. 털면서 저게 연주가 되니까요. 저 피아노가 잠실의 재개발단지에서 사람들이 철거되면서 버리고 갔었던 피아노거든요. 그러니까 저게 30여년 된 피아노에요. 그래서 저 안에서 별게 다 나오는데, 70년대 10원짜리하며 저런 애들 종이인형, 두통약껍데기, 엄청난 먼지, 단추, 머리카락들이 저 피아노 안에 들어있었던 거죠. 3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그 틈새에 들어갔었던 것들이죠. 발견되었던 것을 단서로 오른쪽 밑에 가상의 에피소드를 만든 거예요. 원래 전시장에선 오른쪽 밑에 작업 같은 경우 헤드폰으로 나레이션이 따로 있어요. 꼬마애가 어떻게 해서 그런 물건들을 피아노안에 넣게 되었는지 그런 경위를 가상의 시나리오를 써서 가장 영화적으로 오른쪽 귀퉁이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어떤 버려진 피아노를 매개로 굉장히 다른 네 작품의 동시상영인거죠. 특히 오른쪽 밑의 채널을 제외한 3개의 채널은 사운드 믹싱을 같이 해서 굉장히 입체적인 사운드가 되게끔 만들었어요. 말하자면 스테레오가 3개니까 6채널 작업인거거든요. 지금 상태에선 느낄 수 없지만, 공간적으로 저런 말소리라든지 피아노 소리가 입체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사운드로서 연출할 수 있도록 만든 작업이에요. 전 개인적으로 많은 저의 작업들이 사운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업 같은 경우엔 더욱 더 음악적인 작업이었어요.
이 작업 같은 경우, 주제적인 측면에서 아까 <크래커>라는 작업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측면에선 한 개인이 지금 서울에서 산다는 것, 말하자면 <별일 없지?>에서처럼 버려진 오브제들에 개체를 투입시켰던 것처럼 연주의 개념이 상실된 피아노를 저 나름대로 연주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 작업이에요. 결국 이 작업에선 미디어로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편집을 한 작업입니다.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김준기 : 오늘 초청패널 두 분 계신데 평론가 고충환 선생님과 실험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박동현 선생님입니다. 일단 박수 부탁드립니다. 고충환 선생님 오늘 보신 것에 관해 총괄적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고충환 : 글쎄요. 김창겸씨 작업 같은 경우는 그 전부터 봐와서 약간 맥이 잡혀있는 그런 부분이 있는데 박화영씨 작품은 간헐적으로 봐가지고 오늘 오히려 결과적으로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김창겸씨 작업은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과 다큐멘터리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은 그야말로 사물의 있음과 없음, 실제와 영상의 이미지, 그래서 그것의 실체, 경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런 부분이 단순히 개별적으로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대한 인식 구조가 개념적인 전개만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라든지 서사와 믹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개인적인 서사를 이야기한 도구로서 그런 방법론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아마 광장이라는 인식, 일종의 사회적인 풍경을 다방이라는 개념으로 압축시켜 놓은 상직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화영씨 같은 경우는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는 그런데, 굉장히 부분적인 이야기가 되겠죠. 그건 박화영씨가 말을 거는 방식이 아니라 박화영씨 작업을 보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적으로 이렇게 어필되는 개념들이 다분히 신체성, 동물성, 육식성, 이런 개념들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내러티브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덴티티라고 그러죠. 그게 하나의 메인스트림으로 이루어진 걸, 토마스 쿤이 이야기합니다. 패러다임이 일관되게 연속되어 서로 분리가 불가능한 부분들이 있다고요. 사실, 어떤 굉장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서사라는 말은 상징적인 연결고리인, 상징을 위해서 제시하는 상황이나 오브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죠. 바깥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객관화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구멍들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게 하나의 그럴듯한 말로는 암시성이 풍부하고요. 그게 일관된 서사로 연결되어 질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에 노출되어 있는 거죠. 제가 박화영씨 작업을 일관적으로 꿰차고 있는 것이 약간은 약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준기 : 저도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거든요. 관람객입장에서 느끼는 부분을 다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전에 말씀하신 부분이, 그래서 김창겸의 서사와 박화영의 서사가 지닌 차이점도 좀 있다가 얘기될 수 있을 것 같고요. 아주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동현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박동현 : 두 분 작품 재미있게 잘 봤고요. 일단 영화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두 분 다 극영화의 방식보다는 다큐멘터리방식을 사용하고 계시고요. 서사라고 얘기했을 때, 소설적 서사가 아닌 에세이적인 서사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전 뮤지움 토크에서의 김창겸씨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그렇고요. 모르겠어요, 이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일수도 있다는 거죠. 개인적 경험을 조금 더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풀어내고 있어요. 그런데 박화영씨 같은 경우는 개인적 경험을 아주 개인적인 시선으로 내면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였다는 생각이 들고요. 보다 보면 재미있는 게, 일상적으로 영화라는 것을 바라볼 때 항상 그 영화들은 겉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보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영화와 조금 다른 미술관에서 보여 지는 영상작업은 그 작업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얘기되어지는 것이 많다고 생각되거든요. 만약에 아까 김창겸 선생님 같은 다방 다큐멘터리경우, 거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의 방식을 채택하셨는데, 제가 아까 극장에서 상영하셨냐고 여쭈어 봤던 게, 만약 극장에서 상영했다면 그야말로 다큐멘터리였을 텐데 여기서 상영을 하게 되니까 다른 것과 같이 상영을 하니까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극장에서 본다면 더 긴 폼으로 보여 줬을 텐데 여기서 보니까 그 짧은 순간에 보더라도 굉장히 길다는 느낌도 어떤 면에서 들고요. 간단하게 그 정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김준기 : 사실은 김창겸 작가가 서사를 도입한 것이 재작년 2003년 전시였고, 그전에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 않았죠, 대체적으로는?

김창겸 : 이전에 편지작업에서부터 내러티브를 강조했죠.

김준기 : 그즈음부터. 서사를 쓰느냐 안 쓰느냐가. 영상작업을 하면서도 서사를 안 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박화영 선생님 같은 경우에 내러티브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사구조, 문학적 구조로 이해하면 어떻게 보면 답이 안나오는 것 같아요. 아까 암시성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그 암시하고 있는 것들이 워낙 독특한 구조의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낯선 구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 이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더욱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작가가 오면 꼭 한번 얘기를 해 봐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짧게나마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영화적 시각에서 볼 때 박화영 작가의 서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추가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박동현 : 글쎄, 사실 저도 전통적인 영화가 아니라 실험적인 영화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흔히 우리가 상징체계라고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문학적인 상징체계를 많이 하거든요. 문학적 상징체계라는 것은 우리가 소설이라는 데서 예를 들면 귤이라는 것이 먹으면 시다는 것이 문학적 상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비주얼적 상징으로 봤을 때는 오렌지색, 공으로 치환될 수 도 있고 그런 연관적인 상상력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사실은 실험영화가 바라보고 있는 비주얼상징에 대한 접근이라고 보여 지거든요. 그리고 그런 상징성들을 차용을 해오는 거고요. 그런데 박화영 작가의 작품 같은 경우는 그런 쪽도 아닌 것 같고 굉장히 개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소통을 하고 싶은 사람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근데 저는 오히려 소통을 안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굳이 왜 소통을 하려고 생각을 할까. 자꾸 그런 마음을 갖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랑 더 멀어지려는 것이 아닐까. 물론 박작가님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일반적으로 뭔가 소통을 하려고 했을 때 자꾸 자기중심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소통에 의해 실제 중심에 가지고 있던 것을 까먹어버리거든요.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그 소설적인 내러티브구조가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박작가님 같은 경우 상당히 자기 안쪽을 파고들려고 하는 느낌이 굉장히 좋았었는데, 거기서 소통을 더 잘하고 싶어서 뭔가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신 것에 대해...

박화영 : 아니에요. 왜냐면은 역시 이게 언어의 괴리감이거든요.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능적인 말들, 예로 ‘밥 먹었어?’, ‘응 먹었어.’, ‘안 먹었어.’, ‘주식이 얼마나 올랐어?’, ‘응 얼마 올랐데.’ 이런 것들은 다 소통이 되는 거죠. 여기서 제가 얘기했던 소통은 그런 기능적인 소통은 아닌 거 것 같고요. 결국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을 더 얘기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개를 선택했겠죠. 실제로 소통을 원했던 거면 사람을 했을 수도 있던 것 같거든요.

박동현 : 그런데 사실은 박화영 선생님작품을 제대로 사운드까지 들어가며 본 것은 여기 전시되고 있는 작품 이외에는 본적이 없어가지고요. 그 내용까지 다 전달받았으면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준기 : 보통 한 작가를 보면 주제의식이랄지 작업방법, 매체라 할지 이런 것들을 일관성 있게 가져가는 편이잖아요. 그랬을 때 김창겸 선생님같은 경우에 실재와 비실재, 물질과 영상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 소재로 탐색을 해오다가 아까 2003년 편지작업부터 내러티브를 도입하신 거죠.

김창겸 : 98년도에 텍스트만 무척 강한 작업이 있었어요. 근데 항상 텍스트만 쓰고 나면 다시 보면 지루하잖아요. 재미있는 소설책도 몇 번 보면 지루하고, 영화도 그렇고요. 내러티브의 단점이 한번 그것을 다 읽혀지고 나면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없앴다가 다시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끄집어냈다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제가 보니까요.

김준기 : 그 과정에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볼 수 있는데 좀 전에 말씀하신 것, 박작가님 같은 경우에 ‘내면을 흡입하거나 이런 식이다’라는 것 속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봐서 본인의 일관성이라 할지 이런 것을 우리가 읽어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박화영 : 컨텐츠내용적인 일관적 전개를 말씀하시나요?

김준기 : 서사의 방향, 지향들 이런 것 있잖아요.

박화영 : 그런데 그게 내용적으로 나타나지 형식적으론 잘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나마 요즘 어떤 비디오전시들이 기획되니까 미디어작업들 위주로 많이 알려진 거지. 혹시 여기서 보신 분들은 없을 것 같은데 작년 말 같은 경우는 정미소에서 멀티미디어공연을 했었거든요. 퍼포먼스도 하고요. 저는 하나의 토탈 작가라고 생각하지 비디오아티스트나 페인터라거나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요.

김준기 : 아니요. 그 방향은 아니고요. 예를 들면 본인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자기안의 풍경을 끄집어내는데 다른 작가들의 경우처럼 압축시켜서 ‘저 작가는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볼 수 있겠는지 그런 질문을 해본 것이거든요. 오히려 어쩌면 다른 분들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충환 : 글쎄요. 제가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박화영씨 작업을 보면서 마치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과거 속으로 몰려 들어가는 계기가 마들레이드라는 과자잖아요. 그런 과자의 어떤 향기라든지 맛이라든지, 소리, 그런 굉장히 감각적인 굉장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그래서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전 그렇게 보거든요. 마들레드 같은 과자의 맛이 대동소이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이렇게 공감할 수는 있어도 공유할 수는 없는 디테일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고 전 생각해요. 더욱이 그게 계기가 되어져서 과거로 소급이 되었다든지 할 땐 더욱이 그렇죠. 어떤 개인적인 개인사가 틀리기 때문에. 그래서 마치 의식의 흐름기법, 아니면 미미한 감각적 단서가 개인의 정체성을 다시 환기시키고 만들고 하는듯한 느낌들을 많이 받았어요.
박화영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획일적이고 일관된 서사에 대한 회의에 바탕에 두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일관적 서사를 강요해 오는 것은 폭력이라고까지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서 굉장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서사까지 가게 된 계기가 굉장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강박적인 계기. 이런데서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계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아까 우스갯소리로 개도 이야기를 했지만요.

김준기 : 영상추상작업은 혹시 안 해보셨어요?

박화영 : 영상추상작업이요? 영상추상작업이 뭐예요?

김준기 : 있어요.

박화영 : 약간 옵티컬하고 키네틱한 그럼 작업?

김준기 : 영상자체만으로 작업을 해서 구체적인 영상이나 내러티브는 하나도 없는 거죠.

박화영 : 그래픽한 작품 말씀이신가요?

김준기 : 네. 계속 그것만 가지고 1시간 분량을 만들어서 브레인팩토리에서 전시를 하는 한 작가가 있더라고요. 만약에 영상작가들이 회화영역에서 하듯이 추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도전을 해 본다면 어떨까 해서요. 박작가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박화영 : 그럴 생각은 없고요. 그러면 저도 회화과를 다니다가 페인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학교 다닐 때부터 거의 안했던 것 같거든요. 추상작업은 더더욱 없었던 것 같고요. 페인팅을 하더라도 함축적인 서사는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고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면 말로 했을 텐데 말이죠. 근데 그게 어떤 그래픽한 추상성이랑은 구분되는 거죠. 그건 언어를 배제시키는 거고 이건 언어의 한계성을 안고 또 다른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미련한 짓을 하는 게 제 작업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김준기 : 그렇다면 결국 이 전시제목이 가지고 있는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것이 문학적 내러티브로부터 발생한 것에 다 의존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것이 문학적인 내러티브와 다른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었고요. 왜냐면 이 전시가 리뷰전시니까 작가들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말이죠.
결국 그런 것 같아요.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은 붓을 드는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어떤 형상, 서사구조에 의지할 확률이 높거든요. 제가 좀 전에 얘를 든 어떤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찍어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거든요. 대개 문학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그런 과정인데, 그렇다면 ‘모든 단채널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서사구조를 전제로 작업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문학적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출발을 했거든요. 그래서 여쭤본 거였는데. 실험영화 장에서는 어떻게 극영화와 서사의 문제를 바라보시는지요.

박동현 : 문학적 내러티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그런 시도는 무척 많았어요. 근데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것 자체가 문학하고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게 추상적인 음악들은 틀리겠죠. 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을 때 시간은 이거 다음에 뭐가 나오고, 이거 다음에 뭐가 나온다는 연속성이 있는 거죠. 근데 그 전에 회화라든가 전통적인 영역에서 보았을 때, 그건 시간성을 완전 배제한 순간에 담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연속성의 속성을 생각했을 때, 어떤 식으로 연관을 지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생겨나는 거죠. 그런 것들이 기존의 것들에서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차용을 처음 해놓았다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보는데 잘 안 찾아지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음악에서 시간성을, 아니면 무용에서 시간성을 차용해오고 이런 식의 작업들은 굉장히 많았었어요.
어쨌든 제가 생각했을 때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 실험영화 쪽에서 생각하는 시각적 언어라는 것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기보다는 조금 더 문학적인 것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냐 하면 아까 말씀하신 귤이 공으로 치환될 수도 있고, 이런 것들이 실험영화 쪽에서 만들어내서 새로운 시각적 서사고, 그것들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관성을 가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판단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내러티브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조해 나간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두 분 같은 경우, 오브제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이라든가 서사들을 중심에 두고, 그 다음에 나머지 것들을 펼쳐나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두 분의 작업들 같은 경우 실험영화 쪽에서 많이 있어왔고. 특히 아까 <비상>이라는 작품 같은 경우 실험영화 쪽에서 많이 하는 작업들 몇 개 부분에 같이 부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옛날에 한 실험영화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최초로 오브젝트를 필름 위에 붙여서 만들었었어요. 근데 그런 작품들을 연상시켜서 재미있게 봤어요. 그게 루핑이죠.

박화영 : 네. 다신 안할 거예요. 그런 작업은요. 두께가 있으니까 오래 못 돌거든요. 거의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그 조그만 것을, 전시할 때 끊어지면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고, 절대 다신 안할 거예요.(웃음)

박동현 : 근데 보통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거를 옵티컬 프린팅 같은 걸로 프린트해서 하잖아요.

박화영 : 프린트를 하죠. 근데 갤러리라는 맥락에선 이게 하나의 오브제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개념이 틀린 거죠. 그러니까 다신 하지 말아야죠.

김준기 : 여기서 언제든지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어떠세요? 영화인이시면서 갤러리도 하시고? 이번 전시 두 분 작품들 어떠신지.

이장욱 : 개인적으론 아주 재미있게 봤고요. 개인적인 경험인데 저 같은 경우 독립영화, 실험영화 쪽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하면 끝나고 작가와의 대화 같은 프로그램을 할 때 반응이 매우 격렬하거든요. 이런 걸 왜 찍었냐 등등 해서요. 그런 어떤 거친 반응들이 많이 나오는데, 다르게 생각해서 그걸 갤러리에 틀어 놨을 때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하는 걸 생각할 때는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김준기 : 어떻게 달랐을 것 같아요?

이장욱 : 제가 생각할 때는 미술관에서는 부정적으로 얘기하자면 권위라는 것들이 전제되고 있는 것 같고요. 공간이 갖는 것 말이죠. 아까 작가분이 말씀하셨듯이 어린 친구의 반응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하셨잖아요. 어른들 같은 경우는 미술관에 가서 작품이 싫으면 나올 순 있는데 반응을 보이긴 쉽지 않거든요. 근데 극장문화라는 것은 굉장히 혼재되어 있는 문화이기 때문에 어떤 기대치를 갖고 오는 층이 다르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격렬한 반응들이 들어와서 혼재해 있는 재미있는 공간인데, 미술관 같은 경우는 전통적이라는 것 이전에 그 작품들에서 많은 것들을 확장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반응이라는 것이 아직도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드네요. 근데 이런 작품들 같은 경우에 보면 저 같은 경우도 왜 이걸 2채널로 해야 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박화영 : 예, 말씀하시죠.

이장욱 : 그런 소통이라는 것들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나에 해답은 없는데, 그게 극장문화와 연결되면 좀더 아무 얘기라도 활발하게 나누게 되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준기 : 네,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중요한 지적인 거 같아요. 왜냐하면 다들 이 미술작품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상당히 꺼려하죠. 대체로 이제 미술 쪽에서 비평문화라고 하는 것이 그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영화계는 더 아무래도 산업이다 보니까 더 심하게 산업의 논리로 비평이 가는데요. 미술 쪽 같은 경우도 아직 비평의 입장, 특히나 관람객의 입장이 그 작품에서 자기가 소통이 단절되는 지점에서 그건 자기가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접근을 하는 것이죠. 아마 그런 지적을 해 주신 것 같은데요. 아마 이 미술문화가 전시를 본다는 문화가 층이 쌓이면 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이런 자리가 그런 것을 준비하는 자리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고충환 : 글쎄 저는 어떤 소통이 잘 안 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것 있잖아요. 소통이 안 되는 그걸 작가가 이야기 하고 싶을 것 아니에요. 그럼 제대로 소통이 아닌가, 그것도 소통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예를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낯설게 하기, 그것이 지금이야 노출이 되었고 심지어 오용이 되기도 하지만 예전엔 낯설게 하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국 소통불능상태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니냐는 거죠. 이게 만약에 관객에게 어필되었다면 제대로 이야기 된 것 아닌가하는 것이고요.

김준기 : 예. 그런 경우도 있겠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고충환 : 그래서 오히려 문제는 소통이 된다, 안 된다는 것보다도 소통불능상태, 소통단절상태를 이것을 체험하게 해주는 방법이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거나 아니면 실존적이고 무거운, 가벼운 이런 것들이 나와질 수 있지 않느냐는 거죠. 지금 현대미술 현대예술에서 소통불능상태와 같이 그런 차이에 대한 인식은 의외로 많은 작가들이 자기 통첩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박동현 : 소통불능도 소통불능이지만, 소통불능이라는 문화는 소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굉장히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능이라는 것은 하고 싶었는데 못하는 경우인 때가 많은데, 실제로 소통을 하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알아주는 사람만 알아주면 좋겠다는 식의 좀 다른 소통인 것 같거든요. 대중적 소통이냐 아니면 알아줘도 상관없고 안 알아줘도 좋다는 굉장히 소극적인 소통이냐는 거죠. 소극적인 소통은 어떤 면에서는 소통하기 싫어한다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고충환 : 그렇죠. 그런 것도 그게 하나의 물질적인 비주얼적인 형식을 얻었을 때 그런 것들이 다 수용이 되어야죠. 다 이야기가 되어야죠.

김준기 : 이미 만인이 대중들이 다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위 예술로서의 기능이나 소임을 다한 것이겠죠. 작가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기존에 있던 것들도 다시 읽어주고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예술가들이니까요. 영화나 대중적 시각들과는 다른 어떤 것을 계속 찾아나가는 과정에 예술가들이 있는 거고 거기에서 소통의 가능성, 소통의 정도 이런 것을 계속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창동 스튜디오의 프로그래머이신 조주연 선생님이 오셨는데, 작가들이 새로 많이 바뀌었나요? 언제 바뀌는 타임이죠?

조주연 : 예, 지금 다 바뀌었어요.

김준기 : 영상작업하시는 작가도 계시나요?

조주연 : 예, 별로 많진 않아요. 김창겸 선생님은 작년 2기에 저희 스튜디오에 계셨었죠.
김준기 : 한꺼번에 여러 작가들을 매일매일 접하시잖아요. 영상 작업하는 작가들이요. 만들거나 그리거나 깎거나 하는 사름들하고는 어떠한 느낌이신지. 돌발질문하나 던지겠습니다.

조주연 : 그 질문에 대해선 제가 뭐라고 잘 말씀을 못 드리겠고요. 저는 일단 이 전시는 영화와 미술의 만남이 주제잖아요. 사실 관심이 많았어요. 꼭 영화와 미술뿐 아니라 학제 간에 그런 결합하는 것이 많은데, 실질적으로 어떻게 미술이라는 영역이 문화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궁금해요. 그런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이런 전시가 다른 분야와 시리즈로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준기 : 안 그래도 미술과 수학 준비하고 있는데. 재미있잖아요. 그렇지요? 처음 미술과 영화 얘기가 나왔을 때 그게 영화적 요소를 소재 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주제의식으로 많이 틀려고 의도적으로 했었거든요. 영화를 차용한 그림들 그런 것들은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그랬고요. 물론 장단점이 있겠죠. 소재를 살리느냐 주제를 살리느냐. 어떠세요. 아까 저기 질문한 것에 별로 답이 없는데 소위 두 분 다 영상작업하시는 분들인데 시각 예술가들이 일반적인 전통적인 매체를 쓰는 사람들과 다른 작업양태라 할지 삶의 태도라 할지 그런 것들을, 작가라는 삶의 주체로 보았을 때 어떠실지.

박화영 : 창고가 필요 없어요.(웃음)

김준기 : 엄청나게 커요. 왜냐하면 덩어리 만드는 작가들은 그게 쌓여가지고 그것을 주체를 못해서 인간적인 존재론적 회의에까지 이르고 포기하거나, 그게 엄청나게 큰 문제거든요.

박화영 :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얘기했을 때, ‘창고가 없어서 편해요’라는 얘기도 되지만 창고를 유지를 못하고요. 경제적 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런 어떤 주제와 맞닿아서 물성이 없는 것들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아요.
사운드라든지. 어떤 데이터로만 남아있고 만질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작업에서도 보여 지듯이 죽음에 대한 것들이라든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관심이 더 많아서 그럴 수도 있을 테고요. 일단은 제가 죽은 다음에 돌 같은 것에 새겨줘서 남겨져 있다는 것이 괴로워요. 제가 생각을 할 때는요. 그래서 큐레이터분이나 어떤 사람들이 작업실 방문하겠다고 그러면 굉장히 난감해요. 저의 작업실에 오시면 작업이 하나도 없거든요. 벽에 그림도 하나 없고요. 그냥 집이에요. 개 한 마리가 털을 날리면서 왔다 갔다 하고요. 왜냐하면 스튜디오베이스에 대한 기대치가 있잖아요. ‘작품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어떠한 식의 것들을 꺼내놓고 있거나 작업과정을 보여 준다든지요. 작업과정을 보여줄 것도 없고요. 근데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럴 거예요. 자기작품하고나면 시간 지나면 대게 괴롭잖아요. 그거 보면요. 그래서 어떤 데이터로서 갖고 있을 필요성은 있지만 지금도 발표하면서도 살을 뜯고 싶잖아요. 내가 왜 저 작업을 저렇게 했을까 하고요.

김준기 : 김 선생님은 어떠세요?

김창겸 : 저는 심리적으로 그런 변화는 없어요. 그런데 생활은 많이 변하더라고요. 전에 돌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죽을 뻔했었어요. 15톤이 위에서 딱 떨어지는데, 트럭이 15미터 되는 컨테이너트럭인데 그 위로 돌이 떨어져서 트럭이 푹 파였어요. 그러니까 트럭이 바퀴가 들렸어요. 그 돌 위력이 대단한데, 영상에서는 현실적으로 나를 죽일 정도로 나를 압박하진 않지만 대신 눈이 나빠지더라고요. 컴퓨터를 많이 봐서요. 그러니까 직업병이 틀려진 거죠. 돌 할 때는 직업병이 허리 다치고, 다리 다치고, 부러지고 이런 건데 지금은 눈이 나빠지고 그런 거죠. 그리고 촬영 할 때도 있지만 편집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편집할 땐 거의 움직이진 않으니까 운동량 하루 몇 발자국. 직업병이 틀려졌어요. 그래서 살도 찌고 그래요.

김준기 : 우리가 비주얼 내러티브라는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다보니 갑자기 지금의 대화로 인해 굉장히 밝아졌어요.(웃음)

김창겸 : 사실은 뭐 전통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과 박화영 선생님과 같이 완전히 디지털로 작업하는 사람의 중간형태를 취하죠. 조금은 틀린 것 같아요. 저는 작업실이 필요로 해요. 작업실 없이 집에서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작업실이 좀 필요한 입장이니까.

김준기 : 93년 이때면 대학 갓 졸업하자마자 영상작업을 했잖아요. 학교 다니면서도 그게 가능했나요, 그 때?

박화영 : 음, 아니요. 비디오수업 같은 건 학교에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요. 영상수업은 있었는데 비디오수업은 아니었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것, 필??
2005/02/06 22:53 2005/02/06 22:53

뮤지움토크 1 녹취록 : 강홍구, 김세진 + 성완경, 김계중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1/27 16:31


시각서사 뮤지움토크 1 녹취록 : 강홍구, 김세진 + 성완경, 김계중

작가 : 강홍구, 김세진
초청패널 : 미술평론가 성완경, 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 프로그래머 김계중
2005.1.15( 토) 오후3시, 사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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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 안녕하세요. 시각서사 뮤지엄 토크의 사회자 김준기입니다. 뮤지엄 토크는 일단 작가 두 분의 프레젠테이션을 간단하게 듣고, 이번 전시와 관련하여 두 분 작품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미술과 영화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패널 분들과 이번 전시를 관람하신 관람객여러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강홍구 선생님부터 먼저 시작해주세요.

강홍구 : 예, 강홍구입니다. 제가 했던 것은 주로 꽤 오래된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대체로 96년에 한 게 굉장히 많고요. 실제사진과 결합을 시켰거나 혹은 다른 사진과 결합시켜서 작업을 하고요. 이 경우에는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과 다음, 주차장사진은 제가 찍었던 것을 짬뽕으로 만들었어요. 그때도 그랬습니다마는 지금 봐도 포토샵으로 적당히 조작한 티가 나죠. 저렇게 똑같은 패턴이 연속되어 있는 것하며 그리고 저 얼굴만 본인입니다. 다음, 역시 비슷한 거죠. 이것도 실제 사진과 붙인 건데 저 뒤에 배경은 인천 월미도입니다. 월미도를 갔었는데 저 앞쪽에 있던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는 저게 너무 황당무계하고 (웃음) 그것 참 웃긴다고 생각해서 표현해 본 것입니다. 다음, 이것 역시 저수지의 개들의 장면을 복사해놓은 것이고 전부다 제 얼굴이고 똑같은 겁니다. 다음도 마찬가지로, 저수지의 개들 첫 장면이고 옐로, 화이트, 퍼플 이런 친구들이 쭉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저건 제 얼굴을 일부러 다른 사람들 얼굴에 모두 합성해 본 것입니다. 뭐 다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도 있었고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이 들어있었죠. 이제 보니까 스미스 요원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만.(웃음) 이것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파리의 미국인이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저 얼굴은 저 아주 젊었을 때 얼굴입니다. 이제 보니까 리마리오 약간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요.(웃음) 다음, 이것은 브로컨 애로우의 한 장면이네요. 저것은 존 트라볼타입니다. 참고로 존 트라볼타하고 저하고 아마 나이가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독립영화 인디 다큐의 한 장면이었고 원래는 티비라는 전시를 누군가 기획해서 있었었는데 오래전 일이었습니다만. 그때 냈던 작품이죠. 그러니까 철거촌 배경으로 도망가는 장면이었고 그렇게 해서 이건 도망자라고해서 시리즈로 몇 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뒤의 것은 역시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의 한 장면입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저 영화 스틸사진은 오현경씨가 찍었더라고요. 그리고 이것은 잡지에서 카피한 사진입니다. 저 뒤에 그 때가 91년도에 일어났던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다음, 이것은 어느 잡지에서 따온 공동묘지 사진이었습니다. 실제로 다 남의 사진, 영화부터 시작해서 가져와서 그걸 모아 놨던 거죠. 다음, 이것은 어느 자동차광고사진이었습니다. 아마 에어백을 강조하려고 했던 광고사진이었습니다. 다음, 이건 역시 아까 봤던 꽃잎이고요, 그리고 저 앞에 달리는 인물은 영화 ‘북극선 으로 진로를 돌려라‘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입니다. 다음 꺼요. 이것은 영화장면 비슷해 보이는 시리즈였습니다. 행복한 우리 집이라는 시리즈 작품입니다. 뒤에 나와 있는 것은 광고사진이고 앞에 불난 것은 역시 짜깁기해서 만든 것으로, 아마 전쟁장면에서 따와서 연기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다음, 이건 역시 의류광고사진의 일부와 돈뭉치와 기타 등등 다 결합시켜놓은 것이었습니다. 역시 행복한 우리 집 연작이었습니다. 이 장면도 역시 외국 인테리어 잡지와 그 다음에 어떤 폭력적 영화를 결합시켜 놓은 것입니다. 저쪽에는 지금 딸내미를 손으로 이렇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입니다. 다음, 이 작품 역시 두개의 광고사진을 결합입니다. 저 뒤에 있는 침대는 침대 광고 사진이었고요. 앞에 있는 발은 향수 광고 사진입니다. 원래는 발을 저렇게 들고 남자한테 키스하는 장면이었습니다만, 물론 쓰이는 곳은 달랐죠. 다음, 역시 이것은 잡지에서 따온 사진입니다. 욕실장면이고 저 뒤의 박쥐는 아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따온 것 같아요. 다음, 이것은 영화와 관계없이 하나 만든 것입니다. 저 뒤의 개집은 제가 그냥 찍은 거고 저 뒤의 자화상도 제가 그냥 찍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두개의 영화가 짬뽕되었었던 것 같네요. 저 뒤에 배경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리고 앞 쪽 장면은 ’총잡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영화는 굉장히 재미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은 두 장면을 결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 뭐였더라... 불길한 예감이었던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던가 그렇습니다. 다음, 이것은 레옹이었습니다. 저 뒤에 배경은 신촌입니다. 이대앞이고요, 인물들은 보시는 바와 같이 레옹과 마틸다입니다.

김준기 : ‘레옹’인물이 작가본인으로 바뀌신 건 아닌가요?

강홍구 : 아니요. 작가본인은 아닙니다. 원래 레옹이고요. 다음 것은 여의도 관광엽서였습니다. 그리고 저 뒤의 부서진 비행기는 잡지에서 따왔던 이미지요. 그리고 저 뒤에 불나는 63빌딩은 만든 거고요. 그리고 911하고 아무 관계없죠. 97년쯤에 만들었으니까.

김준기 : 전 깜짝 놀랐네요,

강홍구 : 다음, 이것 역시 관광엽서 사진이었습니다. 이건 전쟁공포 연작이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재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스텔스기가 서울관광엽서 항공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다음, 이건 약간 에로틱버전이군요. 이건 헝가리영화였는데 기억이 안나요. 기억은 안 나고 왼쪽에 있는 저 얼굴도 제 얼굴입니다. 잘 안 믿기긴 합니다만.(웃음) 이것은 데니 보이드의 셀러브레이브의 한 장면입니다. 앞쪽의 얼굴은 물론 제 얼굴입니다. 다음, 이것은 이제 버전이 달라집니다. 영화버전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봤던 게 대체로 영화를 중심으로 한 버전인데. 그냥 몇 개만 참고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보니까 영화장면인지 실제장면인지 잘 구분이 안 가네요. 그냥 쭉 몇 개만 넘겨보죠. 기억은 나네요. 남해 상주해수욕장에서 찍었던 장면이고요. 이 때부터 스캐너를 버리고 디지털카메라를 무리를 해서 구입을 해서 디지털 카메라를 쓰기 시작했던 때에요.

김준기 : 그게 몇 년도 인가요?

강홍구 : 그때가...제가 99년에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샀거든요. 99년 말에. 그래서 2000년부터 21세기부터 쓰기 시작했던.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디지털카메라가 너무 고가여서 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때만 해도 이 카메라가 쿨픽스 990이었는데 이때도 거의 150만원이었으니까 굉장히 거금이었죠. 지금은 30만원도 안할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세트장에 가서 찍었던 역시 그 디지털카메라를 쓴 세트장입니다. 세트가 영화하고 약간 관련이 있기도 하겠네요. 다음 것은 세트는 아니지만 세트처럼 보이는 씬 입니다. 남해 하동이었던 것 같아요. 이것은 그 유명한 야인시대의 명백한 세트입니다. 동대문이고요. 이건 부산비엔날레의 부산물인, 부산에 가서 부산비엔날레에 가서 찍다가 하나 만든 겁니다. 해운대고. 저 갈치는 몰론 진짜 갈치이긴 하지만 가짜 상황입니다. 다음 이것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홍대 앞의 공터였습니다. 지금은 술집이나 고깃집만 잔뜩 들어섰지만요. 다음, 이것은 부천일대입니다.‘뱀닭’이라는 표지판은 물론 가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김준기 : 동네 이름이 어떻게 되죠?

강홍구 : 오세리 근처고요, 이것은 그 근처에 살 때 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강시민공원 연작이네요. 다음, 이것 역시 오세리 연작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찍은 것입니다. 네. 여기까지 작품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김준기 : 네, 대체로 이제 작업에 관해서 간략하게 보여주시고 프레젠테이션 해주셨는데 이후 진행될 대화에서 더욱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 김세진 작가 부탁드립니다.

김세진 : 저도 97년부터 비교작업을 시작해서 작업이 산발적으로 많아요. 일단 비디오작업이라서 강홍구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보여드릴 수는 없고요. 대체적으로 설명을 드린 다음에 몇 개 정도만 보여 드릴게요. 시간이 걸리니까. 다 보시려면 2시간정도 걸리거든요.
먼저 영상 스틸 사진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 작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업으로, 'REVERSE-되돌려진 시간'라는 작업인데 이건 좀 이따 보여 드릴게요. 98년도에 했던 작업이고요. 사물을 거꾸로 돌렸을 때 새롭게 나타나는 이미지에 대해서 6가지 채널로 만들었던 비디오 작업이에요. 다음, 제가 애초에 비디오 뉴미디어에 관한 관심 때문에 이런 형식적인 실험을 많이 했어요.
다음, 작업을 하다가 어떤 부분에서 내러티브라는 게 생기더라고요. 그러니까 보통 미술이라는 작업에 대해서 그냥 시각적인 이미지 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이 자꾸 보이니까 영화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게 됐죠. '이너뷰'라는 작업을 했고, 이것도 가족, 소통의 단절에 대한 이야기고요. 참고로, 여기 이분이 바로 강홍구 선생님이시거든요. 너무나 연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간곡한 청약에 의해서.(웃음) 이 작업에는 사운드가 없고요. 4가지 채널로 보여줘요. 빈 방,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데, 아빠와 딸, 같이 있을 때 어떤 동적인 그림이 생기고요, 각각 혼자 있게 되는 공간 아무것도 없게 되는 공간, 뭐 이런 단절에 관한 이야기죠. 사진처럼 보여주기를 원했던 비디오작업이고요.
이거는 ‘10 to 10'이라는 첫 번째 필름영화로 20분 정도의 길이에요. 소통에 관한 것을 그린 작품이고, 보여드려야 하는데 시간관계상 스틸 이미지로 대신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했던 게 ’기념사진‘이라는 작품이고요. 이 작업은 광주에서 처음으로 했던 작품이고요. 동영상작업을 계속하면서 정지영상, 사진처럼 보이게 한 작업이에요. 정지와 움직임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 물어봤던 작업이고 좀 있다 보실 거고요.
최근에 하고 있는 작품은 이 작업으로, 필름 작업이에요. 아직 완성은 못했어요. 1년 전에 시작한 작업인데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요즘에 하는 작업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순간적인 초현실적인 느낌을 기록해서 제가 연출하는 작업이에요. 아직 작업 중이고 제목은 ‘골드 모멘트’입니다.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데 상상 화된 이미지를 현실화시키는 시각작업이에요. 이것도 같은 시리즈고요. 이건 종이가 날리고 있는 장면이고요. 진행 중인 작업이에요. 그럼, 스틸 이미지 설명을 마치고 일단 ‘REVERSE-되돌려진 시간’을 보시겠습니다.(비디오 상영)

김준기 : 한 90년대 후반부터 지금 아까말씀하신 것처럼 스캐너로 작업하시다가 디카까지 해 오신 것을 살펴봤습니다. 두분 다 영상작업과 사진작업 즉, 시각서사라는 내용으로 꾸준하게 작업을 해 오신 분들이죠. 관련해서 오늘 초청패널 두 분께 말씀을 해 주시죠.

성완경 : 사실은 시각서사에서 서사라는 얘기를 하자면, 각각의 작가의 작품 속에 서사가 있거나 혹은 서사에 대한 관심이 작업으로 표현된 경우가 있습니다. 전시 전체의 기획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미술적인 화두의 그런 의미에의 서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리얼리즘 전시 때, 그와 꼭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리얼링’전 때는 작가들의 범위가 넓었지만, 이번에 하신 전시는 큐레이터 아이디어에 의해 선별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고 흥미가 있고 짜임새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번 쌈지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때 김세진씨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관객중의 한 사람이 영화에서의 서사와 소위 비디오 작업할 때의 서사는 좀 구별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서사문제에서 미술 특유의 서사에 형식이 있는 것처럼 모호한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얘기도 재미있는 주제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일단은 두 분 작품은 여러모로 흥미롭게 한 자리에서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대조가 되는 점을 느꼈는데 이를테면 강홍구씨의 작품은 외재적이고 시니컬한 것이라면 김세진씨 작업은 내재적이고 심리적이라는 것이죠. 김세진씨의 서사는 가끔은 연속극이나 상업적인 기존 대중문화를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뒤집는다는 의미에서는 한편으로 강홍구씨과 같은 범주의 외재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방식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존에 본 것 중에 재미있게 본 작품에서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오늘 보여주신 작품들에선 빠졌네요.
아까 강홍구 선생님이 아버지로 나와서 딸을 때리는 ‘이너뷰’라는 작품은 아버지와 딸을 다루고 있죠. 그거 같은 경우도 상당히 심리적이면서도 사회관계라는 외재적인 문제가 있죠. 그것 말고도 ‘욕망의 바다’ 같은 것, ‘꿈속에서’라는 작품도 매우 심리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느꼈거든요. 만약에 이야기가 나와서 무의식에 대해 얘기해본다면 강홍구 선생님의 작품도 상당히 초현실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외재적이고 비판적인 또, 그 외재성이 파노라믹한 뷰와 그 속에 이어붙인 듯한 흔적들의 균열, 의도적인 개입이 합성에서 말이죠. 재난적인 장면들, 스텔스기, 63빌딩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느낌 같은 것이 드러난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재난적인 측면이랄까,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꼬집으면서 유쾌하게 비튼다고 할까. 그 속에서 발현되는 초현실적이고 무의식적인 면모가 김세진씨와 닿은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강홍구 : 저 같은 경우는, 저도 오늘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제가 유도한 것이 아니거든요. 경우에 따라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오히려 사진이라든가 영화이미지라든가 카메라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초현실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거든요.

성완경 : 예,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강홍구 : 어찌 보면 굉장히 객관적이고 종속적으로 카메라가 기록하는 것 같은데 실제 기록한 결과물을 보면 앗제의 사진에서부터도 이미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완경 : 여기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오세리 풍경에 표기된 글, 굉장히 잘 쓴 글이던데, 거기 파노라믹한 뷰에 관한 얘기, 사진의 재현성에 관한 얘기가 나와 있고. 그러나 바로 그런 측면하고 지금 말씀하신 초현실성, 파워풀하게 드러내는 다른 방식인 그런 것하고 대조적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오늘 본 것 중에 두 분 사진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 그것을 뒤집고 비평하고 해도 공통된 부분에서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심리적이고 초현실적인 힘,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강홍구 : 제가 김세진씨의 작품은 지우개싸움을 하는 작품인 ‘상실’에서부터 봐왔어요. 김세진씨가 심리적 게임, 당기기와 같은 긴장감을 굉장히 강하면서도 동시에 외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교묘하게 감추며 전개하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성완경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제 작품이랑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것이 어떤 성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사진이라든가 이미지가 갖고 있는 힘들을 그런 방향으로 모아놓은 건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성완경 : 상대적으로 오세리 사진들이나 오세리 사진에 대한 작가가 쓴 글보다 컷으로 보여줬던 합성사진들에서 그런 측면을 더 많이 느꼈어요.

김준기 : 이것으로 첫 말씀에 여러 가지 문제를 던져주셨는데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죠. 지금 두 사진작업, 비디오작업 등 시각 예술가들의 서사를 죽 보셨는데 시각미술에서의 서사와 영화에서의 서사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영화적 서사와 문학적 서사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고자 오늘 영화 쪽 패널을 모셔보았습니다.

김계중 : 저는 지금 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의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고, 제가 말을 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는 특별히 미술이론을 공부했다기보다는 학부하고 대학원과정에서 영화제작을 공부하고 영화를 만들다가 영화를 좀 아방가르드적인 접근방법에서 해보자해서 실험영화제에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미술에 관심이 있었지만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작업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외람된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감안을 해주시고요. 전시전체에 대한 컨셉이나 그런 것들은 나중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나름대로 김세진씨와 강홍구씨의 작업을 비교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다른 점은 강홍구 작가의 경우에는 로우 테크(low tech)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사용하신 기술자체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술을 이용해서 이미지에 대한 변형을 시도하셨고요. 김세진 작가의 경우는 반대로 고가의 장비라든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업적인 이미지, 상업적인 광고, 영화에서 쓰이는 디자인 등 세련된 이미지에서 출발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하이테크(hign tech)에서 접근하지 않았나하고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분 작가들의 공통된 부분 중의 하나는 우리한테 익숙한 과정자체에 변형을 가하면서 새롭게 보자는, 관람태도에 대해 변화를 준 점입니다. 또 다른 점은 강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대중문화를 이용하여 문학적인 심상을 느낄 수 있는 메타포전달에 치중되어 있다면, 그 반대로 김세진 작가의 경우 철저하게 비디오를 이용해서 우리가 상업적인 이미지에 익숙해 있을 때, 과학적인 기술들을 이용해서 약간의 변형을 가해진다면 우리가 익숙해져있는 이미지들에 있어서 과학적인 부분을 이용한 프로세스가 어떤 식으로 우리한테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오게끔 작용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고요.
또 좋게 느낀 점은 보는 사람들이 그 이미지에 대해서 굳이 기술적인 부분에 많은 것을 몰라도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같이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을 하신 점입니다. 약간 뭉뚱그려 말씀드리면 여기 시각서사라고 해서 비주얼 내러티브라 하셨는데 제목에 이의를 내는 건 아니고요. 영화가 기술적인 측면이나 내용적 문화적 측면 아니면, 영화의 사실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포맷이라든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서 제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생각을 해본다면 영화가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현실의 모사에 있어서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시작했기 때문에 영화에 사람들이 그렇게 몰두를 하기 시작했다고 보고요. 그 다음에 그러한 재현을 통해 사실성을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너무나 익숙하게 영화와 함께 커왔고 봐왔고, 우리가 느끼는 현실감 사실성 같은 것들이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사실감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사실적이고, 그 사실적인 것을 어떻게 하면 초현실적으로 사실적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데서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역할을 해 왔다고 봅니다. 강홍구 작가님과 김세진 작가님의 작품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론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어떤 크리틱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게끔 하게 하지만, 그 안에서 사실주의를 건드리고 계속 그것과 씨름하는 측면이 있어서 작가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가 왜 현재 미술작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는가를 보여주는 케이스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김준기 : 요점에 들어가기 전에 패널의 말씀 들으면서 혹시 덧붙이실 말은 없으신지요?

성완경 : 아까 하던 얘기였는데 96, 97년도 합성한 스틸사진에서 받는 느낌하고 오세리 연작사진하고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느꼈거든요. 합성사진에선 합성의 장면성 자체에서 드라마틱한 것, 심리적 측면과 비평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있고, 오세리 작업의 경우, 그것이 파노라믹하게 보였는데 거기에 소셜 멘트가 있는지, 아니면 그것과 다른 풍경을 관조하는 태도인지 다른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강홍구 : 아까 말씀하신 균열에 관한 것 입니다. 균열과 무력감. 실제로 오세리란 김포공항에 있는 도시입니다. 비행소음으로 항의가 있었고 87년부터 이주대책이 세워지고 이주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땅을 팔고 이주하였으나 세입자들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가보면 동네전체가 기묘한 색상의 폐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그 근처에 살면서도 너무나 이상했어요. 그래서 이걸 한번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처음에 시작했습니다. 처음이 2000년 쯤 되요. 그러다가 오세리를 보면서 느끼는 우리나라의 압축된 고속성장. 그것이 가져온 변화가 국가의 돌연적 변화, 파괴인데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갈등이 있어요. 근데 제 입장에서 보면 항상 구경꾼이에요. 무력하고. 그래서 양자사이의 문제 결국 그것이 사회적인 결과물이고 사회적인 것을 비판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는데 내가 전적으로 투입하지를 못한다는 갈등과 그 다음에 외부에서 보면 그곳은 특이하게도 풍경으로 보입니다. 이런 양자사이의 갈등을 풍경으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놓고 싶었어요.

성완경 : 지금 말씀하신대로 풍경의 밖에 작가가 있는 것 같은 개입을 못하는 것 같은 무력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김세진씨에게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키드’의 장면들, 15분 예정 중 1분 보여준 작품 말이죠. 정확한 시나리오 있는지 모르겠지만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흥미롭고, 사진과 연관된 부분이 있지 않나봅니다. 우리가 보는 재현된 어린아이는 심리적이고 불안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장면은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그곳은 엄청난 감춰진 비극, 범죄의 장소일 수 있죠. 사진 역시 잠재적으로 촉발시키는 것이 있지 않나싶어요. 내가 너무 과밀하게 본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까 본 것은 굉장히 끔찍하거나 무서운 이야기일 것 같은데, 그 작품에서 작업 중이지만, 거기서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 설명을 좀더 들을 수 있는지 듣고 싶네요.

김세진 : 김계중씨의 말처럼 하이 테크한 상황에서 작업을 진행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미지 적이거나 형식적인 실험을 하다가 이번에 ‘키드’라는 작업은 굉장히 영화적인 상황에서 시작을 하게 됐어요. 제가 항상 미술에서 생각했던 은유라던가 그런 것들에서 보면, 두 아이는 선과 악의 상징이면서 악이 선을 누른다는 명확한 명제에서 시작하지만, 중간 중간의 이미지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거든요. 보는 이에게 이것은 관람의 방해적인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실 영화는 굉장히 돈이 많이 들죠. 실험만 하기에는요. 그래서 영화는 반응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미술도 마찬가지이지만. 미술 했던 분이 영화를 할 땐 낯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성완경 : ‘키드’ 같은 작품들이 완성되었을 때 갤러리 같은 데 보다 단편영화, 실험영화 등 영화관에서 보여 지게 되겠죠? 영화죠, 영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이런 미술관에 초대받게 되겠죠. 그런데 전시를 본다는 것과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준기 : 영화는 앉아서 보는 것이고. 전시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 체험하는 것이죠. 영화는 여러 컷의 사진이 이어진 것인데 멀리서 보면 그렇지만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응축된 서사를 한 화면 안에서 고정된 것들, 특히 빛이 아니라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죠. 인화지에 화학약품이든 캔버스에 물감이든 어떤 물질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고. 영화는 가변적인 것을 본다는 것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술과 영화라고 할 때, 이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김세진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세진 : 정확하게 다르다는 점이에요. 미술, 영화의 경계는 분명히 있고 그게 겹치거나 혼합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술과 영화가 만났을 때 시너지 효과만 일어난다고 보진 않아요.
판이 다르고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다는 거죠. 작가가 혼자 작업하는 것과 여럿이 작업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언어가 존재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김계중씨께 여쭤보고 싶은데, 사실 비디오 아트 같은 경우는 뚝 떨어진 존재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요. 실험영화라는 부분은 맥이 희미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결국에는 상업영화 쪽으로 흐르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데뷔를 하는 거죠. 작업을 하시는 바탕이 되어있지 않으니까. 비디오 아트는 이렇게 껴도 되고 저렇게 껴도 되고, 실험영화와 비디오 아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준기 : 실험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거죠. 그리고 비디오 아트는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보고요.

성완경 : 근데 너무 그렇게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습니다. 실험영화는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술전의 부대프로그램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쌈지에서 관객이 질문했을 때, 비디오 작업이라도 뮤지움에서의 작업과 상업영화에서의 작업은 구별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시간이 없어서 얘기를 못했는데, 이는 토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구별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고. 거꾸로 내가 뮤지움 안에서 본 영화인데 원초적인 다름이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 하지만 구별이 안 됩니다. 크리스 마커가 만든 영화로, 이것은 유고 전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인 이야기를 다룬 15분짜리 영화인데 카메라를 가지고 전장에 간 것을 담은 것이죠. 이런 짧은 영화를 미술이라고 봐야하는 건 아닐까요. 아마 다른 점이라면 사회적인 장치겠죠. 영화는 영화관이 있고 영화제작진의 방식, 흥행차트, 배급방식 즉, 시스템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은 독단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준기 : 시스템의 차이일 뿐더러, 시각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습득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겠냐는 것이죠. 1시간 이내의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극장이라는 곳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미술관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있지 않을까요. 체험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만약 극장에 가면 세팅된 화면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 감독이 하는 얘기를 들으러 왔다는 자세가 생기거든요. 그러나 미술관에서는 비주얼 이미지를 본다는 것인지 하는 근본적으로 그런 차이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 같아요.

성완경 : 미술의 체험은 시각적, 조형적인 것이고 극장에서의 영화는 서사라는 것은 객관적 관찰에선 맞는 이야기이지만, 일상적으로 미술관이라 해서 서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역사적인 이야기라 함은 19세기 말 기술영상 영화가 등장한 시기에 미술은 굉장히 순수한 모더니즘적인 진화를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 시기에 사회 전반에는 기술의 도움으로 완벽한 재현의 형태가 나오기 시작한건데,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이죠. 20세기에 영화가 발전하면서 재현적 서사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대중문화일 뿐 아니라 광고문화의 핵심이 되었죠. 그러나 이걸 너무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미술대학에서 서사를 너무 추방해 버린 건 아닌지... 요즘 서사는 많이 회복되고 있죠. 뮤지움 문화의 과도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뮤지움이 영화적인 서사를 직접체험하지 못하고 절충한 상태라는 거죠. 영상작품도 빔으로 확대해서 물질적, 조형적, 조각적 상황을 즐기고 있고요. 우리나라도 다큐멘터리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봤으면 좋겠어요. 좋은 동영상 작품을 보길 원한다는 거죠. 뮤지움에서 보는 동영상이라 해서 또 다른 상황이 요구된다는 것이 너무 과대해져서 오히려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지 않기를 바랍니다.

김준기 : 신체적 체험이라는 것이 극장과 미술관의 가장 큰 차이가 될 것 같아요. 극장에서는 신체적 체험이 약화된다고 하면 전시장에선 극대화된다는 거죠.

강홍구 : 워홀의 영화작업의 경우.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자기 동일시의 효과가 일어나는데 같은 동영상 체험할 때는 집중하지 않는다는 거죠. 미술관의 동영상이 집중 안 되는 이유는 보는 관습의 문제가 아닐까요. 5분이상이도 집중이 힘들죠. 경우에 따라서는 싱글 채널비디오의 경우 아주 짧은 시간에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관객의 체험방식을 고려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계중 : 이전의 질문에서 보아 이분법적으로 이야기하면 미술과 영화의 관람형태 등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거든요. 영화의 시스템이 영화에 얽히기 시작하면 작품의 맥락이나 내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죠.
앤디 워홀은 새로운 영화 관람형태를 추구한 것이지만 미술관에서 상영될 수는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 미술관에서 비디오로 제작하여, 구석에 설치하여 상영하는 경우 몇 분씩 밖에 앉아서 볼 수 없었어요. 갤러리에서 영화의 관람을 새로운 방식으로 추구하려는 것은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구분되는 존재이긴 하니까요. 전형적인 영화 관람의 형태를 요구하는 영상작품을 갤러리로 새로운 관람형태를 통해서 했다 뿐이지. 갤러리 공간의 속성은 전통적인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갤러리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꾸려나가는 것이 추세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미술과 영화의 구분은 여전히 필요하고, 이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화적인 작품이라 해도 2시간이 넘는 영화는 영화제에서도 내기가 어렵거든요. 갤러리가 혁신적으로 그것을 계속 바꿔 나가는 거죠. 갤러리가 변하는 거지. 가장 열려진 공간이 어찌 보면 갤러리라는 생각이 들고요.
실험영화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영어로 experimental film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상에서 필름과 비디오로 나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로 하는 아트라는 것이고 필름 아트는 이미 실험영화라고 이름 붙여졌죠. 전통적인 실험영화를 한 사람들은 다 미술계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아방가르드의 자세로 어떤 매체를 가지고 하느냐가 실험영화와 비디오 아트를 구분하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실험영화감독들이 일반영화감독으로 넘어가는 케이스를 말하셨는데 실험영화하면 영화 쪽으로 가서 하라는 선입견이 존재하거든요. 하나의 매체를 보고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에서 하는 방법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필름이라는 매체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개 내러티브적인 요소로 취중 되어 있었고, 그 외의 일탈적인 것들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필름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러나 영화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이 있지만 영화의 내러티브적인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봤을 때는 정형화된 내러티브의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작가적인 입장, 자유로운 예술가의 입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실험영화로 제작된 것이 많았어요. 결국 그 분들의 작업이 작가적인 착상의 연장에서 영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들의 경우를 보는 게 그런 케이스이고요. 실험영화라는 단어에 새로운 선입관을 가지고 새로운 장을 만들고, 맥락화를 마련하는 것이 서울실험페스티벌입니다.

박동현 : 해외에선 영화를 모션픽쳐, 시네마, 필름, 무비 등 다양하게 칭합니다. 모션픽쳐는 촬영이나 기술적으로 세부적으로 가는 것이고, 시네마라는 것은 아트하우스위주의 것이고, 필름이란 매체적인 실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영화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것을 통칭하고 있어서 용어에서 오는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완경씨는 굉장히 필름 적으로 접근하셨고. 김계중씨는 무비나 시네마적으로 접근하셔서 갖고 있는 입장은 다른 것인데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성완경 : 실험영화제 중에서 내적 카테고리 선정을 어떻게 합니까?

박동현 : 첫 해했을 때는 국내에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분명히 여러 군데서 하고 잇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베이스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을 했고요. 일단은 기본적으로 일단은 경쟁부문, 초청부문, 해외초정부문으로 나뉘고, 경쟁부문은 형식적인 부분으로 분리됩니다.

김계중 : 경쟁본선부문에 올라온 작품은 내러티브에 대한 실험보다는 장르에 대한 실험, 그래픽적인 이미지에 대한 실험이 있어서 시각적인 형식, 자유적 형식, 시적 형식, 다큐적 형식으로 크게 나누었어요. 시적 형식은 여전히 실험영화이기 하지만 드라마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시적인 심상이 있는 작품들이고, 선이랑 도형 추상적인 이미지로만 만들어진 작품은 시각적 형식, 새로운 사실주의를 보여주기 위한 다큐적형식, 다큐의 포맷으로 새로운 영화형식을 경험하게 하는 자유형식 모두 4부문으로 나눠집니다. 국내초청부문에 있어서는 과거에 있었던 실험영화 연구소단체 등이 있고 필름이나 비디오로 새로운 실험을 하는 매체실험부문, 실험적인 영상이기 하지만 사회적인 비판적 메시지가 있는 사회적 실험영화부문이 있습니다. 해외초청부문은 영국의 60,70년대 실험영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완경 : 도움이 됩니다. 감사하고요. 또 다른 질문은, 내러티브라는 자체는 기계적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상업적 포맷의 일반적 내러티브만 배제했다는 것인가요?

박동현 : 필름도 마찬가지고 시네마도 그렇고 대부분이 내러티브를 가지고 영화를 풀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성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많은 장르와 접목하고 있는데 무용, 음악 등등, 그러나 소설이랑 접목된 것이 극대화되면서 사람들과 소통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것을 배제하고 또 다른 것들로 영화라는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배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준기 : 내러티브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야기하다’라는 것인데요.

김계중 : 내러티브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드라마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김준기 : 사진과 영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각변화에서 미술에는 20세기에서 내러티브를 배제하였고 20세기후반에야 서사를 회복하자는 과정에서 사진작업으로 또는 동영상 작업으로 서사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전시가 열릴 수 있는 것도 비쥬얼리티가 내러티브를 배제한 어떠한 것이어야 한다는 외골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전시가 아닌가 합니다. 마크 로도코의 거대한 추상을 보고도 거기에 내러티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저것은 심미적 재현이다' 라고 말이죠. 재현을 넓게 보는 것이긴 하지만 좁혀서 보더라고 시각예술에 있어 서사라는 문제는 영화적 서사라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 같아요. 그 다른 게 뭐냐를 얘기하다 보니까 제 본분을 잊어버리고 비주얼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김창겸 : 제가 만약에 영화를 제작할 수 있거든요. 근데 또 작가적으로 이미지를 요구하는데. 이때는 이미지를 분석하고 거기서 내러티브를 변형하려고 하거든요. 근데 영화를 제가 제작하려면 문학적 구조에서 주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비슷할 수 있어도 처음 시작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편지’ 같은 작업에서 편지를 먼저 쓰고 영상을 만들었지만 이는 오브제가 있어서 영화가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영화라는 것은 기승전결을 다 보지만 도중에 보게 되는 경우, 기승전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없죠. 그래서 작가는 이를 감안해서 중간부서 보더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관객이 들어가면 문을 잠근다든지요.(웃음) 그런 경우가 있어요. 사람들을 제한을 해요. 한두 명을 출입시키고 시간이 끝나면 다시 출입문을 열고,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유명작가경우에요. 또 다른 경우도 있어요. 작년 초의 일본에서 전시에서 소파를 만들어서 누워서 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혹시 졸까봐 약간 불편하게 만들었더라고요. 정말 성공적으로 누워서 오랫동안 보게 만들더라고요. 새로운 장치죠. 그러한 기본 조건 속에서 작업해야하기 때문에 내가 비디오작업을 할 경우가 만약 영화를 할 경우에 근본적으로 접근방식이 틀리다는 거지, 사실 작품이라고 했을 때는 실험영화에서도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배제하자는 지정하고... 사실 미술작가는 스토리 텔링을 못해서 안하는 거죠. 이미지분석을 더 잘하기 때문에 이미지부터 시작을 하는 그런 지점에서 목적점은 어느 정도 유지할 것 같아요.

김세진 : 저는 오히려 김창겸씨 작업 보면서 편지 같은 경우,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했어요. 99년도에 ‘크로스’라는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모든 매체장르의 작가 분들한테 동영상을 만들어달라고 얘기를 했어요. 모두 묶어서 극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어요. 재미있었던 게 개별적으로 갤러리에서 봤으면 모두 안 봤을 텐데 수직적으로 모두 보여주니까 다 보더라고요. 김창겸씨 작업은 오히려 굉장히 열려져 있는 구조 안에서 이야기를 구상하는 것 같고, 영화 같은 경우는 권력적으로 우리가 봐야하는 시스템인 것 같아요. 김계중씨에게 여쭤본 것은 이렇게 해도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관점과 영화라는 것 실험영화라는 것 그런 것에 대한 전달방식이나 형식, 그런 것들을 여쭤본 것 같아요. 전에도 한 번 저런 작업들은 과연 어떻게 상영할 수 있을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김준기 : 상영은 할 수 없죠.

김세진 : 그런데, 상영은 할 수 없지만 그것조차도 상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있지 않을까요?

김준기 : 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두 분 작가들의 섬세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창겸 : 그전에 저는 하나 큰 질문을 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과연 서사의 회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미술에 들어오려 했는지 외국의 사례와 우리의 사례를 듣고 싶습니다.

김준기 : 그럼, 여기서 잠시 성완경 선생님의 미술사 특강이 있겠습니다.

성완경 : 글쎄요. 그 강홍구 선생님이 다 잘 설명하실 텐데요. 확실히 서양에서 실험영화가 1910년대 후반, 1920년대 초 그 무렵에 미술가 쪽에 레제 같은 사람들이 만들고 자유롭게 한 것은 사실이죠. 그 시기에 서사를 회복했냐는 것 말고 미래파 작가들이 토탈 시어터 같은 장소에서 공중에 광선을 쏘고 하늘에선 비행물체가 날고, 그게 결국 비디오 아트의 원형체였죠. 비디오 아트의 전시 같은 것, 그리고 또 움직임이라는 것의 작업 같은 것이 대단히 있었죠. 대개 2000년 이후의 작업이 순수하고 조형적이고 정관적이고 뮤지움 피스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기엔 미국의 헤게모니가 많이 관계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고요.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깨트린 작고도 자유롭고 정치적인 입장의 플럭서스 같은 것이 있었고 소위 미국에서 팝아트 같은 것이 대중문화 끌어들여서 뮤지움 피스로도 볼만한 것을 많이 냈었죠. 그 시절에 프랑스 쪽의 팝 내지 네오다다적인 것이 흥미로운 게 우리나라에 작품 많이 팔아먹은 세잔이니 뭐 그런 것 말고, 60년대 후반의 내러티브가 있는 서사가 80년대 초에 서울에 처음 선보였어요. 당시 기획되었던 주제들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일상의 신화, 경찰과 미술. 말하자면 미약하지만 정치적으로 굉장히 진보적이었고 착한 우량아 같은 미국미술과 다른 좌파적인 내러티브적인 미술, 그리고 뒤샹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을 나눠서 여러 가지로 그림 같은 것. 이런 것들이 미술의 내러티브가 센지 한 것이죠. 이게 아주 답답해서. 이것을 제가 깨뜨리려고 의도적으로 제가 쓴 적이 있었습니다. 80년대엔 우리미술의 백색 모노크롬을 깨뜨린 게 다행히 80년대 민중 미술적이고 사회미술적인 그런 속에서 할 얘기가 많아요.
요즘엔 와선 다른 작가들의 다양한 제안 속에서 다양한 서사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국내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게 전반적으로 신체, 계급, 성, 정치 등 여러 가지에 맞는 서사를 찾아낸 색이고 굉장히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뮤지움 제도 속에서 서사가 폭넓게 인정되고 있고 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지루할 것 같아서 짧게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웃음)

강홍구 : 전 김세진씨께 질문이 있는데요, 제가 김세진씨의 작품을 보면 이상하게도 영화사 쪽으로 계통 발생적인 탄도로 의도적인 것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되돌려진 시간’을 보면 피를 거꾸로 돌리면서 흥미 있게 만들었던, 그 다음에 스틸사진과 동영상 사이에 긴장감, 그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어요. 어떠세요? 그런 것들을 의식하면서 만드셨나요?

김세진 : 반반인 것 같아요. 초창기에 시작할 땐 내러티브나 그런 개념적인 것 보다는 이 장비를 어떻게 가지고 놀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공부하면서 이런 것도 재미있겠구나 생각하면서 형식적으로 반은 감으로 그런 식으로 접근 했던 것 같아요. 저는 강홍구 선생님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특히 옛날 것, 선생님 세대의 많은 폭력적인 미국영화들이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것 말이죠. 지금은 어떤 영화에서 영감을 얻으시는지 궁금해서요. 작품이 변하신 것 같아서요.

강홍구 : 네, 작품이 변하는데, 그 작품이 변하는 건 사실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 보다는 영화를 보는 장비가 바꿨어요. 굳이 스캔을 하지 않아도 이미지사진을 만들 수 있거든요. 현실을 찍었는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이 보이거든요. 이렇게 중성적이고 기계적이고 제한적인데 왜 이렇게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가. 물론 지금까지 사진사에서 계속 질문되고 있지만요. 그게 아직도 궁금하고요. 그리고 영화를 다룰 만큼 다루었으니까 이제 좀 쉬었다 나중에 하자는 생각이 드는 거고.

김창겸 : 작품을 보면 흑백으로 주로 하시는데 그 이유가 있나요?

강홍구 : 흑백을 주로 하는 이유는 칼라로 하면 모니터 색상이니 인쇄소에 프린트한 색상을 너무 맞추기 힘들어서 흑백으로 하잖아요. 최근에 본 영화는, 지금도 정신없이 보지만, 뭘 봤더라... 최근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봤어요. 얼마 전 ‘귀여워’를 봤는데 소문보단 실망스러웠습니다.(웃음)

김계중 :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릴게요. 강홍구 선생님 사진 작업 중에 본인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최근 작업인가요?

강홍구 : 아니요, 그건 옛날 작품이에요. 95년에 큰맘 먹고 맥을 구입하고 장비가 바뀌니까 96년도에 작업했어요.

김계중 : 제 질문은 또 왜 본인을 등장시켰나 하는 건데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강홍구 : 본인이 돼 등장했냐하면, 영화라는 것은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대체시켜주고 자기투사효과가 크다고 생각해서 그와 같은 장면을 모아서 영화스틸 이미지를 모아서 작업해보자 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주인공 대신 등장시켜야 하는데 제 사진이 가장 많고 작업하기 편하고 개인적인 욕망이죠.

김준기 : 또 한 가지는 작가들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많이 작업을 하거든요. 그건 자기를 알리는데 유리하고.(웃음)

강홍구 :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옛날 사진이니까 비현실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준기 : 선생님은 미디어 아티스트인가요?

강홍구 : 그런 건 생각 안 해 봤는데요. 관심이 없어요.

김준기 : 왜 그러냐면 제가 어제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에 다녀왔거든요. 이름이 인터내셔널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고. 미디어아트라는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궁금해요. 요즘식의 미디어아트는 센서를 이용하거나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는 아트, 웹베이스아트, 디지털, 이 3가지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규정할 수 있는가, 묶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토크랑 주제가 다르겠지만 서로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강홍구 : 저는 미디어아트라는 용어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뉴미디어라든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은 크게 문제 아닐 것 같고 문제는 아트가 매체중심으로 규정되고, 비엔날레라는 것이 문제 같아요. 또 다른 작가들의 약점이 매체접속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거죠. 새로운 매체에 쉽사리 굴복하는 것 같아요. 그게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김준기 : 네, 스캐너를 쓸 때나 디카를 쓸 때나 강홍구라는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여담으로 어제 비엔날레에서 간판작가의 작품이 하늘을 계속 찍는데 새가 계속 날아다녀요. 핑퐁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처럼 말이죠. 이게 미디어 아트 게임이라는 것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 생각해봤어요. 그런 점에서 렌즈베이스아트라고 칭한 적이 있었죠. 예전에 수억의 예산을 들어서 사진비엔날레를 열자는 기획이 있었는데, 비록 성사되진 않았지만, 당시 회의 때 이름을 사진비엔날레, 사진영상비엔날레 등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이렇게 매체규정이 어설프게 갈 거면 렌즈라는 매체로 정확하게 규정짓고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렌즈아트, 렌즈베이스아트라고 우긴 에피소드가 있어요. 이런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진작업이나 영상, 영화작업하시는 분들께서 똑같이 렌즈를 투사한 이미지인데 사진이나 동영상의 시각적인 측면이라 할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해서입니다.

강홍구 : 그렇게 현실을 기록한 것이 비현실적이 되고 초현실적이 되는 것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요? 렌즈에 있나 아니면 인지나 심리적 이유에 있나요? 그런 것들이 궁금해요. 영화 쪽에서는 어떻게 보나요?

김계중 : 저도 사실 영화 쪽에선 아웃사이더이길 원하고 어찌 보면 편입하고 싶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긴 합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이런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렌즈를 통해서 보는 이미지나 우리의 눈을 통해 보는 렌즈의 이미지들에서. 극장에서 보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찍혀진 이미지를 우리가 직접 보고 있다는 환상에서 영화의 자기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러한 렌즈를 통해 찍혀진 이미지를 변형하는, 김세진 작가가 이미 실험한 것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를 경험했을 때의 착각현상, 난 착각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이라는 믿음의 시스템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김창겸 : 어떻게 보면 저는 반대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렌즈를 안 쓰는 미술이 어디 있는냐는 거죠. 렌즈를 쓰는 미술, 아니면 렌즈를 쓰는 매체를 가진 작품들은 공통점이 전부 디지털화 된다는 것 같아요. 렌즈를 안 쓰면 디지털화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디지털이라고 하면 또 다른 의미가 되잖아요.

박동현 : 제가 볼 땐 그런 의미보다는 저는 디자인인데 글 쓰는 것과 드로잉, 그러니까 옛날 문학 분야에서 라이팅(writing)은 쓰는 것이고, 요즘은 드로잉(drawing), 그 다음은 사진은 찍는 거죠. 근데 요즘은 작가가 이야기를 하려니까 글 쓰는 사람, 즉 라이팅은 텍스트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드로잉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할 순 없는 거죠. 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영상을 새로 잡았을 때 어떤 사람은 구상이 안 되어서 추상이 되거나 그런 것처럼 동영상안에서 소리나 대사 여러 요소들이 이미지가 겹치면서 오페라에 같은 총체적 예술과 같은 거죠. 오늘 느낀 점은 오늘 말씀하신 작가들이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럴 경우 메시지가 있는 것이거든요. 근데 렌즈 이런 문제보다는 드로잉을 하던 사람이 카메라를 찍는다는 거죠.

김준기 : 잠깐 비켜가는 이야기이지만 제 옆에 있는 작품을 설명하자면 이광호라는 작가의 태몽입니다. 엄마가 태몽을 꿨는데 아버지가 호박을 따는 꿈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동영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 동영상이라는 것이 바로 정지화면에 동영상을 어떻게 옮기냐나는 기술적 이야기는 없고 그림 앞에 그냥 선풍기를 놓고 찍은 것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속임수 같은 것들이 묘하게 동영상이라는 거죠. 아까 근데 김세진 작가들이 말하신 것처럼 안 움직이는 것 같은데 저게 동영상인가하는 착각들을 이광호 작가도 줄려고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동영상이라는 것 사진이라는 것을 벽면에 응축하는 회화라는 것의 상관관계 같은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고요.
그 옆의 박경주 작가는 카메라를 잡은 사람과 찍히는 대상과의 차이가 거의 없는 퍼포먼스 같은 거죠. 자기가 기획해서 외국인노동자를 선거 유세시키고 그런 점에서 카메라를 잡는 주체가 피사체와 어떻게 결합되고 개입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김계중 : 특히 3D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면은 그래픽을 가지고 카메라를 찍혔다는 사실감을 줄려고 하고 많고, 또 많은 그래픽작업들이 카메라가 찍은 작업들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그래픽인 것처럼 하는 것도 있거든요. 그리고 비디오 아트라고 불렸던 것이 미디어아트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현상 자체가 워낙 컴퓨터를 바탕으로 하고 디지털이라는 매체를 이용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또 디지털이라는 것들이 멀티미디어라는 어떤 텍스트, 그래픽, 동영상 그런 것들이 자유자재로 서로 경계를 넘나드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요. 그러한 렌즈를 통해 찍겠다는 것은 실재성이 내포가 되는데 그런 실재성 마치 영화에서 실재 연출을 했냐는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가 자연스럽게 미디어아트라고 명칭 되는 것 같아요.

김준기 : 제가 96년도에 대학원 학술제의 제목이 ‘디지털 인터넷 그리고 영상’이었어요. 디지털과 인터넷의 결합이 그때 당시 새로 시작할 때라고요. 거기 하나 덧붙인 영상이라는 것은 그야 말로 생뚱맞죠. 그렇지만 그것을 쓸 만큼 당시 영상이라는 것이 디지털 인터넷과 동일한 크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되는데요. 그것이 미디어아트라는 것으로 조합, 정리, 재편된다 그런 생각을 정리해주셨습니다.

김계중 : 영상이라는 개념자체가 이제는 단지 그래픽이건 사진이건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어가면 영상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요.

김준기 : 사실은 동영상인데, 영상은 그냥 이미지거든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서서히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아요. 이병희 선생님은 오늘 대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이병희 : 우선 오늘 이야기 재미있었고요. 저는 두 분 작업에서 우선 이 전시에서 반가운 점은 서사의 회복에 관한 점이였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관습 때문에 서사의 회복하는 매체를 동영상이라든지 영화적인 그 안에서 아직 보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되고 또 이러한 서사의 회복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예전에 있었던 것으로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고 왜 지금 등장하느냐 하는 거죠. 거기서 중요한 저는 관람주체라고 생각해요. 관객을 아직도 수동적인 대상으로 아직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홍구 작가님의 경우 대중매체를 이용해서 그것을 재 맥락화해서 굉장히 팝 적인 방식이 가능했고 그 안에서 오히려 관람객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셨고,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좋았고요. 김세진 선생님 작업의 경우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느낌이 심리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게 오히려 강홍구 선생님보다도 더 오래 나의 무의식에 남을 수 있는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재구성을 관람객이 해 나가게 되는 곳이 미술관이냐 영화관이냐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부분은 한번 강조를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완경 : 끝나기 전에 한마디 드리고 싶은데. 방금 얘기하신 것에서 두 가지 동의하는데 우리가 얘기하다 보니까 시각적 서사, 미디어아트라는 말도 나았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 출품된 작가가 아티스트라는 것이고 미술관이라는 공간이다 보니까 우리가 확장해야 할 것이 있는데, 아트와 미디어 영상문화 이런 관계를 보면 그런 것은 표현의 문제뿐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는 주제적이고 세계관적인 얘기에서 큰 맥락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시대미술의 큰 특징이죠. 그러니까 그런 것은 불가피하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회조직, 또 문화의 개념이 변동한 것이고 그 중에 또 관객과 예술과의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아티스트나 필름메이커의 작품주제로도 흥미 있을 수 있고 토론주제로도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미디어와 미술을 얘기할 때 단지 표현의 확장뿐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낸 실제 변화된 사회모습, 그것의 새로운 삶의 관계, 그런 부분이 대단히 흥미롭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시각서사에서 보더라도 지금이 달라진 세계이기 때문에 아티스트가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고 그런 것들을 주목해야 마땅하고 그것조차도 전시기획 속에 들어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아까 말씀하신 것들과 병행하면서 추가하고 싶습니다.

김준기 : 들으신 것 들 중에 소감이나 질문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관람객 : 강홍구 선생님의 오세리 작업 굉장히 좋게 봤고요, 세트장의 폭력들이 오세리의 가장 일상적이지만 가장 낯선 모습으로 보아지는 것 같아서 상당히 좋았고요. 김세진 선생님께서 초기에 굉장히 형식에 기여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나름대로 그런 형식을 통해서 작업을 하시는 것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가졌던 나름대로의 결론이 있으신지 궁금하거든요.

김세진 : 일단은 제가 강홍구 선생님의 경우 년도를 생각하게 되고, 제 작업의 경우도 당시 미디어가 보편화된 시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점에서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 형식, 매체를 다루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 같고요.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스캔을 받다가 카메라가 나와서 찍고 인화하는 것처럼 특별한 계기는 없고요. 항상 같이 이렇게 나가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내가 작업을 하다가 동영상작업을 하다보니까 이야기가 생기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영화에서 본 이미지를 사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똑같은 것 아닐까요. 지금 작업하시는 디자인하고. 모든 게 다 흡수되기도 하고 튕겨나가기도 하고.

김준기 : 네, 오늘 김계중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다음시간에도 참여해 주시면 좋겠고. 오늘 자리 정리하실 말씀 해 주세요.

김계중 : 아까 잠시 언급을 했지만 제가 미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서 감사하고 있는 것이 갤러리를 통해서 자기혁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표현하고자 한다는 것이에요. 고정적인 것을 원하지 않는 어떤 미술적인 속성이랄까요, 특히 부산비엔날레에서 봤을 때도 극영화작가의 작품도 많이 보였는데, 그런 면에서 미술이 영화라는 한정된 것을 규정짓는 것은 시스템 때문에 규정을 벗어나는데 한계가 많지만 미술에선 한계가 없이 무궁무진해서 다양한 얘기들이 나올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김준기 : 시간이 워낙 많이 지나서 제가 좀 초조하네요. 늘 이렇게 시간이 모자랍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획이나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후속자료로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좀 전에 김계중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영화가 산업의 영역으로 본다면 미술 또는 시각예술은 그야말로 예술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자기의 표현을 하려는 것 같고 이번에 여기 출품 작가들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2005/01/27 16:31 2005/01/27 16:31

시각서사전 관련 언론 기사 모음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1/25 10:16


'미술관 입구에 웬 영화간판?…강홍구·김범수 등 출품 <시각서사> 전'- 국민일보 2005. 1. 9 이광형 기자
미술관 입구에 영화 간판이 붙었다. 세계환경영화제 출품 예정작이라는 로고가 새겨진 ‘광주천의 숨소리’. 고목을 배경으로 하는 ‘바람나무’ 포스터도 보인다. 무슨 영화제라도 열리고 있다는 얘기인가. 호기심을 안고 들어가보니 미술과 영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색 전시회가 진행중이다.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2월26일까지 열리는 ‘시각서사’전이다.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시각적 요소와 ‘보는 이야기’라는 서사적 요소를 갖고 있는 영화는 갈수록 미술을 동경한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도 영상매체의 확산 속에서 움직임을 시각화하거나 몽타주 기법을 활용하는 등 영화에서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을 실험중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영화와 미술의 관계를 조명해보는 전시다.
출품작가는 강홍구 김범수 김세진 김창겸 박경주 박태규 박혜성 박화영 이광호 이중재 등 10명. 강홍구의 ‘Who am I’는 대중영화 스틸사진 속에 작가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합성한 작품으로 영화에 투사된 욕망의 문제를 표현했다. 김범수의 ‘Hidden Emotion’은 각종 필름들을 모아 재조립한 설치 작품으로 영화 내면에 숨겨진 이미지를 드러내 보인다. 김세진의 비디오 작품 ‘욕망의 바다’는 TV 드라마나 영화의 뻔한 소재와 진부한 줄거리 등을 꼬집고 있다.
김창겸의 ‘편지’는 과거라는 시점에 대해 편지를 쓰는 행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스크린에서만 상영될 수 있는 영화와 달리 스크린 밖의 오브제와 영상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경주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선거유세 퍼포먼스를 담은 비디오를 출품했으며 이중재는 ‘엉클샘’으로 할리우드의 시장개방 압력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2층 전시관에는 앵그르의 명화 ‘샘’을 패러디한 박혜성의 영상작품이 눈길을 끈다. 누드 여성이 항아리를 들고 주변공간이 넘칠때까지 물을 붓는 장면의 영상으로 영화와 미술의 기승전결 구조를 강조한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살린 박화영의 ‘Everything okay?’,회화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이광호의 ‘태몽’ 등 영화와 미술이 만나는 작품들이 재미있다(02-736-4371).

'영화에서 영감을 얻다' - 한국일보 2005. 1. 9
새해 들어 건물 바깥에 ‘광주천의 숨소리’라는 제목의 영화간판을 내건 사비나미술관. 미술관이 무슨 꿍꿍이로 이럴까? 사실 영화간판은 작가 박태규의 동명 다큐영상을 홍보하는 작품이다. 미술관 안에서는 박태규와 강홍구 김범수 김세진 김창겸 박경주 박혜성 박화영 이광호 이중재(총 10명)가 ‘시각서사’를 타이틀로 영화에서 영감을 얻거나 영상 편집적 요소가 강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김범수는 버려진 필름을 재활용한 ‘히든 이모션(Hidden Emotion)’을, 박혜성은 앵그르의 명화 ‘샘’을 패러디한 영상작품을 선보인다. 스크린 앞에 세운 오브제와 여기에 비친 영상이 겹치면서 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는 장면을 완성하는 비디오설치 ‘편지’와 평범한 한 남자의 초상에 영상을 쪼이면 마오쩌둥의 초상으로 변화하는 ‘중아적 자아’를 내놓은 김창겸은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할리우드영화 등장인물이 총을 쏘면 한국영화의 인물이 맞고 쓰러지는 영상을 보여주는 이중재의 ‘엉클샘’은 스크린쿼터 폐지반대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미술의 범위가 회화 조각 건축에서 설치 미디어아트 등으로 날로 확장하는 요즘, ‘움직이는 사진(모션 픽쳐)’인 영화와 미술이 서로 뚜렷이 경계를 지을 수 있는지에 의문을 갖는 이도 꽤 있을 것 같다. 전시는 2월26일까지. (02)736-4371

'미술이 영화와 접목되면' - 문화일보 2005. 1. 10 신세미 기자
(::사비나미술관 '시각서사展'::) 극장의 영화간판은 주요장면과 등장인물을 통해 영화의 줄거리를 부각시켜, 관객을 불러모으는 홍보수단이다. 간판자체가 영화 또는 미술은 아니지만, 미술과 영화가 만나는 접점의 구실을 해 왔다.
광주의 극장에서 영화간판을 그렸던 박태규씨는 미술관 전시용으 로 영화 ‘만추’ ‘와이키키브라더즈’등을 4.8m크기의 대형간 판 및 입간판으로 그리는 한편, 광주천 생태를 다룬 13분 길이의 다큐멘타리 영상 ‘광주천의 숨소리’를 만들었다. 한편 김범수 씨는 영화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재편집작업을 거쳐, 필름자체의 색과 무늬를 활용해 색다른 평면회화와 설치작품을 시도했다.
서울 사비나미술관의 ‘미술과 영화-시각서사 전’(2월26일까지) 은 미술에 끼친 영화의 영향에 주목한 기획이다. 박태규씨의 영 화간판그림이 안팎에 걸려있는 전시장에는 박씨를 비롯해 국내 미술작가 10명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작가들은 “미술은 한동 안 무언가 보여지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지만, 20세기 후반들어 미술은 무언가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처럼 무언가 이야기하는 비중 이 높아졌다”고 작품을 통해 발언한다.
이광호씨는 거실 소파에 앉은 어머니사진을 캔버스에 꼼꼼하게 재현한 극사실화를 비디오로 찍는 등 세 벽면에 전시중인 사진 회화 영상를 연결하는 스토리를 연출한다. 김창겸씨는 자화상 위로 중국 마오쩌둥의 얼굴을 투사해 관람객의 동선과 시선에 따라 액자 위로 화가와 마오쩌둥의 얼굴이 교차한다. 강홍구씨는 영 화 스틸사진에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합성해 영화주인공처럼 묘사했고, 박경주씨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선거유세 퍼포먼스를 4개의 비디오에 담았다.
이밖에 박혜성씨는 실제 모델작업을 통해 앵그르의 ‘샘’처럼 여인의 어깨위 항아리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3분 길이의 영상으로 제작했다. 또 이중재씨는 각종 국내외영화의 장면을 편 집해 스크린쿼터폐지 반대메시지를 담았다.

'미술과 영화가 만났다' - 서울신문 2005. 1. 10 김종면 기자
현대는 영상의 시대다. 어느 예술장르도 영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영상으로부터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쪽이 미술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미술은 영상매체의 확산 속에 움직임을 시각화하거나 몽타주 기법을 활용하는 등 영화로부터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영화 또한 갈수록 미술을 동경한다.‘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시각적 요소와 ‘보는 이야기’라는 서사적 요소를 갖춘 영화의 경우 미술적인 요소들은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과 영화 시각서사(視覺敍事)’전은 영화와 미술이 이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는 점에 주목한 흥미로운 전시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이면서도 서사적인 특성이 영화의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강홍구 김범수 김세진 김창겸 박경주 박태규 박혜성 박화영 이광호 이중재 등 10명이 작품을 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김창겸의 비디오 설치작품 ‘편지’. 영화적인 서사구조를 강조한 ‘편지’는 ‘과거’라는 시점에 대해 편지를 쓰는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스크린 밖의 오브제와 영상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시각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속삭이는 듯한 방백이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방불케 한다. 박혜성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명화 ‘샘’을 소재로 한 영상작품을 내놓았다. 작가는 시간에 따라 수위가 변하는 것에 일종의 서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물이 밑으로 쏟아지면서 점점 차올라 흘러넘치는 영상에는 나름대로의 기승전결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이 영화와 미술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중재의 ‘엉클샘’은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라는 메시지가 담긴, 조금 다른 차원의 ‘목적예술’이다. 미국 영화 속의 인물이 쏘는 총에 한국 배우가 맞고 쓰러지는 영상을 통해 할리우드의 시장개방압력을 고발한다. 전시장에는 다양한 영화 입간판들이 설치돼 있어 미술과 영화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각 체험을 제공한다. 전시는 2월26일까지.(02)736-4371
2005/01/25 10:16 2005/01/25 10:16

시각서사 전시 안내

project/시각서사 0414 | 2005/01/25 09:53


미술과 영화의 만남 : 시각서사 Art & Film : Visual Narrative
2004. 12. 31(금) - 2005. 2. 26(토) / 사비나미술관 전관
강홍구, 김범, 김세진, 김창겸, 박경주, 박태규, 박혜성, 박화영, 이광호, 이중재
* 초대 : 2005. 1. 12(수) 5시

미술인과 영화인의 만남 뮤지엄 토크 2005. 1. 15 - 2. 12 매주 토요일 3시
1. 15(토) : 강홍구(작가) 김세진(작가) & 김계중(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 프로그래머)
1. 22(토) : 김창겸(작가) 박화영(작가) & 박동현(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 집행위원장)
1. 29(토) : 김범수(작가) 이광호(작가) & 장윤현(영화감독)
2. 5(토) : 박경주(작가) 박태규(작가) & 문성준(다큐인 영화감독)
2. 12(토) : 박혜성(작가) 이중재(작가) & 전성권(SENEF영화제 프로그래머)

보여주는 이야기, 시각서사
<시각서사>는 현대 시각예술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서사성의 문제를 영화예술의 관점에 견주어 살펴보는 장이다. 20세기 초중반의 시각예술이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다는 무언가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20세기 후반 이후의 시각예술은 무언가 보여주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애쓰고 있다. 요컨대 시각성 일변도에서 시각성과 서사성을 함께 가져가려는 쪽으로 시각예술의 의미와 범주를 넓혀온 것이다.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시각적 요소와 ‘보는 이야기’라는 서사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종합예술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들의 연속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술인 것이다.
시각예술과 영화는 ‘시각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것과 ‘서사적 이야기 구조를 배치하고, 배열한다’는 점에서 시각성과 서사성을 각자의 본령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현대 시각예술이 시각성에다가 서사성을 입히는 쪽으로 변모해온 바, 이 전시가 주목하고 있는 시각과 서사의 문제는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성을 강조하는 시각예술 작품들이 서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야말로 광범위하게 종합적인 예술장르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서사적 구조에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는 예술장르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예술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무언가 보여주는 것을 동시에 구사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서사적인 시각이미지를 그 결과물로 남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사성을 강조하는 시각예술은 ‘그림을 움직여서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0인의 출품 작가들은 설치, 영상, 회화, 입체 등 시각예술의 각 영역에서 영화예술과 접점을 형상할 수 있는 서사와 시각의 문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왔다. 이들의 작품은 편집의 미학, 서사의 접점, 시각의 공유라는 세 가지 요소에 걸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편집의 미학_영화와 시각예술의 상호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편집의 미학이다. 제작과정의 규모를 놓고 생각해보면, 영화는 감독, 배우, 연출자, 촬영감독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만들어 내는 프레임들을 모아 하나의 필름으로 만들어낸다. 반면에 시각예술은 철저한 개인의 자신에 대한 고뇌와 사투,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어나는 크고 작은 담론 내지 이야기들을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어 낸다. 양자 모두 의미 전달을 위해 ‘편집’이라는 특정한 절차를 거친다. 영화에 있어서 ‘편집’은 서사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이며, 동시에 작품의 내용을 좌우하는 요소이다. 영화의 편집자가 펼치는 편집의 묘미를 시각예술이라는 영역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미지들에 관계성을 부여하는 작가들의 손길이다. 그것이 평면회화이든, 영상작품이든 간에 영화의 편집자와 예술가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쉽게 놓쳐버릴 수 있는 모습들을 자르고, 붙이고, 재구성하여 의미를 강조하거나 때론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서사의 접점_영화가 내러티브 구조에서 출발하고, 시각예술이 시각효과를 강조한다는 이분법적 견해를 넘어서 두 장르의 예술은 서사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감각적인 영상’이라는 말처럼 시각적 표현이 중시되고, 시각예술에서는 작품의 이미지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만들어내는 ‘상황들’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구성함으로서 감상자가 작품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양자 모두는 내용과 표현 형태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서사의 접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예술은 영화의 서사구조를 강조하거나 무너뜨리면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처럼 사전에 구성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성과는 다른 차원의 감성적인 코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시각의 공유_시각예술이 영화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움직임을 시각화하거나 몽타주 기법을 활용하는 등 일련의 자양분을 공급받았듯이, 감각적인 영상작품이 시도하는 일련의 실험들은 영화에 기법적인 다양성과 풍부한 감수성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영역이 서로간의 미래상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시각의 공유를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이번 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시각서사>는 시각예술과 영화매체가 인간의 인지능력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이며,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린 공통점을 가진 예술이라는 점을 확인시킨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2005/01/25 09:53 2005/01/2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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