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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안의 미술과 장소 밖의 미술

critic & column | 2010/03/22 23:17


장소 안의 미술과 장소 밖의 미술

근대 이후 예술의 문제에 있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생산의 독립성, 또는 예술가 주체의 자율성이다. 그것이야 말로 예술을 예술로 성립시키는 근간이다. 20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한 공공미술이 공공성 개념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율성의 문제가 더욱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공 장소에서 공적 기금으로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미술로서의 공공미술이 전근대적인 주문 생산과는 다른 방식의 예술 생산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예술의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예술가 주체의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공공성을 지지하는 예술 생산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장소의 문제는 이러한 질문에 중요한 해답을 제공한다. 공공미술에 있어 재원과 의제의 문제와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 장소의 문제이다.

시간과 공간을 불문하고 고정불변의 절대적 영원성을 발산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 장소라는 개념은 매우 근본적인 차원에서 시각예술의 논리에 질문을 던진다. 특히 장소특정성(site-specific)이라는 이슈가 예술 생산의 목표와 절차, 방법 등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이래 장소의 문제는 공공미술의 근본적인 주제로 부각하고 있다. 특히 공공장소에 설치할 목적으로 제작하는 공공미술 작품은 일반적인 ‘작업실-전시장’ 작업과는 다른 특수한 국면에 놓인다. 장소는 안팎으로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한다. 장소 안의 미술과 장소 밖의 미술(in-situ art & ex-situ art)은 공공미술의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비되는 논쟁점을 생성한다. 전자는 장소의 규정 속에 놓이고, 후자는 장소로부터 이탈한 독자적인 논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은 공공장소에서의 장소특수성과 조응하는 미술개념이다. 공공장소는 다양한 주체들의 이해와 요구가 집결하는 공간이자 서로 다른 감성과 정서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공공장소는 특정한 미학적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공존의 미학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미술은 배제의 미학이 아니라 공존의 미학을 추구한다. 그런데 공공장소에서의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공공미술은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 시대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근대 시대의 공공장소는 특정한 지배자가 독점하는 공간이었지만 근대 시대의 공공장소는 시민 다수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전근대 시대의 공공미술은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근대시대의 공공미술은 예술 자체의 미학적 논리에 충실한 자율적 영역의 그것이었다.

모더니즘 미학의 지배적인 논리는 배제이다. 새로움의 이데올로기는 형식적 아방가르드를 양산했다. 그것은 독창적이며 독창적이어야 했다. 따라서 그것은 공존이나 상생의 미학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는 배제의 미학이었다. 예술가의 독보적인 조형언어를 통해서 그들이 결과론적으로 배제한 것은 다른 예술가의 진부한 언어가 아니라 예술 수용자들이었다. 모더니즘 미학을 일방적으로 관철시켜온 20세기 공공미술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천재적인 가치를 가진 예술가의 언어가 공공장소를 지배하는 독보적인 언어를 구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근대 시기의 종교나 정치를 대신하는 광장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전근대 시대의 공공장소의 작품들은 지배자의 언어였다면 근대 시기의 공공미술은 예술가의 언어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술적 소통의 공간이었다.

여기 모인 네 예술가들은 모더니즘 미학의 긴 그림자 끝자락에 서있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시각언어를 구축하는 데 매진 해온 중진과 신진 작가들이다. 만약 이들의 조형언어가 공공장소와 만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박정선은 선재의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해서 공간을 확장하는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그는 판재의 팽창하는 기운을 담고 있는 곡선을 통해서 공간을 유영하는 선과 면과 색의 요소로서 공간의 시각적 흐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유리캐스팅 오브제에 빛을 투사하고 그 그림자를 포착한 이미지들을 다시 가공하여 동영상으로 재구성한 안종연의 애니메이션은 우주를 집약한 만다라의 판타지로 공공장소의 맥락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조용준은 여러 개의 원들을 다양하게 겹친 드로잉들로부터 입체를 얻어내고 그 입체의 색채를 다양화 한 조용준의 작업은 절재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해석의 여지를 넓히고 있다. 육면체의 입방체를 평명화한 한송준의 기하학적 패널은 면과 면 사이로 드러나는 여백에 마음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이 전시는 그 절차와 방식, 그리고 근본적으로 예술가의 고유한 조형언어와 장소의 만남에 관한 질문이다. 전시의 준비와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네 예술가들의 차별성과 유사성, 개별과 군집, 독보와 협업 등 다양한 가치와 개념들은 예술(가)의 자율성과 공공성에 관한 새로운 체험을 주었다. 이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협업이다. 탈근대시대의 공공미술은 공존과 상생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는다. 예술가의 지위와 역할을 작품이라는 물질형식의 생산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공영역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조직하는 매개자로 전환하고 있다. 매개자로서의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협업이다. 예술가들 사이의 협업뿐만이 아니라 예술가와 타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수용자 또는 사용자들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과 수용의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의 관계성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협업의 힘이다. 그것은 생산을 위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의 사용을 창조적인 문화소비로 잇는 확대재생산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 [in-situ & ex-situ] (델아트, 2010.3.25-4.00) 전시 서문.

2010/03/22 23:17 2010/03/22 23:17

[시장미술의 탄생] 리뷰 : 주문의 변동과 미술, 그리고 시장미술

critic & column | 2010/03/22 22:20


[시장미술의 탄생] 리뷰
주문의 변동과 미술, 그리고 시장미술

‘글로벌 아트마켓의 성장과 예술의 몰락’. 이 책의 표지에 담긴 시장미술 비판이다. 얼핏 보아 선동적인 수사 같아 보이는 이 언변 속에 사실은 저자가 바라보는 당대 시각예술에 관한 깊은 문제의식이 베어있다. 저자는 미술시장에 관한 그 많은 언설들을 단숨에 넘어서는 제도비평의 용어로서 ‘시장미술’이라는 말을 던졌다. 그것은 확연히 문제적이다. 그는 한국의 그 어떤 저서들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미술시장을 다루고 있다.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시장은 시각예술의 생산과 매개와 소비를 구성하는 우리시대 최고의 가치이자 궁극의 목표이다. 시장체제 속에서 정교하게 얽혀있는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비평가로서 그는 매우 과감하고 전향적으로 미술시장에 포획된 미술을 시장미술이라는 용어로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보다 더 문제적인 대목이 있다. 미술시장이 탄생한 지 수백년이 지난 후에야 그 체제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미술이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중세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걷어낸 르네상스 예술이 세속주의(secularism) 작가로 불린 알베르티로부터 바로크 시대의 루벤스와 같은 당대 최고의 주문화가를 낳은 데에 이르기까지 미술시장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맹아적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수백년 전부터 서울 광통교 인근에 (향이나 비단과 함께)그림을 파는 가게가 등장했으며, 궁정화가들의 그림이 시장에 나돌았는데, 김홍도와 정선과 같은 인기작가의 그림은 집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생긴 정두환서화포가 1930년대까지 성업을 했고, 해강 김규진은 고금서화관이라는 갤러리를 만들어 성업 하다가 평양에 기성서화관이라는 분점을 내기도 했다. 한성서화관은 도화서 출신의 안중식 조석진을 전속화가로 두기도 했다. 당대최고의 주문화가인 어용화사가 시장미술가인 화랑 전속화가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근대화에 뒤쳐진 한반도에서도 미술시장의 탄생은 전근대 또는 초기 근대 시대인 100년이 훨씬 넘은 일이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의 미술생산과 유통 체제가 본격화하거나 활성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장미술체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근대 이전의 미술,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미술은 주문미술이었다. 시장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주문미술의 시대를 넘어 시장미술의 시대를 열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주문을 넘어서 자율적인 생산주체로서의 예술가 개념을 성립시킨 것은 신흥권력으로 떠오른 부르주아지의 ‘보이지 않는’ 주문체제, 즉 시장미술체제였다. 가령 인상주의 화가들이 파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반면 뉴욕에서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인식과 감성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러한 차이를 반영한 것은 미술시장이었다. 뉴욕의 미술시장은 새로운 시대의 사유와 감성으로 새로운 미술을 선택했다. 주문생산으로부터 독립한 예술가들의 자율성은 근대를 일군 새로운 지식생산으로 크게 공헌했다. 미술시장은 근대적인 미술 체제를 견인한 핵심적인 장치이다.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는 미술시장의 역사 그 자체이다. 상투적인 관점에서 시장미술의 탄생을 이야기하려면, 미술시장의 태동과 발전 과정 속에서 초기와 당대를 비교 검토해야 할 것이다. 미술시장의 변화에 따라 예술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대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들여다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을 생략한 채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횡횡하고 있는 시장미술에 단도직입하여 ‘시장미술의 탄생’과 ‘예술의 몰락’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후기자본주의 시대인 동시대를 시장미술이 탄생한 시기라고 부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전지구화 시대의 아트마켓과 경매, 미디어 등 동시대의 다양한 지층들을 파헤치며 미술시장의 작동방식을 탐구한다. 이 가운데서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의 간접적인 주문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주문으로 바뀌었으며, 예술의 자율성은 타락의 나락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도달한다. 저자는 자율성에 기반 한 예술가들이 20세기를 관통하며 이룩한 모더니즘의 성좌를 예술이라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20세기 말 이후부터 본격화한 글로벌 아트마켓의 등장과 시장의 주문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시장미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초기자본주의 시대의 미술시장을 통해서 보수적인 화단의 낡은 틀을 깨치고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쟁취한 모더니즘의 선구자들이 훌륭한 예술가로 미술사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반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미술시장에서 성가를 이루고 있는 예술가들은 필자의 용어대로 시장미술을 쏟아내는 타락한 예술가로 비판 받고 있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예술을 낳는다. 지금 당장 시장체제를 거부하거나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회구성체는 변동할 것이며, 예술체제 또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그의 성실하고 진지한 진단과 비판은 섣부른 예견보다 훨씬 더 큰 신뢰를 가져다준다. 이미 예술체제의 변동을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서 화폐가치의 확대재생산을 발견하려고 하는 보이는 손의 노골적인 주문을 넘어서 예술생산을 공동체와 공공, 생태, 도시, 소수자 등의 가치와 결부해 ‘새로운 주문’의 단계로 견인하고자 하는 저변의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저자의 당대비판이 미래에 관한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시대 미술에 대한 우려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로운 예술체제의 도래가 가까워 올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래에 대해 확언하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 예술생태의 다양한 지층들을 섬세하게 들춰 진단하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체제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따라서 이 책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미술시장이 초래하는 노골적인 주문에 응대하는 시장미술을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체제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고마운 책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아트프라이스 2010년 4월호 기고문 : 심상용 저, [시장미술의 탄생] 리뷰

2010/03/22 22:20 2010/03/22 22:20

김피디 늬우스 : 한큐협포럼 100320

critic & column | 2010/03/22 16:33


김피디 늬우스 : 한큐협포럼 100320

한국큐레이터협회(회장 박래경)는 3월27일에 아르코미술관 세미나실에서 한큐협월례포럼을 열었다. 이 행사는 매달 해외의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한국의 큐레이터들과 대화하는 자리로서 이달에는 일본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의 큐레이터 이가라시 리나를 초청하여 <문화인류학자로서의 큐레이터>라는 주제로 발제와 토론을 벌였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이가라시는 최근 한달 반가량 방글라데시에 체류하면서 현지의 미술계와 그 배경인 사회 전반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심층조사를 벌였는데, 그 과정과 결과를 소개함으로써 인류학자로서의 큐레이터의 위치와 방법론에 관한 토론장을 마련했다. 국내외 큐레이터들의 대화를 통해 공통 의제를 개발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이 행사는 지난 2월의 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차이 짜오이를 시작으로, 5월에 한스 D. 크리스트(슈트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 디렉터), 6월에 쿠로다 라이지(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7월에 조이스 판(싱가포르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등을 초청할 예정이다.

2010/03/22 16:33 2010/03/22 16:33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 최민화 심준섭

critic & column | 2010/03/22 14:54


최민화 : 靑春-Prologue
2010.3.10-3.30, 나무화랑

최민화의 청춘 이야기는 절망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삶의 희망에 관한 방백이다. 흐릿하고 얇은 그의 그림 속에는 청춘의 동시대성이 담겨있다. 물감의 두께를 최소화는 얇은 붓질에 흐릿한 색채를 구사하는 최민화 특유의 그림에 동시대 청춘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는 ‘부랑’이나 ‘분홍’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텅비어있는 ‘청춘’의 공허함을 들춰낸다. 특히 인사동 거리로 오윤을 불어들이는 50대 화가 최민화에게 있어 청춘은 기억 너머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심준섭 : Sound of Reaction

2010.3.4-3.21, 브레인팩토리

작가 자신을 괴롭히는 고질병인 이명현상을 가시적인 설치 작품으로 옮겨놓은 설치작업, ‘반응의 소리’에는 실재의 물소리와 재현된 물소리가 공존한다. 이른바 청각의 시각화이다. 그는 피스이씨 파이프를 연결해서 구조물을 만들고 그 메커니즘으로 실제의 물과 조작된 사운드를 흘려보냄으로써 실재와 가상을 공존하게 한다. 영상과 소리, 설치 등이 뒤섞인 복합매체 작업이다. 그것은 개인 신체의 문제로부터 사회 구조의 거대한 메커니즘을 은유하는 데에로 확장하는 예술적 소통이다.

2010/03/22 14:54 2010/03/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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