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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지역주의가 싹트고 있다

critic & column | 2010/05/28 21:26


상호지역주의가 싹트고 있다

한국의 여러 도시 미술문화공간들이 함께 만든 온-오프라인 네트워크 전시 [A4 DEMO]가 열리고 있다. 전시제목은 ‘민주주의를 위한 예술(Art for Democracy)'과 'A4 시위(Demonstration)'의 뜻이 담긴 중의어이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이들은 각 도시의 오프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활동하되 사안별로 연대하는 예술인 네트워크 ‘아트포액트’이다. 웹사이트
www.art4act.net은 행동하는 예술(Art for Act)을 표방하는 이들의 아지트이다.

온라인 전시에는 5월 25일 현재 174명의 작가가 작품을 올렸다. 추가 등록을 마치면 참여작가는 2백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13개 도시에서 동시에 열리는 오프라인 전시들도 개막을 마친 상태다. 신학철, 임옥상, 홍성담 등과 같은 중진에서 김성연, 임영선, 박영균, 노순택 등의 중견, 그리고 구헌주, 전준모, 서평주 등과 같은 신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출품작들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작품을 비롯해서 동시대 정치 현실을 비판하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모색하는 작품들이 다수를 이룬다. 생태, 소수자 등 생활세계 속의 민주주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작품들도 많다.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민주주의에 접근하는 시각이 있는가하면,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 속에 담겨있는 민주주의에까지 눈길이 넓어진 것이다.

각 공간의 디렉터와 큐레이터, 그리고 독립큐레이터, 작가 등이 참가한 17인의 공동기획자들은 각 도시의 작가를 섭외하고 그 원본을 해당공간에 전시했다. 타 도시의 작가들의 작품은 A4 사이즈로 프린트해서 전시했다. 디지털과 인터넷 환경을 활용한 네트워킹으로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참여 공간들도 매우 다양하다. 서울의 Lab39, 청주의 톡톡, 광주의 미나리, 부산의 아지트, 수원의 대안공간눈 등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점공간들이 참가했다.

각 도시의 풀뿌리 문화지형을 새롭게 구축할 변화 양상들도 눈에 띈다. 의정부의 문화살롱공과 대구의 작은공간이소, 제주의 이디가갤러리, 대전의 카페이데, 춘천의 스페이스공 등 낯선 공간들도 많다. 안산의 스푼빌, 김해 봉하마을의 노사모전시관, 전주의 남부시장하늘정원 등과 같은 커뮤니티스페이스도 있다. 생활과 예술, 일상과 문화를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사회 현실을 다룬 비판과 풍자, 해학 등의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다. 13개 도시 공간들이 예술의 생산과 매개를 공유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 도시의 공간들이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지역간 네트워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일한 중심을 넘어서는 다원화한 분극의 네트워킹이다. 자치와 분권의 가치로 21세기 문화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소중한 씨앗이 여기에 있다. 바야흐로 폐쇄적 지역주의를 넘어 상호지역주의(inter-localism)가 싹트고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세계일보 기고문

2010/05/28 21:26 2010/05/28 21:26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거대서사, 홍성담

critic & column | 2010/05/28 21:25


홍성담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의 흐름을 대변하는 실천적인 예술가이다. 현실과 발언, 임술년 등 일련의 예술가 그룹들이 주도한 전시장미술운동 진영은 매체의 확장과 형상미술의 방법론을 가지고 당대의 현실을 다룬 비판적 리얼리즘 경향의 작가들이다. 반면에 광주자유미술인협회와 두렁과 같은 그룹들이 주도한 현장미술운동 진영은 걸개그림, 공동창작, 시민교육 등의 새로운 미술운동을 내세우며 당대의 현실 속으로 뛰어든 행동주의 경향의 작가들이다. 홍성담은 광주자유미술인협회의 리더였다. 그는 80년 광주항쟁의 현장에 붓을 들고 뛰어 들었으며, 이후에 목판화 연작으로 참혹한 살육의 현장과 시민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널리 알렸다. 80년대 후반에는 민미련을 결성해서 전국적인 현장미술운동을 주도했으며 89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루었다.

홍성담의 작품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예술가의 몸으로 치러낸 격동의 시대에 대한 대응은 냉철한 자기와의 투쟁과 혹독한 고통을 동반해야만 했다. 그는 투쟁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 차분한 성찰의 시기를 보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그 성찰의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다. 홍성담의 작품 경향을 분기하는 현장미술과 전시장미술의 간극을 넘어선다. 그의 2000년대 이후의 근작들은 90년대 중반까지의 전투적인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저항과 명상이라는 주제의식 아래 성찰적 자세로 승화한 결과물들이다. 2000년대 이후 그는 현장과 전시장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동아시아 담론을 이야기하는 예술가로 활동해왔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이후 10여년에 걸친 홍성담의 근작들을 모아 선보인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남도시사 공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광주시립미술관 분관으로 바꾼 상록전시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예술가의 근작들을 돌아봄으로써 민주주의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의미를 새긴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홍성담 개인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라는 역사의 주기 계산에 따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전시의 핵심은 성찰의 메시지를 담은 예술가의 실천이 자기세계의 자장 안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사유와 실천의 결과라는 점을 홍성담이라는 예술가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여 우리는 홍성담의 체험이 어떠한 실천을 매개했는지 그리고 그 실천은 어떤 경로로 또 다른 체험과 실천을 매개했는지를 차분하게 살펴봄으로써 그의 예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광주 오월은 한국사회를 민주주의 시대로 변환한 분수령이다. 그 역사의 현장을 예술적 실천의 영역으로 이끌어냈던 홍성담은 1999년의 개인전 <탈옥> 이후 동아시아 담론을 다뤄왔다. 이 전시는 그의 2000년대 이후 근작들을 모아 흰 것과 검은 것, 빛과 물 등의 이원적 요소를 변증법적 통합의 차원에서 다뤘다. 두 가지 요소를 상호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제국주의 비판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평화체제에 관한 그의 메시지는 역사 성찰과 현실비판의 두 축이 함께하는 큰 이야기이다. 미소설화를 중얼거리는 이 시대에 거대서사를 펼치는 예술가 홍성담에게서 거장의 풍모가 드러나는 이유이다.

한 예술가에 관한 온전한 이해는 특정한 형식이나 도식으로 그 작가를 규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가령 ‘5월광주작가 홍성담’이라는 명명은 광주항쟁정신이나 홍성담이라는 예술가 모두에게 유익한 표현이 아니다. 특히 예술가가 역사 속의 한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당대의 실천 결과를 평생의 업적이나 업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 스스로 퇴행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비상한 노력을 하지 않고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일 수 있다. 우리가 홍성담에게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행동주의자의 면면을 발견하는 것은 스스로 광주탈출을 감행하여 그 굴레를 벗었기 때문이다. 물론 홍성담 이외의 많은 예술가들이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동시대성을 안고 부단한 자기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홍성담의 경우 스스로 그 상징성의 무게를 덜어놓음으로써 또 다른 경로의 사유와 실천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홍성담이 동아시아 담론을 표방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광주라는 도시, 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체제 안쪽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 동아시아 평화체제에 대한 열망을 근저에 깔고 동아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들을 다뤄왔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비판 연작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한국의 문제에서 동아시의 문제로 확산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제국주의 비판은 일본의 과거사 문제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비판은 한국과 미국, 나아가 중국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평화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을지에 관한 열렬한 갈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홍성담은 일본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특수성을 국가주의 비판이라는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의 국가주의 비판은 아나키즘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삶에 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의 사유와 실천은 홍성담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 때 진보의 모든 것을 민족주의 담론과 등치시켰던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홍성담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왔다. 그것은 마치 일제강점기의 신채호가 아나키즘과 민족주의라는 상반된 가치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과도 유사하다. 그것은 20세기 초의 신채호가 처해있던 동아시아의 상황과 21초의 홍성담이 맞이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실 사이에 흐르는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치열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그 모순을 넘어서려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운명일 것이다. 문제는 민족주의 담론이 민족국가의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유와 실천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데 있다. 신채호가 그랬던 것처럼 홍성담 또한 국가의 테두리는 넘어서는 평화체제를 꿈꾸고 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미국과 중국, 나아가 대한민국 안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한다.

홍성담의 서사 구성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20세기의 문화식민 상황을 거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있어 수천년동안 이어온 신화의 그 넓고 깊은 이야기들은 삶 속에 녹아있는 흔적들은 있으되 큰 뿌리를 이루는 원형은 낯선 것이기만 하다. 그는 이 신화의 원형을 찾아 자신의 독창적인 시각언어로 재구성했다. <신몽유도원도>나 <가화> 등의 대작들은 전통회화의 서사구성 방식을 차용해 삶과 죽음, 실재와 가상, 과거와 현재의 틀을 넘어서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야스쿠니 연작은 동아시아 담론을 풀어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시나리오는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다. 그는 일본의 국가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야스쿠니를 통해서 상징투쟁을 벌여왔다. 그는 이 연작을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심지어는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전지구적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일체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확산해왔다.

<야스쿠니의 미망-5>는 임신한 여성과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 수탈당한 일본 여성, 온갖 잡귀 등을 등장시켜 국가주의의 미망이 도사리고 있는 야스쿠니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간코쿠 야스쿠니-1>은 박정희 전두환, 삽, 경찰, 청화대, 용산 남일당 등의 상징들 동원해서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국가주의를 들춰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탁경현>은 가미가제로 산화하기 전에 마지으로 아리랑을 불렀다는 조선인의 영혼이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 묶여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입체 설치 작품이다. 홍성담은 1993년 출옥 이후 매일 매일 그림일기를 그리고 있다. 대작 페인팅이 아니라 소품 드로잉에 해당하는 이 작품들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예술가의 예민한 촉수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분단상황을 압축한 <평양소견>, 광주항쟁의 주역인 선배를 그린 <합수 윤한봉>, 국가주의의 그림자를 포착한 <태안반도>, 국가폭력의 실상이 드러난 <용산참사> 등에 관한 그의 단상들이 담겨있다.

10년여에 걸친 홍성담의 근작들은 87체제 이후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는 리얼리즘 예술가의 고심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87년 이전의 리얼리스트들이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 현실 비판과 참여를 실천했다면,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홍성담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쟁점은 도시나 국가, 민족 등의 규정을 넘어서는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는 일이었다. 특히 민족주의가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점, 특히 홍성담의 경우 진영테제 속에서 민족주의 담론과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2000년대 이후 근작들이 국가주의 비판을 통해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 담론은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영원한 난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분단으로부터 유래한 이 복잡다단한 모순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국가, 자본, 개인, 생태, 문화 등의 문제들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담론을 지향하는 홍성담의 거대서사는 광주와 한반도의 특수성을 동아시아와 세계의 보편성으로 확산했다. 광주 문제가 민족, 국가, 동아시아, 세계의 문제로 확산하면서 특수와 보편의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홍성담은 현실의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예술적 실천이라는 미시적 담론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원형과 평화체제라는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성담을 민족과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아나키스트로 재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

2010/05/28 21:25 2010/05/28 21:25

A4Demo, 홍성담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critic & column | 2010/05/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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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Demo

2010.5.23-, www.art4act.net

서울, 의정부, 춘천, 수원, 안산, 청주, 대전, 전주, 광주, 대구, 부산, 김해, 제주 등 13개 도시의 대안공간, 카페 등 다양한 공간에서 오프라인 전시를 열고 이를 온라인으로 연동한 프로젝트. 13개도시 14개의 전시공간, 18명의 공동기획자, 200여명의 참여작가들이 함께 한 연계기획이다. A4 용지 프린트를 이용한 이 전시는 'Art for Democracy'를 주제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참여작가들은 노무현 1주기, 6.2 지방선거, 천안함 사태 등과 맞물린 동시대의 민주주의 이슈들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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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 흰 빛 검은 물
2010.4.24 - 6.6,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80년 광주 5월은 한국사회를 민주주의 시대로 전환한 분수령이다. 그 역사의 현장을 예술적 실천의 영역으로 이끌어냈던 홍성담은 1999년의 개인전 <탈옥> 이후 동아시아 담론을 다뤄왔다. 이 전시는 그의 2000년대 이후 근작들을 모아 '흰:검은' '빛:물' 등의 음양이론을 변증법적 통합의 차원에서 다룬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비판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평화체제에 관한 그의 메시지는 역사 성찰과 현실 비판의 두 축이 함께 하는 큰 이야기이다. 미소설화를 조잘 거리는 이 시대에 거대서사를 펼치는 큰 예술가의 풍모가 역력하다.

2010/05/25 10:51 2010/05/25 10:51

일루전 회화, 일루전 게임 : 김기수

critic & column | 2010/05/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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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전 회화, 일루전 게임

화가가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고 표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도전이다. 김기수는 사각의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회화의 강박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작가이다. 그는 화가라는 고유명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매체다변화를 이룬 예술가이다. 그는 사각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던 규정된 언어로부터 벗어나 사각의 틀을 부분적으로 깨트리기도 하고 사각이 아닌 원이나 타원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난 김기수의 화면은 원을 이루거나 사각의 한쪽을 붓질의 윤곽선으로 처리하는 변주 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두 개의 원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캔버스에서 금속 패널로, 붓질에서 레이저 커팅으로, 회화에서 오브제로 나아간 그의 작업은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유지하면 진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매체 변화를 통해 형식적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그는 금속 조각들을 잘라서 붙여 하나의 화면을 만든다. 그 금속 조각들은 사물들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스테인리스 미러와 그 녹슨 철판 두 가지이다. 그의 화면은 매끈한 표면의 수퍼 미러와 부식 시킨 철판이 한 화면을 이룸으로써 상호대비되는 이원적 요소가 공존하는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사물을 반영하는 거울과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녹슨 철판을 섞어 놓음으로써 그 앞에 선 관객은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거울/작품의 존재를 보다 확연히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김기수가 의도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거울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하는 일이다. 매끈한 거울이 아닌 작가의 붓질 흔적이 개입한 거울 너머로 존재와 반영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갈등과 공존의 구조 속에서 극적인 내러티브를 생성하게 하는 김기수 작업의 매력이 여기 담겨있다.

그는 금속 패널을 이어붙인 평면의 외형을 거울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 다시 달을 암시하는 흔적을 남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달은 반영이라는 주제의식 아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양과 음의 질서에 대한 헤아림을 전제로 한다. 달은 해의 존재를 반영한다. 달은 달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만 해의 빛을 반영했을 때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마음 속의 고요를 불러오는 달은 우리의 마음을 담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것은 뜨거운 태양의 열정보다는 차가운 달의 고요를 불러 모시는 일이다. 김기수가 해가 아닌 달을 다루는 것은 그의 감성이 사물의 존재와 반영에 긴밀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매끈한 거울 표면에 달을 형상을 새겨 넣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붓질을 디지털 정보로 전환하고 그것을 정교한 컴퓨터 커팅으로 잘라낸 후 일일이 맞추는 김기수의 작업은 이질성을 한 화면에 단단히 묶어 둔다. 붓질의 형상을 디지털 정보로 치환하고 그것을 다시 금속 판재로 옮기는 과정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상호 교환 과정이 이뤄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섬세한 수공을 반복한다. 하여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숙련된 기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매끈한 거울 표면과 일획의 붓질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김기수의 화면은 그 자체로 대칭관계가 공존하는 극적인 서사를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거울과 녹이 공존하는 화면 자체가 지시하는 내용만이 아니다. 그 화면을 바라하는 관찰자는 작품의 형상과 더불어 화면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김기수가 제시하는 스테인리스 미러는 관찰자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거울은 매끈한 거울이 아니라 녹슨 철판을 새겨 넣은 불편한 거울이다. 또한 망치로 두드려 매끈한 표면을 일그러트린 망가진 거울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기수의 거울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일그러진 거울의 불편함을 통해서 실재와 반영의 불완전한 관계를 비판적 시각으로 재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매끈한 거울 표면을 파고든 녹슨 판재의 형상이 붓질의 느낌을 살림으로써 작가의 행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도 새겨볼만한 대목이다. 티끌하나 없이 깔끔하게 사물을 반영하는 거울의 질서를 비트는 예술가의 행위를 붓질의 흔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각 이미지의 일루전이 우리의 인식과 감성에 대해 작동하는 절차와 방법들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 물론 그가 물질과 환영에 관한 인식론적 접근을 연구자의 차원에서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과학적 탐구정신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편집증적인 감성기제를 작동해서 사물과 환영, 존재과 반영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거울에 끼워넣은 녹슨 철판 조각들을 통해서 거울의 반영 작용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김기수의 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금속 패널을 짜맞춘 원이고, 다른 하나는 광목천 이미지를 담은 원이다. 그는 이 두 개의 원을 나란히 걸어둠으로써 반영과 은폐를 병치시킨다. 그는 금속 패널 옆에 페인팅 패널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드러냄과 숨김을 병치한다.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는 현현과 은폐를 상기시키는 일이다.

사물의 형상을 가려버리는 광목천 이미지를 그렸던 김기수의 일루전 회화가 사물의 형상을 반영하는 거울의 물질적 특성을 비트는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천으로 사물을 감싸서 묶어 놓은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려진 존재, 숨겨진 진실의 내러티브를 구사해온 그의 작업이 금속 패널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의 변주 단계로 접어들어 완숙한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애초에 그가 사물을 감싼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은폐 너머의 실존에 대한 갈구였다면, 근작들에서 나타나는 거울 이미지들은 실재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실재와 환영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일루전 회화의 단전적인 재현에서 일루전 게임의 단계로 진화하고 있는 김기수의 작품 앞에서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그 너머의 자신을 들여다 볼 일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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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5 05:06 2010/05/15 05:06

기억의 편린을 포착하는 모멘트 : 김원용

critic & column | 2010/05/15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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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편린을 포착하는 모멘트

자신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는 일을 기억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예전에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일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정보를 수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음 속에 무언가를 떠올리는 기억이라는 표상작용은 인간의 사유와 감성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기억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인간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원용은 기억의 조각들을 포착하는 (바로 그) 순간들을 <모멘트> 연작에 담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기억이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기억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새로운 사유를 획득하려는 성찰의 결과이다.

기억은 심상(心像, image)의 뿌리이다. 하나의 기둥 위에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는 나무들은 그 아래 수없이 갈래를 뻗은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 가지다. 무수한 가지와 잎을 피우는 우리 마음의 아래에는 미세하게 뻗쳐있는 기억이라는 뿌리가 있다. 그 뿌리는 굵은 줄기에서 잔털 같이 촘촘한 그물구조에 이르기까지 천변만화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가지와 잎새들처럼 뿌리 구조 또한 생장하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기억이란 가변적인 조각들의 연쇄이다. 고정불변의 기억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단편적인 기억 조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떠돌 뿐이다.

김원용은 이렇듯 굵직한 줄기로부터 미세한 잔털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엮어내는 기억의 편린(片鱗)을 포착한다. 그것은 물고기의 비늘-린(鱗) 한 조각-편(片)처럼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존재하는 기억 조각들을 담는 일이다. 그는 인간의 자아를 생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기억의 존재 방식을 형상화하기 위해 찢겨진 종이의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사진을 찢거나 구겨 놓은 것 같은 형상을 거대한 부조 패널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이 지난 세월동안 쌓아온 삶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그가 다루는 기억 저편의 이야기들은 1983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현재에까지 이른다.

그는 마치 A4용지에 담긴 한줄 낙서와도 같은,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과도 같은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서 애틋하게 어루만진다. 자신의 기억을 다루는 그의 방식에는 일종의 시니시즘이 담겨있다. 그가 다루는 기억들은 반듯한 형상을 가진 단정한 기억이 아니다. 찢겨지고 구겨진 종이 위에 담긴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련히 멀어져간 과거를 바라보는 냉정함이 담겨있다. 찢겨져 나간 종이의 단면 위에 부조 형상으로 새겨진 얼굴들에는 극적인 긴장이나 아늑한 부드러움도 없다. 삶 속에 녹아 있는 기억의 편린들을 추적하는 김원용의 이야기는 자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보다는 기억 속의 어느 한 순간을 심플하게 짚어내는 간명한 내러티브들이다.

그는 삶을 구성하는 과거의 흔적들을 들춰낸다. 그 안에는 현실을 구성하는 과거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눈가리고 입막은 인물들의 면면에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안정적인 기표로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유동하는 편린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한 손으로 한 쪽 눈만을 가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길도 있다.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으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한 눈을 뜨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인물의 불안한 시선도 있다. 입을 막은 채 실눈을 뜨고 한쪽을 응시하는 시선도 있다.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 구겨진 인물 사진 이미지도 있다.

찢겨지고 구겨진 종이는 김원용 근작의 출발이자 결과이다. 그는 종이를 찢는 행위와 그 결과를 작업의 모티프로 삼았다. 그것은 조각 작품의 형상을 만들어낸 시각적 결과물의 출발점으로서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찢겨진 종이 이미지는 기억의 잔상과 망각된 기억 두 가지 모두를 담아내는 기표이다. 종이를 찢어버리는 과정과 찢겨진 종이라는 결과 두 가지 모두가 김원용의 근작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들을 삭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 기억의 존재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김원용의 근작은 기억의 편린을 다루는 스타일로서 독자성을 확보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들어있는 기억 일반의 모습을 간추린 상징적인 형상들을 담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떠도는 기억들을 개인과 집단, 인간과 사회, 의식과 무의식 등의 다양한 층위 속에서 면밀하게 검토하는 일이다. 지금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간의 삶 속에 담겨있는 매우 일반적인 체험에 근거한 보편적인 기억의 문제들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그로부터 들을 이야기는 김원용이라는 예술가 주체의 매우 특별한 체험에서 나오는 특수한 기억의 편린들이기 때문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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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용 개인전 서문 : 인사아트센터, 2010.5.

2010/05/15 03:54 2010/05/15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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