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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일회 무박이일 : 2010년 여름 고양스튜디오 체험기

critic & column | 2010/09/29 07:12


일기일회 무박이일 : 2010년 여름 고양스튜디오 체험기

두어 달 전에 <양계장 무정란과 창작스튜디오>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양계장에서 자라는 닭들이 쏟아내는 무정란들이 마치 박제화한 제도 공간, 특히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있는 작가들이 생산해내는 틀에 박힌 예술작품들 같다는 세간의 비평을 끌어다가 레지든스 프로그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글이었다. 애초에는 예술가들에게 작업실 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였으나 공간제공 그 자체를 넘어서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는 매개 공간과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진 게 요즘의 창작스튜디오들이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 언어에 빠지지 않도록 다양한 주체들과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예술인들끼리의 만남, 제도미술 안에서의 만남일 뿐, 예술가 사회, 제도와 비제도, 주류와 비주류의 접선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덧 양계장 소릴 듣고 있다는 얘기였다.

저녁 만찬을 시작할 때, 인사말을 하면서 그 글의 일부를 소개했다. 오늘날의 창작스튜디오를 두고 일각에서 양계장이라고 부른다며, ‘오늘 여기 국립양계장에 모인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하게 얘기해보자’는 취지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아련한 밤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그날 내가 그곳에서 만난 작가들 가운데는 양계장 무정란을 쏟아내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을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진지하고 절박하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민하고 있었다. 미술제도가 한정한 공간 안에서 어떻게 예술적 실천과 예술가로서의 생존을 병행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들의 육성은 미술관이라는 제도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지난 수년간 고양스튜디오를 비롯한 많은 레지던스 프로그램 공간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설펐지만 이제는 매우 중요한 제도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항간에는 미술시장 편향의 작가가 있는가하면 레지던스 편향의 작가가 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창작스튜디오가 그 위상이 높아지고 다원화하는 만큼 각각의 다른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시점이다. 국립창작스튜디오의 미션이 있다. 국가 단위의 예술정책을 펼치는 공간으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 나라의 예술가들에게 기회와 자극을 제공하고 전국과 전지구의 예술계에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목표 말이다. 여러 얘기가 있겠는데, 지자체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나로서는 국립창작스튜디오에서 표준말이 아닌 지역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대세라고는 하지만 예술마저 표준화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울 경기권 이외의 중부권이나 영남, 호남의 작가들의 지역어를 고양이나 창동에서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일박이일 프로그램이 의도했던 바, 게스트와 호스트 사이의 진한 교감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0여년 전에 미술전문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로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매우 귀중한 학습의 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얻는 정보들은 공식적인 간담회나 인터뷰, 탐방, 취재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표면적인 정보에 비해서 훨씬 더 농밀한 것들이었다. 그 시간은 진담만을 제공하지 않았다. 긴 시간동안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간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알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1박2일이 아니라 무박2일일 때가 더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2층 테라스에 둘러앉아 집단음주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가면서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는 결국 단 두 사람만이 남을 때까지 우리는 인간을 발견하기 위해 긴 대화를 이어갔다.

말과 글의 간극이었다. 시간이 깊이지고 대화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자 일행들의 대화가 각자의 일들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어쩌다 비평적 글쓰기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종종 미술관 큐레이터가 아닌 미술평론가의 입장에서 전시서문이나 리뷰를 쓰곤 한다. 그 글들에 대한 논평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데, 얘기인 즉, 내 생각과는 다르게 글을 대하는 작가 입장에서는 훨씬 더 심난하게 받아들였더라는 얘기다. 그것은 작가와 평론가로서 글로 만난 적이 있는 작가나 그냥 간접적으로 내 글을 대했던 사람들 사이에 공통되는 의견이었다. 지금까지 작심하고 누군가의 작품을 비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행해본 적이 별로 없었고 그들의 말이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행간을 읽었노라고 했다. 숨길 수 없었던 그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했다. 평생에 단 한 번의 기회로 알고 누군가와의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다. 만남에는 여러 방식이 있겠는데, 사적인 만남과 공적인 만남이 있을 것이고, 제도가 주선하는 만남이 있는가하면 개별적인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만남이 있을 것이다. 국립스튜디오는 만남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계속 일하는 매개자들이나 그곳을 거처가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여러 주체들이 각자 나름의 생각으로 만남을 가질 것이다. 그 많은 만남들은 대부분 매우 짧은 순간 스쳐지나간다. 때로 그런 만남들은 매우 어색하거나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러한 결핍과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각각의 작업실을 쓰윽 둘러보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훌쩍 떠날 수밖에 없는 만남 이외의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다. 일박이일은 예술가들의 야행성 라이프 스타일에 잘 맞는 괜찮은 자리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고언이 있다면, 이 프로그램의 이름 바꾸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무박이일로.

김준기(미술평론가)

2010/09/29 07:12 2010/09/29 07:12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 : 진기종 개인전 리뷰

critic & column | 2010/09/27 20:49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 : 진기종 개인전 리뷰

진기종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태환경의 위기상황에 관한 비판적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축소재현물을 통해서 지구 전체가 처한 생태계 교란의 위기를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다루고 있다. 작은 모형들은 심난한 사건과 정황들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고, 때로는 심난하게 표현한다. 그는 생태환경 문제의 근저에 국가와 자본의 탐욕이 얽혀 있다는 것을 노치지 않는다. 아마존 숲을 파괴하는 트랙터는 동시대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괴의 현장을 대변한다. 몰아치는 파도 속에 기름통들이 둥둥 떠있는 바닷가에는 낭만과 키치가 공존한다. 푸른 지중해 바다를 검게 물들인 파괴된 유조선이나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새들, 녹아내리는 빙산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북극곰, 방사능에 노출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얼굴, 기형의 금붕어 등 위기상황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이 박물관 진열장 속에 오롯이 박제되어 있다.

화석연료의 연대기를 목재와 석탄, 석유의 순서로 집약한 <기찻길 시리즈 1>는 익숙한 도상의 재현을 넘어서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예술적 득의에 성공하고 있다. 일리야 레핀의 명작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패러디한 축소재현물 <걸프만의 노예>는 특히 걸프전의 주역들을 등장시켜 기름전쟁의 부조리를 조롱한다. 공들여 만든 작은 모형들은 유리상자 안에 갇혀있는 박제된 현실을 표상한다.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우리 눈에 매우 익숙해진 회화나 사진 등의 평면 이미지들을 입체로 번안하는 과정에 블랙 유머를 가미하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진기종은 생태와 환경이라는 의제를 단순히 ‘득템’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발언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게 비판적 리얼리스트의 자질을 가진 예술가로서 주목 받을만하다.

문제는 그의 비판적 언설들이 처한 동시대 미술지형과 매체환경 속에서의 난맥상이다. 걸프전이 기름전쟁이었다는 세간의 논평은 이미 지나간 옛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난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 또한 첨예한 의제를 생성하지 못한다. 헐리우드 언덕이 섬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경고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지구온난화에 대한 저항도 자본과 권력의 손아귀에 머물러 있다. 이렇듯 비판과 저항마저도 제도화한 상황에서 진기종이라는 한 예술가의 비판은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는가?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과 예술가 진기종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실제의 사건이나 상황을 재현하거나 표현하고 있다기보다는 매스미디어라는 가상의 실재가 유포한 정보들을 재구성한다. 그의 지구 리포트는 생태환경에 관한 보고서이기보다는 생태환경을 다루는 매스미디어에 관한 보고서에 가깝다.

진기종의 성찰과 비판은 현실에 대한 참여와 개입이기보다는 매스미디어가 토해내는 부산물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재구성한 미디어 후행(後行) 리포트이다. 따라서 진기종의 이 순발력 떨어지고 진부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들은 실재의 상황을 관통하지 안/못하는 관념의 재구성이다. 그의 작업에 대해 이른바 ‘관조적 시선’이라는 논평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액티비스트들의 사례를 제외하면, 특정한 의제나 장소를 다루는 예술가들의 발언은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다. 따라서 비판적 시각으로 특정 의제를 설정하고 예술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서사를 유포하는 예술가의 실천은 매우 굼뜨고 더딜 수밖에 없다. 첨단의 정보사회에서 예술적 소통을 통해서 동시대성을 확보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가령 한국의 서해안에서 벌어진 기름유출사건이나 4대강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크레인 삽질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가 자신의 서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적어도 제도미술 속에서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제도 예술계에서는 ‘지금 여기’의 문제보다는 ‘그때 거기’의 문제를 다루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 진기종 또한 이러한 현대미술의 난맥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걸프만과 아마존, 북극 등과 같은 글로벌한 이슈들과 서해안이나 4대강 같은 지금여기의 로컬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예술이 비판을 하고 있다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김준기(미술평론가)

* 월간미술 2010년 10월호 기고문

2010/09/27 20:49 2010/09/27 20:49

한큐협 9월 소식

artpd clip | 2010/09/17 20:35


한국큐레이터협회는 호주와 동아시아의 현대미술에 대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9월 13일에는 호주 시드니현대미술관의 글렌 바클리를 초청하여 한큐협 월례포럼을 가졌다. 덕수궁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이날 포럼에서 글렌은 작품수집정책, 원주민 출신 예술가의 연구, 미술관 리노베이션 계획 등에 대해 소개했으며, 참석자들과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9월 15일에는 우리협회와 아시아미술문화학회, 광주시립미술관이 공동주최한 세미나 "동아시아현대미술의 지형도"를 열었다.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상임부이사장의 동아시아의 미학적 정체성에 대한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한창윤(광주시립미술관 전시운영과장), 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이서영(미술평론가) 등의 발제자들이 한중일의 현대미술을 개괄하고, 동아시아의 네트워크 강화 방안 등에 대해 토론했다.

2010/09/17 20:35 2010/09/17 20:35

말과 글과 미술

critic & column | 2010/09/10 17:46


말과 글과 예술

근대 이후의 미술은 독자적인 시각언어의 장이다. 그것은 시서화(詩書畵) 일체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나 개념을 대신하여 생긴 회화의 개념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건축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거나 생활 속의 쓸모에 따라 만들어졌던 장식품 같은 생산물들이 조각이나 공예와 같은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근대체제 아래에서의 시각적 생산물이 예술로서 성립한 바로 그 지점에 독자적인 언어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같은 언어라도 문자언어와 시각언어의 장은 사뭇 그 영역과 범주가 다르다. 물론 문자 자체도 시각적 기호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두언어와 짝을 이루는 문자언어의 경계와 구분되는 시각언어의 영역은 문자기호와 시각기호의 범주로 나뉜다. 문제는 이 문자언어와 시각언어의 관계가 현대미술의 생산과 매개와 향유의 전영역에 걸쳐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같은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시각적 기호들 가운데서도 특정한 생산와 매개, 향유의 체제에 놓인 것들을 미술의 이름으로 영역화 한다. 특히 특정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시민사회가 공인하는 장소에서 작품을 공표하고 감상하는 일은 미술의 장(場)을 구성하는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미술작품에 대한 공공연한 합의와 인정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말과 글의 형태로 존재한다. 미술작품을 둘러싼 말과 글은 그것에 대한 비평적 언술을 의미한다. 말과 글은 미술작품에 후행한다(고들 생각한다). 가령 전시회 팸플릿 앞에 붙는 작품설명서나 비평지에 실리는 주례사 정도가 전시회를 둘러싸고 미술작품에 후행한다는 생각 정도는 수용할만하다. 그러나 미술작품에 관한 말과 글이 미술작품에 대해 구속이나 예속의 관게에 놓인다면 그것은 위험천만하다. 그것은 상호보완과 상생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말과 글은 무의미한 말의 성찬이거나 글의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 말과 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시회의 서문과 비평문, 미술사의 기록과 평가, 그리고 구두언어로 존재하는 그 많은 칭찬과 비난, 소개와 추천 등등.  그러나 정작 그 말과 글들이 얼마나 엄밀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묻지 않는다. 혹세무민하는 비평가의 글에 대한 비평은 말할 나위도 없고, 아전인수하는 작가들의 뒷담화들 또한 만만찮다. 이렇듯 미술계에서 횡횡하는 말과 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권력을 견제하는 방법은 말과 글의 면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말과 글’에 대한 말과 글이 필요하다. 흔히들 말하는 메타 크리틱의 수준을 넘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 말과 글이 시각언어의 보조수단이면서 또한 독자적인 표현수단이자 새롭게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참된 말과 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기호의 삼각형을 둘러싼 기호작용을 살펴보는 것이 시각언어와 말과 글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실재-기표-기의'의 삼각 관계는 사건이나 상황으로서의 '실재'와 그것을 재현으로서의 시각예술작품, 즉 '기표',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의 삼각 관계가 이른바 기호작용의 주요 삼요소이다. 예술작품을 둘러싼 말과 글의 구조도 이것과 같은 구조 위에 놓여있다. 객관적인 물질형식이나 현상으로 존재하는 '예술'과 그것을 근거로 기술과 분석과 해석을 수행하는 '말과 글', 그리고 그것이 재생산하는 '의미'의 삼각구조가 그것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후자의 삼각구조가 예술작품 그 자체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예술을 둘러싼 말과 글의 난맥상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예술작품과 예술현상의 안과 밖에 두루 걸쳐있는 전방위의 관점이 있어야 예술이라는 실재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예술작품/현상과 예술가 주체, 예술의 내재적 논리와 그 바깥의 상호작용,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과 사회를 둘러싼 균형잡힌 관점이 있어야 예술을 둘러싼 말과 글이 예술소통의 메커니즘 속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 국립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세미나 발제(2010.9.12 PM14:00-16:00)를 위한 메모

2010/09/10 17:46 2010/09/10 17:46

春秋, 마르코스 노박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critic & column | 2010/09/09 08:27


春秋, 학고재
20세기 이후 한국의 문화지형은 오랜 문화전통에서 나온 고전과 따끈따끈한 동시대를 연장선상에서 살펴보는 일이 매우 불편할 정도로 단절과 이식의 길을 달려왔다. 이 전시는 그 불편함을 딛고 고려와 조선의 명작들과 한국의 신작들을 나란히 걸었다. 서로 다른 어법과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클래식과 컨템포러리의 대비를 통해서 기술과 예술, 문자언어와 시각언어의 차이와 유사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마르코스 노박, 공간화랑
‘암몬의 산(酸): 신(神)과 단백질, 장소와 지구로부터’라는 주제를 가진 이 전시는 생명체의 존재근거를 과학적 본질로부터 예술적 실존으로 가시화했다. 가상건축가로도 불리는 미디어 아티스트 노박은 첨단의 하이테크보다 익숙한 로우테크를 구사하면서도 동시대 최전선의 이슈를 끌어낸다. 과학과 종교가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면, 과학과 예술은 보편과 특수를 공유하면서 통섭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2010/09/09 08:27 2010/09/09 08:27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critic & column | 2010/09/03 08:16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선무(線無). 그 이름이 함의하는 바, ‘선 없음’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선언이다. 선무의 예술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이다. 그는 체제로부터 이탈한 개인이다. 그는 체제가 전혀 다른 북한에서 남한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체제에 관한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옮긴 예술가 선무에게 있어서 탈주의 정신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깊이 투영된 실존이다. 비록 그것이 지배와 복종으로 얽혀 있는 인류 문명사 자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부터 또 다른 체제로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남한으로 이주한 탈주의 실존은 선무의 예술세계 근간을 형성하는 주요 모티프이다. 선무의 예술적 발언은 서로 다른 경제구조나 정치구조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접한 세상의 면면, 특히 그가 태어나서 자라난 북한 땅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차이를 넘어서기까지 남한에서 체험한 7년의 세월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뒤바꾼 긴 세월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내면 체험을 키우고 공론영역에서의 발언으로 공표하기에는 선무의 남한 체험은 아직 짧고 얇은 수준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것을 듣고 보았을 것이고, 이곳 남한 사회마저도 자본과 정치권력의 작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한을 이야기하지 않고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서사 대부분은 북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점, 선무가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점을 들어 그의 서사를 국외론자의 낯선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로 들을 것인지는 선무를 독해하는 우리의 사유와 감성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체제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는 데에 있다.

선무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분단 이데올로기가 고착화한 한반도의 양면을 동시에 성찰할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의 소유자가 이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무의 그림은 ‘세상에 부러움 없이 행복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는 지금 여기 남한의 상황과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에 합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위기의 일상화이다. 전쟁 발발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분단과 대결의 구도를 종식시키지 못한 채 평화와 위기,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무는 이 분단과 대결의 상황에서 스스로 한 쪽으로부터 다른 한 쪽으로 이탈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선택한 새터민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생존의 가치와 방향에 관한 복잡다단한 서사들, 즉 절망과 희망, 상처와 환희 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한 대결구도 속에서 탈주의 실존을 담은 선무를 통해서 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치나 미디어가 양산하는 정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그의 그림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선무의 작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집단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해맑게 인간의 본성을 숨기지 않을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세상에 부럼 없이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는 장면을 여러 장면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행복을 선포하는 어린 아이의 배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선무의 그림은 이처럼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북한은 민중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는 여전히 체제의 우월성이나 가능성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선무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친숙한 것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양식을 패러디해서 그 양식이 애초에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과연 그들은 행복한가? 나아가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의 여부는 타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바에 의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기획하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아이팟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북한의 소녀를 보면서 여전히 ‘우리는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선무의 상황설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선무의 그림에서 보이는 비판적 서사들이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는 구조의 동질성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그가 남한에 정착한 첫해에 열린 2002 월드컵 게임 열풍을 접한 선무는 남한 사회에도 집단주의 광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보고 느꼈다고 한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단일한 사안에 몰입하는 대중의 모습은 북한에서 익히 보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단의 광기 속에서 안도하며 희열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은 아마도 인류 공통의 것일 텐데, 문제는 그것을 조작하고 활용하는 권력의 속성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것, 권력과 대중,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관한 선무의 통찰이다.

선무의 그림이 가지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함은 스타일에 있다. 선무의 그림 스타일에는 두 가지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그의 그림에는 대담하게 그은 선의 맛, 즉 일획의 감성을 잘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붓질 자국을 남기지 않은 색면 처리로 형상의 윤곽을 명쾌하게 구분짓는 것이 있다. 전자의 그림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말하는 조선화의 영향이 확연히 보인다. 후자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유니크한 화면 구성과 닮아 있다. 조선화의 영향은 붓질뿐만 아니라 색채의 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밝고 맑은 색채를 구사한다는 조선화의 원칙은 선무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완연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참새나 갈대, 갈매기 등의 표현은 몰골 필체의 획선으로 대상의 동세를 잡아내는 날렵한 붓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그것은 키치 회화의 범본이 되는 매우 친숙한 스타일이다. 동일한 형상을 반복해서 배치한다거나, 단일한 것 또는 대비되는 두 색의 병치 등으로 심플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포스터 양식의 친숙함도 선무 그림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간결한 형상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비판적 메시지를 담는 선무 그림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패러디한 블랙 유머이다. 그것은 북한이 선전하고 선동하는 체제의 우월성이나 조작된 행복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북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대면하면서 그 사유와 감성에 동의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북한의 비극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 우리의 시선이 단지 한반도 북쪽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비판과 연민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무의 예술을 보다 넓은 해석의 지평으로 펼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역지사지에 있다. 우리 안의 파쇼 우리 안의 가부장, 우리 안의 우상의 모습을 선무 그림에서 발견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자본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일상 속 폭력과 야만의 그림자가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다는 점. 경계없는 삶을 지향하는 실존의 예술가 선무의 그림이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깊이 다가오는 이유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선무 개인전 (2010,9.11-, 이듬갤러리, 부산) 서문.

2010/09/03 08:16 2010/09/03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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