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대전2012 : 에네르기 포스터와 서문

critic & column | 2012/09/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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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대전 2012 : 에네르기-Ener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을 지향하는
<프로젝트대전>은 우리시대가 직면한 인류사적인 보편의 문제와 더불어 과학도시 대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확장하는 격년제 국제미술행사이다. 우리는 대전의 과학 인프라와 시립미술관을 비롯하여 숲과 강, 그리고 원도심 등의 도시 전체를 잇는 전방위적인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과학과 기술, 자연과 도시,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이해와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적 소통이 우리사회의 새로운 합의도출을 위한 공공영역임을 직시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합의도출에 기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과학도시 대전의 정체성은 과학자들의 커뮤니티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의 예술적 소통을 통하여 문화적 정체성으로 확장한다
. <프로젝트대전>은 연구원과 대학, 기업 등과 미술관의 협업을 통하여 실질적인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을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의 협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공공기관과 시민사회, 언론, 기업 등의 협업체제를 만들어 과학예술융복합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것이다. <프로젝트대전>이 지향하는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은 과학도시 대전을 문화도시 대전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문제이며, 동시에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가치가 상호보완하며 공존하는 생동감 넘치는 도시를 향한 가치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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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대전 2012>의 의제는 에너지이다. 에너지라는 키워드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전 영역을 관통하며 우리시대 최전선의 의제이다. 물리학과 화학, 천문학, 나아가 생명과학의 에너지 문제는 자연 이해의 지름길이다. 인간 개체와 군집을 넘나드는 사회과학의 에너지 문제는 인간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기술과 연관한 에너지 의제는 하이브리드 기술이나 대안에너지 등의 문제를 떠올린다. 특히 후쿠시마의 대재앙 이후 자연의 재난 못지않게 인공적인 재난으로 떠오른 핵에너지의 문제는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와 인류 전체의 공동의 미래에 관해 성찰적인 의제를 제시한다.

에네르기는 우주만물과 같은 자연과학적 실체와 더불어 인간과 사회화 같은 인간과학 또는 사회과학적 실체 모두를 두루 관통하며 움직임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힘이다
. 동아시아에서 수천년부터 기()라는 개념어를 사용하면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 이해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서구에서는 근대과학의 시대에 들어서 에너지라는 주제를 과학적 의제로 채택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어인 에네르기(Ener)’는 동서양의 에너지 의제를 합친 말이다. 로마자 표기 ‘energy’ 가운데 마지막 음절인 ‘-gy’를 한자어 로 표기함으로써 동서양의 에너지 개념을 함께 성찰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한중일에서 각각 [gi], [qi], [ki]’로 읽히는 이 단어는 로마자와 합쳐서 에네르기(Ener)[energy]’라는 합성어를 이룬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저서
<기학>에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경계를 넘어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했다. 이치(理致)와 기운(氣運)이 하나의 것인지, 아니면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나뉘는 것인지를 놓고 대립한 두 논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우주의 원리를 활동운화로 보고 운동하는 에너지의 실체로써의 기를 강조했다. 우주는 스스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운화지기는 우주의 운동에너지를 이르는 것이며, 형질지기는 존재의 형체와 질료를 이루는 기를 말한다. 그는 운화하는 기를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운화지리 또는 유행지라라고 했다. 특히 사람의 유행지리를 추측지리라고 했다. 최한기 기학의 기본은 운화지기와 형질지기, 유행지리와 추측지리가 짝을 이루는 데 있다.

한기의 기학은 무형이 아닌 유형의 것을 대상으로 하며, 기의 운화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증험이 가능한 학문이며, 기일원론과 경험과학을 토대로 한 학문이다. 최한기의 기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관통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이해의 길, 즉 인간과학으로 통한다. 본질과 현상, 이론과 실천 등으로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보이는 이와 기의 문제를 넘어서 기일원론을 주장한 최한기의 철학은 오늘날 자연과 사회, 인간을 이해하려는 통합과학적 사유의 지평을 연 선구적인 사상이다. 탈근대적 융복합의 시대정신을 갈구하는 현대사회에 있어 근대 초기의 조선철학자의 울림이 큰 이유이다. 조선말 실학자의 이 메시지는 여기 대전에서 열리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공존하는 <프로젝트대전 2012 : 에너르기-Ener>의 탈근대적 통합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융복합 예술프로젝트에 깊은 울림을 준다.

프로제트대전은
5개의 프로젝트로 이뤄진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동시대 첨단의 의제를 견지한 사이언스아트 프로젝트로서 미술관 전관에서 열린다. 주제기획전에는 22()의 작가들이 출품한다. 한국의 작가들은 회화와 영상, 공공미술프로젝트, 설치 등의 작업으로 에네르기라는 주제에 접근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회화로 풀어내기도 하고, 과학적 이해의 범주를 초원하는 인간의 영성을 담아내묘, 생명에너지와 도시에너지를 과정으로서의 예술프로젝트로 다루기도 한다. 사이언스아트를 본격적으로 다뤄온 국외의 에술가들은 에너지와 엔텔레키와 같은 근본문제를 토탈아트로 담아내며, 생명 에너지, 인터랙션, 우주의 에너지, 전쟁과 에너지, 대재앙과 에너지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한밭수목원에서 열리는 현장미술프로젝트이다
. 그것은 대전과 대전 인근의 공주에서 수십년동안 이어져 온 자연미술의 저력을 네트워킹한 결과이다. 참여작가들은 공주에 있는 야투레지던시에서 지내며 수목원 현장의 공간을 활용한 입체 설치 작품을 진행했다. 14인의 국내외 작가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연공간을 체험과 이해했고 그것을 현장 작업으로 연결했다. 자연미술은 과학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에 대한 접근을 모토로 하는 자연미술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과 예술적 실천을 접목하고자 하는 과학예술과 매우 큰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실체로서의 물질세계에 대한 예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미술관과 연구원
, 대학, 기업 등의 협업을 통하여 융복합예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아티스트프로젝트이다. 대전문화재단과 대전시립미술관이 공동 주관하는 이 프로젝트는 아티언스페스티벌(9.1-9.4, 대전문화재단 주최)과 프로젝트대전2012(9.19-11.18, 대전시립미술관 주최), 두 행사의 전시 콘텐츠이다. 아티스트(ArtiST)‘Art in Science & Technology’의 합성어로서 과학기술과 결합한 예술적 실험을 뜻하는 과학과 예술의 협업 프로젝트이다. 참여작가들은 과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특히 4()의 작가는 과학예술 레지던시를 거쳐서 대전의 과학 인프라와 결합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은 예술가와 과학자의 1:1 매칭워크샵, 대덕연구단지 연구실 탐방, 과학예술융합세미나 등의 공동워크샵 등을 진행하여 실질적인 과학예술의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 4>는 대전의 원도심인 대흥동 일대에서 펼쳐지는 원도심프로젝트이다. 이 기획에는 대전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작업해온 예술가 다수가 참가했다. 이들은 원도심의 역사성과 현재성, 그리고 그 시간의 축선에서 형성된 공동체성 등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가지고 원도심 곳곳을 탐험했다. 이들은 100년 전에 탄생한 신생도시 대전을 만들어낸 원도심의 에너지를 다뤘다. 그 에너지는 열량을 소모하고 쇄락해가는 별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그 이면에 재생과 재활의 관점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신성 같은 것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에서 대전을 방문한 국내외 작가들 또한 이 도시에 만나는 다양한 장면과 상황들 속에 파고들어 장소를 재발견하고, 관계를 생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마지막 프로젝트는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을 총원과 각론의 차원에서 심도 깊게 검토하는 학술심포지움이다
. 이 행사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테크놀로지와 예술 등 다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과학과 예술, 그리고 에너지 문제를 다룬다. 프로젝트 대전은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 프로젝트로서 첫 행사의 주제는 에너지이다. 전시의 개막에 맞춰 열리는 학술 심포지엄은 프로젝트대전의 대전제인 과학예술의 문제와 올 해 행사의 주제인 에너지 문제를 다룬다. 발제와 토론의 참가자들은 미학과 예술학을 전공한 예술이론가들과 큐레이터들은 물론 자연과학 분야의 과학자와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과학과 예술의 융복합과 과학예술의 지위와 역할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자연과학과 에너지의 문제를 비롯해 대안에너지와 후쿠시마 이슈, 과학예술 사례 등의 발제가 이어진다. 국내외의 토론자와 관객들과 함께 할 이번 행사의 내용은 녹취를 거쳐 도록에 게재하여 과학예술 담론을 공유하는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모든 것을 가르고 나눠서 잘고 깊게 파고들었던 근대의 패러다임을 지나서 그것들을 뒤섞어 공존하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내는 융복합이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시대정신과 대면하고 있다
. 사회 전 영역의 체계적인 분화과정을 거친 근대 이후 영역과 영역이 만나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는 탈근대적 통합이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객관적 진리탐구의 영역인 과학과 상대적 가치경쟁의 영역인 예술 또한 영역간의 교류와 협업을 통하여 상호성을 넓히고 있다.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이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통합의 시대에 있어 과학예술은 최전선에 위치한 서로의 예술이다. 그것은 상호부조의 관점에서 자아와 타자를 성찰하며 차이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융복합의 시대의 새로운 좌표이다. 

김준기
GIM Jungi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2/09/05 13:37 2012/09/05 13:37

최동열, 강홍구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2012년 9월호

critic & column | 2012/08/21 22:08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2012년 9월호

최동열, 8.12-8.24, 갤러리소
‘신들의 거주지 – 안나푸르나 & 칸첸중가’라는 부제를 단 최동열의 개인전. 그는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지대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회화라는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해 고행의 과정을 거쳤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한 회화라는 물질 이면에는 수행으로서의 예술이 있다. 최동열 특유의 회화적 표현이 빚어낸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는 평생을 유랑 속에서 살아온 예술가의 치열한 삶이 녹아있다.

강홍구, 8.30-9.19, 원앤제이 갤러리
강홍구는 작업실에서 북한산에 이르는 산책길에서 만난 도시인들의 텃밭과 도시 속의 자연을 담아 녹색연구로 풀어냈다. 사진의 재현에 허기를 느낀 것일까? 그는 흑백사진 위에 색을 입히는 고전적인 수법을 썼다. 그는 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초록을 탐구했다. 지리멸렬한 일상 위에 색을 입히는 마음으로 자연 속의 초록과 인공 속의 초록을 재발견했다.

2012/08/21 22:08 2012/08/21 22:08

소셜 퍼포먼스, 1인시위 :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

critic & column | 2012/07/27 19:02


소셜 퍼포먼스, 1인시위 :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 2005년 10월 31일. 대책위원회는 ‘구본주 소송 종결’에 대한 대책위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런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7년이 지난 지금. 예술인의 지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일고 있다. 예술인복지제도에 관한 논의를 비롯해서 몇몇 가지 정책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팍팍한 세상살이 속에서 예술인들의 신산한 삶은 여전히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씩 변해간다. 그해 여름을 달구었던 소셜 퍼포먼스, 구본주-삼성화재 릴레이 1인 시위는 예술(인)에 관한 사회적 합의도출의 의미있는 출발이었다. 단 한 사람의 조용한 외침, 1인 시위는 세상을 바꾸는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소셜 퍼포먼스이다.

2005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서울 한복판의 삼성화재 본사 앞에서는 예술가들의 일인시위가 이어졌다. 그해 7월 4일에 처음 열린 안성금 작가의 일인 시위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100여명의 예술인들이 매일 점심시간 마다 삼성화재 본사 앞에 섰다. 작가와 큐레이터, 평론가, 시인, 영화인, 가수, 학생 등 다양한 캐릭터의 시위 참가자들이 요구한 것은 예술인을 무시하는 자본의 논리를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예술은 사회적 노동이다’라는 주장 속에는 예술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제도적 모순에 항의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예술인들의 릴레이 1인시위는 구본주-삼성화재 사건 때문이었다. 2003년 가을, 촉망받던 조각가 구본주가 서른 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포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해자 측 보험회사인 삼성화재는  구본주의 유족을 상대로 보험금을 낮추기 위한 소송을 벌였다. 구본주라는 예술가는 무직자이니 배상금을 깎자는 논리였다. 삼성화재는 ‘피해자 과실 범위 70%, 가동 연한(정년) 60세, 경력 불인정, 소득 불인정, 무직자에 준한 배상’ 등의 논리를 폈다. 물론 손해배상금을 둘러싼 피해자와 보험회사의 이견은 비단 삼성화재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삼성이라는 재벌그룹의 방계회사인 삼성화재가 예술가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은 안그래도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소외된 예술가들의 존재 근거에 큰 상처를 주었다.

‘삼성화재의 구본주 손해배상 판결 항소 사건’이 알려지자 예술이들은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점심시간에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이 참가했다. 1인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의 캐릭터는 물론 그들의 시위양태도 제 각각이었다. 예술가 특유의 기질로 현장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고, 그 장면을 사진이나 드로잉 방식으로 인터넷 상에 유포한 1인시위 리포트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도 이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대책위원회는 모금활동과 사건해결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예술가 복지를 논의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특히 삼성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서 문화공헌 운운하는 삼성그룹의 방계회사에서 예술인을 백안시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데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그 해 가을에 이르러 삼성화재의 협상안을 받아들인 유족의 결정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사건을 일단락을 지었다. 당시의 자료들은 지금도 인터넷 카페 <조각가 故 구본주 소송(삼성화재) 해결을 위한 예술인 대책위원회>( http://cafe.naver.com/gubonjuartright.cafe)에 그대로 남아있다.

예술인들의 릴레이 1인시위는 예술가의 유족과 삼성화재라는 보험회사의 배상금을 둘러싼 싸움에 연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구본주-삼성화재 사건의 핵심은 예술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공론화 한 데 있다. 물론 예술가의 노동은 일반적인 노동과 같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 그러나 예술노동의 특수성을 이유로 그것을 백안시하거나 사회적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1인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예술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존재를 구본주에 투영했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예술노동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대한 분노였다. 개인의 분노가 우리의 분노임을 확인하게 해준 그 해의 구본주-삼성화재 릴레이 1인시위. 그 유쾌했던 소셜 퍼포먼스의 뜻과 힘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아티클, 2012년 8월호 기고문.

2012/07/27 19:02 2012/07/27 19:02

박홍순 : 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 리뷰

critic & column | 2012/07/21 19:30


박홍순의 대탐사, 대동여지도 출발보고서

박홍순 : 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 한미사진미술관, 6.23-8.19

지난 1999년, 백두대간을 타고 오르며 험산준령을 카메라에 담은 박홍순의 사진집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그가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의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30대 초반의 신진작가였기 때문이다. 2005년에 이르러 그가 한강을 테마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산하의 맥락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에 뭔가 묵직한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함께 강원도 영월과 평창, 정선을 잇는 동강을 답사하며 찍었던 한강 상류의 모습에서부터 한강 하류의 거대한 풍경에 이르는 대하(大河) 드라마를 선보인 당시의 개인전을 보면서 일관된 주제와 문제 의식을 가지고 한길을 가는 사진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서해안을 촬영할 때는 그를 따라서 서해의 갯벌을 밟으며 그의 발품을 목격하면서, 비로서 그의 거대한 다큐멘터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새만금방조제의 저 막막하고 막연한 인공재해 현장에서 소금꽃이 핀 갯벌을 누비며 뚜벅뚜벅 걷던 그의 모습에 자연의 위대함과 인공의 허망함을 함께 담으려는 리얼리스트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서해안을 담은 2008년의 개인전은 ‘고독하고 육중한 박홍순의 거대서사’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2년. 그는 14년간의 큰 걸음을 한 묶음으로 묶어 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몇 년 사이 그는 진도에서 완도, 강진갯벌, 순천만과 여자만, 거가대교, 그리고 해운대에 이르는 남해안 루트를 섭렵해서 백두대간-한강-서해안-남해안에 이르는 한반도 남단의 대탐사를 절반가량 라인업 해놓았다.

1997년부터 2012년까지 박홍순이 한반도 남단의 산하를 두루 꿰며 담아온 현대판 대동여지도의 중간결산은 이렇듯 긴 호릅의 결과물이다. 대자연의 풍경 속에 끼어든 인공의 흔적을 찍어온 박홍순의 일관성이 돋보인다. 백두대간의 수많은 봉우리들과 동강과 평화의 댐에서 양수리 두물머리에 이르는 한강도 있고, 거대한 규모의 서해안 개발프로젝트인 시화호와 새만금도 있고, 남해안의 진도에서 완도, 강진갯벌, 순천만과 여자만, 거가대교, 그리고 남해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의 해운대도 있다. 이 연작은 앞으로 이어질 작업들로 인해 더울 빛을 발할 것이다. 부단한 발길로 산하를 훑고 다니는 박홍순의 대서사시는 시간이 갈수록 힘이 생기는 ‘규모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두고 중간보고서라는 말은 괜한 말이었다. 산맥에 이어 큰강을 훑고 나서 서남해안으로 내달음질 한 그의 대장정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동해안과 DMZ에 이어 낙동강과 섬진강, 영산강, 금강, 게다가 그 많은 섬들이 있다. 이것을 다 마친다고 해도 절반의 대동여지도에 그칠 뿐이다. 북한지역으로까지 이어질 그의 대탐사를 두고서 이번 전시가 중간보고서라고 하기에는 모순이 있지 않은가. 한 가지 더 있다. 발해나 고조선의 옛땅을 답사할 예정인 박홍순은 반도사관을 부추기는 대동여지도의 영토개념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민족과 국가, 영토 따위의 개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개인 박홍순으로서 거대한 자연을 만나고 싶은 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중간보고서가 아니라 거대한 여정을 알리는 출발보고서일 뿐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 아트인컬쳐 2012년 8월호 기고문.

2012/07/21 19:30 2012/07/21 19:30

부평구 갈산동 421-1 : 콜트콜텍, 김명희 : 서울아트가이드 2012년 8월호 이달의 전시

critic & column | 2012/07/20 22:30


부평구 갈산동 421-1 : 콜트콜텍, 콜트악기 공장, 2012.7.15.-7.25
김강, 김윤환, 김성건, 성효숙, 약손을가진사람들, 전진경, 정윤희, 전미영, 황성미 등 21인(팀)이 참가한 액티비스트 버전의 공장미술제. 지난 2007년 세계적인 악기 브랜드인 콜트악기의 공장폐쇄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여온 공장에 지난 4월말부터 모여든 예술가들이 만든 스쾃(예술점거) 프로젝트이다. 전지구를 무대로 한 자본의 폭력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한 액티비스트들의 예술공장.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

김명희 김차섭 2인전, 갤러리현대 청담, 2012. 6.21-7.13
김명희 김차섭 부부의 손길은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고대의 역사와 동시대의 일상, 유년의 기억과 동시대의 체험 등을 방대하게 섭렵한다. 강원도 춘천의 폐교에서 미국 뉴욕의 맨하탄을 오가며 인간 삶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탐색하는 그들은 인류학자로서의 예술가이다. 수십년간의 연작과 새로운 매체 실험을 섞은 신작들에는 동시대와 과거의 감성을 아우르는 지적 통찰력이 공존한다.

* 서울아트가이드 2012년 8월호 이달의 전시


2012/07/20 22:30 2012/07/20 22:30

사회적 의제의 최전선에 선 행동하는 예술가 전진경

critic & column | 2012/07/15 13:49


사회적 의제의 최전선에 선 행동하는 예술가  전진경

돌아가신 분을 관에 모시고 영영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순간. 전진경은 너무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생전에 그토록 냉엄하고 강인했던 어머니를 입관하던 순간, 관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에게 꽃을 채워넣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전진경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뇌리에 담아두었다가 한 달 뒤에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그림 그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너무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에는 작가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들어있다. 전진경은 근 몇 년동안 돌아가신 분들 여럿을 그림 속에 담았다. 용산참사에서 돌아가신 다섯 분의 영정을 비롯해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고 이소선 님과 민주화운동의 대부 고 김근태님의 장례식에 쓰인 초상화가 전진경의 붓끝에서 나왔다. 철거민들과 명사들의 죽음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전진경은 삶과 죽음의 뜻을 성찰하며 그림을 그려왔다.

전진경은 대학에서 수묵채색화를 전공하기 시작한 이래 20년째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고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개인전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닌 공장건물에서 열리는 전시다. 그는 수년째 장기농성을 벌이고 있는 인천의 악기제조회사 콜트콜택의 빈 공장건물에서 몇몇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점거를 진행하고 있다. 스쾃(Squat)이라 부르는 예술점거운동이 일반화한 유럽에서라면 몰라도, 한국과 같이 예술적 실천에 대해 관대한 시각이 부재한 나라에서 남의 빈 건물에 들어가 작업실을 꾸리겠다는 발상은 여러모로 난관에 부딪혔다. 건물주 측의 거센 항의를 받는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한다. 고비의 순간들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전진경은 빈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미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진경은 벽면을 정리하고 간단한 집기와 화구들을 배치한 후, 그동안의 작업들을 옮겨놓고 신작 제작에 들어갔다. 불법침입자인 그는 버려진 공장 건물 여기저기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모아 작업도구로 쓰기도 하고, 작업실 벽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며 공장아틀리에를 꾸리고 있다. 그는 콜트콜택 사건을 공론의 장으로 확산하자는 뜻에 공감한 스무명의 예술가들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공장아틀리에 개인전을 연다. 한국사회와 같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사적 소유가 완벽하게 관철되는 국가에서 예술점거를 벌이는 드문 경우이기도 하지만, 그곳 점거아틀리에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전진경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이번 개인전을 통하여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고 있다. 스스로 머무르는 곳을 결정하고 예술적 의제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예술가 전진경, 투쟁의 현장 속의 뛰어들어 사회적 의제의 최전선에 선 ‘행동하는 예술가 전진경’이라고 말이다.

그가 첫 개인전 장소를 점거 중인 공장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뜻과 길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개념예술적 행위이다. 그는 지난 2006년부터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마을에서 지킴이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후 서울의 용산참사 현장을 비롯한 사회적 고통과 갈등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현장에 거주하거나 주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주민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렇듯 사건과 상황에 관한 심층적인 체험은 그의 작품을 진정성의 국면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0여년간의 작업을 일시에 개인전 방식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진경의 경우 초기의 긴 시간동안을 현장미술운동에 할애하였으므로 개인작업보다는 집단창작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이유로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대부분 지난 5년여 동안 대추리를 비롯한 현장에서 제작한 액자그림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진경의 그림들이 현장에서의 쓰임새를 위해 즉발적으로 그려진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다수의 작품들은 자신의 체험이 쌓아준 기억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만다. 가령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과 같은 작품은 서울역에서 만난 곰돌이 모자를 쓴 아저씨와 몽골에서 만난 아저씨의 모습을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그린 그림이다. 평택 대추리마을에서 지킴이 활동을 했던 그는 2007년 봄, 마을을 내주고 모든 주민이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민들과 함께 그 마을에 머물며 그들의 아픔을 지켜봤다.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마음에 담아둔 전진경은 몇 점의 그림들로 대추리를 기억한다. 대추리의 일상과 사건을 그린 그림들 속에서 전진경은 인간의 삶에 있어 기억의 문제를 깊고 무겁게 다루고 있다.

전진경의 작품에는 대부분 인물이 등장하는데, 몇몇 작품들에서 그는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했다. 전북 진안에서 만난 이장님을 그린 그림 <진화>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있다. 과거를 가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애써 그린 인물화 위에 하안 분칠을 하곤 했다. 그는 몇 점의 연작에서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는 그 위에 하얀 분칠을 했다. 유독 한 작품에서만 그는 얼굴 전체를 지우는 분칠을 멈추고 이마 가운데와 미간 사이에만 분칠을 했다. 존엄을 뜻하는 에스페란토어 제목의 그림 <Digno>이다. 이 그림은 자신을 그린 것인데, 오랫동안 생각하며 완성한 이 작품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마음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탈출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그리기도 한다. <이런 겨울>은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의 뒷모습인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싸우며 지키고 있을 때, 먼저 떠난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고향이 궁금해서 차마 낮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밤에 마을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린 그림이다. 먼저 떠난 주민의 슬픈 마음이 담긴 그림이다. <꽃을 좋아하는 남자>는 전북 진안 방곡마을에서 거주할 때 평생 초등학교 소사로 일하신 할아버지가 죽어가는 화분을 가져다가 되살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그의 집은 화초들로 넘쳐났다. 평택과 진안의 두 사람을 기억하는 전진경의 마음에는 쓸쓸함과 따뜻함이 교차한다.

용산참사 현장에서의 예술행동은 전면적인 기억투쟁이었다. 참사가 벌어진 후 1년이 다 되어서야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그 참혹한 사건이 잊혀지지 않고 공론의 장에서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 전진경은 주민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렸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돌아가신 철거민 다섯 분을 그린 영정 그림은 먹선의 맛과 멋으로 윤곽을 잡고 정교한 채색으로 인물의 생동감을 살린 작지만 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장례식 때 크게 확대 프린트해서 장례행렬에 쓰였다. 그는 용산포차에서 일식집 메뉴판에다가 그림을 그렸다. 철거민 가족들의 모습을 만화풍으로 그렸는데, 이후 다수의 주민들로부터 서로 자신들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아 메뉴판그림 연작을 했다. 용산참사의 현장을 정리할 때 그는 ‘나무그림증정식’을 열어 주민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나눠줬다.

용산참사 현장작업 이후 전진경은 현장미술팀의 일원으로 예술행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 그는 제주도 강정마을을 찾아 현장 작업을 했다. <구럼비의 신>은 구럼비바위 표면을 종이찰흙으로 떠내고 그것으로 만든 종이부조 가면이다. 이 작품은 해군기지 건설현장이라는 한국사회의 매우 특수한 국면에 참가해서 제작한 것으로서 파견미술팀과 함께 진행한 것이다. 파견미술팀은 회화, 판화, 조각, 설치, 문학,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구사하는 예술가들, 전미영, 이윤엽, 신유아, 안규환, 송경동 등이 함께하는 네트워크의 이름이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조건의 파견노동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으로 첨예한 의제의 현장을 찾아 예술행동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진경은 대학에서의 학업을 정리한 후 곧바로 현장미술활동에 뛰어들었다. 현장의 무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현장미술그룹인 그림공장 멤버로 활동한 것이다. 인송자, 김성건, 김주철 등의 선후배들과 함께 한 10년간의 현장미술 활동에서 그는 무수히 많은 거대한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단위노조에서부터 전국단위 노동자조직에 이르기까지 무대미술로서 노동자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전진경은 그림공장에서의 10년 활동을 정리한 후 그는 대추리로 갔다. 그곳에서 전진경은 현장미술의 새로운 방법론을 채득했다. 현장에 살면서 그곳의 삶을 이야기하는 예술가로 진일보한 것이다. 노동자대회 등과 같이 수천 수만명이 운집하는 집회의 무대 뒤에 걸린 걸개그림보다는 작고 소박하지만 내용적으로 알차고 진솔한 예술적 실천을 발견했다. 개인적인 선택 따라 삶의 장소와 작업 내용을 채택하는 행동주의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는 대추리와 용산,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콜트콜택 등 사회적 갈등의 최전선에서 예술행동에 동참했다. 특히 대추리와 용산, 그리고 최근의 콜트콜택의 경우는 현장 거주 및 점거를 예술적 행위와 접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미군의 군사전략과 농민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지점에 뛰어들었으며, 죽음을 부르는 자본의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 함께 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직장폐쇄에 맞서 공장을 지키고 있는 악기제조회사 노동자들과 함께 빈 공장을 지키며 점거아틀리에를 꾸리고 있다. 만약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전진경의 점거아틀리에를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진경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빼어난 화가이자 소외된 이웃의 삶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활동가이다. 전진경의 삶은 예술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는 사회적 갈등의 현장을 찾아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창의적으로 결합하고자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는 행동하는 예술가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 전진경 개인전 서문

2012/07/15 13:49 2012/07/15 13:49

인터뷰 : 거리의 예술가 구헌주

critic & column | 2012/06/26 15:02


인터뷰 : 거리의 예술가 구헌주

“그래피티를 하게 된 것은 힙합음악을 좋아하면서 알게 된 힙합문화 때문입니다. 힙합음악에 빠져들고 난 후, 문화 자체에 눈을 돌려보니, 힙합에서 무용은 비보잉, 노래는 랩, 연주는 디제이, 미술은 그래피티더라구요. 그리고 무대는 거리.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래피티겠다’ 생각했죠.”

고등학교 시절부터 록과 힙합 음악을 즐겨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문화에 젖어들었던 구헌주는 비주류문화의 수용자에서 생산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바꿔나갔다. 오늘날의 그래피티아티스트 구헌주는 거리의 문화에서 나온 힙합 정신을 몸으로 익히며 서서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래피티라는 기술을 익히기 전에 그 근저의 문화적 토양에 해당하는 힙합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하며 성장한 것이다. 구헌주는 한국의 그래피티 아트스트들이 결여하고 있는 힙합정신의 본질에 충만한 보기 드문 힙합정신의 소유자이자 그 정신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예술가이다.
30대 초반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구헌주는 언젠가부터 그는 부산을 대표하는 대안예술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난 2005년, 그러니까 그가 미술대학 회화전공 4학년 학생일 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산대 앞 지하철역 아래의 천변 공간을 중심으로 한 그래피티 씬에서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명 ‘똥다리’라고 불리는 이 곳은 구헌주를 비롯한 많은 젊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활동해온 곳이다. 한때는 국제적인 그래피티의 메카로 알려져 국내외의 내노라하는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방문해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곳 벽을 사랑했다. KAY2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그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남겼다. 1980년대의 시위 사진 위에 모니터 속 윈도우 프로그램의 ‘삭제’ 아이콘을 그려넣기도 한 그는 초기부터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건드리며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대학가의 주류공간이 미술제도 영역으로부터 한 발 비껴난 언더그라운드 문화공간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재미난 복수라는 문화운동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는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취향을 지향하며 차근히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지난 몇 년간 그는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꾸리고 있는 공간인 아지트의 운영을 주도해왔다. 올해 봄까지 4년여동안은 아지트의 총괄 운영과 기획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본연의 일인 작업의 길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다원예술매개공간 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되기도 한 이 공간은 말 그대로 탈장르복합문화의 실험장이었다.
구헌주는 아지트에서 잔뼈가 굵었다. 아지트는 그에게 액티비스트의 자질을 키우고 실천의 근거를 제공한 배우지이다. 아지트는 류성효과 구헌주, 김건우 등이 꾸려온 대안문화공간이다. 류성효는 대안문화 기획자이자 네터워커이다.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의 접점을 만드는 김건우 또한 아지트의 대들보 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손지현, 이정민, 이광혁 등의 문화기획자, 댄서, 뮤지션들이 아지트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지트는 미술과 음악, 퍼포먼스 등이 공존하는 탈장르복합예술의 아방가르드 그 자체이다. 장르와 장르의 만남, 예술과 사회의 만남, 세대와 도시와 국가 등의 경계를 넘어 그 모든 것을 뒤섞어 버리는 말 그대로 첨단예술의 아지트이다.
한 사람을 보려면 그 주변을 봐야한다는 말이 있다. 구헌주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보면 그의 취향과 지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존경하는 인물 1번으로 꼽을 정도로 류성효를 좋아한다고 한다. 류성효는 구헌주에게 있어서는 불굴의 예술적인 기획자이자 진정한 아티스트이다. 재미난 복수의 주요 멤버인 류성효는 ‘써브컬쳐씬의 네트워크작업과 축제컨텐츠에 대한 열망이 많은 사람‘이다. 좋아하는 뮤지션은 ’리얼 아티스트인 김일두‘. 그래피티 아티스티스트 지알(Jial1)은 10여년 전에 불모지였던 부산의 그래피티 문화를 일군 선구적 역할을 했다. 뱅크시와 블루 등 해외의 스트리트 아티스트도 그를 이끈 예술가들이다.
돌이겨 보건대, 구헌주는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여느 신진작가와는 사뭇 다르다. 나는 미술평론가로서, 혹은 독립큐레이터나 미술관 큐레이터로서 수년간 그를 만나왔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7년에 류성효가 경성대미술관에서 기획한 그래피티 아카이브 전시였다. 그래피티의 정신에 대해 토론하며 나는 그가 미술대학을 졸업한 여느 신진작가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그해 가을에 독립큐레이터 일을 맡아 그를 초대한 것은 <아트인대구 2007 : 분지의 바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대구의 원도심에 있는 삼덕맨숀의 벽에 거대한 그래피티 작업을 했는데, ‘눈감고, 귀막고, 입막고 있는 대구사람들’의 정치적 보수성을 일갈한 그 작업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듬해에는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서 <아트인부산 2008 :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구헌주를 초청했다. 그는 전시장 안에 사각부스를 만들고 그 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다. 그는 쇠고기 이슈를 다루며 MB를 그려넣더니 급기야 불경스러운 도상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공무원 큐레이터인지라 ‘살살하라’며 약간의 자제를 당부했고, 그도 웃으면서 약간 살살하기도 했지만, 2009년 이후의 살벌한 정국을 생각하면 MB정권 초기의 약간은 널럴했던 분위기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후에도 대안공간반디와 상상마당 등에서의 기획전에 그를 초대하고 작가추천을 하기도 하면서 지켜보아온 그는 한결같았다.

“아트신과 관계를 어떻게 맺을까라는 고민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지는 상황이나 기회들이 아트신과 닿아 있다면 거스를 필요도 없지만, 굳이 그쪽만을 바라볼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홀로서기를 한 지금 저의 생각과 저의 결과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만 할 뿐입니다. 우선은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먼저인 것 같습니다.”

미술계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젊은 작가도 참 드물 것 같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도권 미술계에 찌들지 않고 꿋꿋하게 한길을 걷고 있다. 나는 그의 이러한 두둑한 뱃심이 저항문화에 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의 현대사에 면면히 흐르는 저항문화의 흐름을 나름의 시각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식의 정치적 저항문화를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세대가 지난 세대와 어떤 점에서 맞닿아있고, 어떤 점에서 단절의 지점을 형성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1980년대 방식의 정치적 저항운동과 2000년대 방식의 문화적 저항운동의 차이를 가르는 변곡점에 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대 간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4,50대 선배 세대와의 만남에도 마음을 여는 네트워커이다. 제도권 미술계에서 일하는 나는 비제도권 문화계에서 일하는 그와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세대 간의 차이를 넘어 대화할 수 있는 많지 않은 후배세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그를 꼽곤 한다. 그래봤자 12년 차이 나는 것이니 마음만 열면 세대공감이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물론 그는 그렇게 생각 안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안다).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구헌주의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봐서 그는 자신의 좌표를 비교적 정확하게 짚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정치적 저항은 민주화나 현실정치 개혁 등의 거대담론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2000년대 저항문화는 다양성이 결여된 기존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각자의 행복추구, 자기표현 등이 중심이 된 개인의 발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나 작은 사회의 특수성에만 매료되어 큰 삶, 큰 사회의 이야기와 단절된 채로 사는 것은 원치 않지만, 저마다 다른 다양한 삶의 모습,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함께 존중받고 지켜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구헌주는 부산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활동반경을 넓혀왔다. 광주와 대구, 서울의 도심에는 그의 그래피티가 남아있다. 그의 해외활동은 주로 일본과 연관이 있다. 일본의 그래피티 작가들이나 문화활동가들과의 협업이 주를 이룬다. 후쿠오카시청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아지트의 레지던스프로그램에서 만난 해외 작가들과의 밀접한 관계도 큰 재산이다. 조만간 스트리트아트의 메카인 베를린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싶다. 이왕이면 그의 생각대로 ‘예술을 점령하라’는 모토로 국제적인 액티비스트들의 집결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베를린에서 구헌주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한 구헌주, 떠나라!”

김준기 (미술평론가,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부산문화재단 <공감 그리고> 2012년 여름호 기고문.

2012/06/26 15:02 2012/06/26 15:02

[여기 사람이 있다] 작품 소개 2 :조양규의 <31번 창고>

분류없음 | 2012/06/19 21:27


[여기 사람이 있다] 작품 소개 2 :조양규의 <31번 창고>

20세기 한반도는 머무는 삶을 떠도는 삶으로 뒤바꿔버렸다. 오늘날 전세계에 걸쳐 600만명에 이르는 한민족 이산(離散)을 낳은 것은 격변의 한국현대사 때문이다. 수천년동안 이어온 정주민의 삶은 식민지배에 따른 이주정책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산의 고통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남과 북으로 갈린 분단상황은 이데올로기에 따른 개인의 거주지 선택을 강요했다.

조양규(1928-?)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이승만정권 수립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수학한 후, 두 차례 개인전을 연 그는 일본의 전후 리얼리즘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갔다.

이 작품 <31번 창고>는 일본 밀항 후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예술가 활동을 했던 이주민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미술전문가들 사이에서는 20세기 최고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곤 한다. ‘31’이라는 숫자는 창고 번호인데, 그 창고 앞에 자루를 들고 선 노동자의 모습에는 작가 자신과 재인조선인의 핍진한 삶이 들어있다.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식민지 출신의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핍박했다. 조양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예술가로 자리매김 했지만, 그 팍팍한 이방인의 삶을 버리고 북으로 갔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을 “공중에 매달린 상태”라고 표현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북한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귀국선에 올랐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했을 때, 다수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사회주의를 옹호했으며,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월북했다. 조양규도 남과 북의 분단이 기정사실화 하던 시점부터 좌익운동과 통일운동에 가담하며 정치적 저항의 길을 걸었고, 결국 일본으로 쫓겨 갔다가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북으로 귀화했다. 예술가 조양규가 작품활동으로 기록을 남긴 건 여기까지이다.

북한은 자유를 갈망한 예술가 조양규를 끌어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선택한 새로운 조국은 실존을 투영한 리얼리스트의 섬세한 감성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해방공간의 격변기에 조국을 등지고 디아스포라(이산)의 길을 걸었던 그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해 북으로 갔지만 예술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충청투데이 기고문.

2012/06/19 21:27 2012/06/19 21:27

서울아트가이드, 2012년 7월호, 이달의 전시 : 정장직, 박홍순

critic & column | 2012/06/18 11:14


정장직 : FACE-the Gate of Sprit, 갤러리이안, 6.01-6.15
정장직의 그림이기도하고 문자이기도 한 픽토그램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구로서의 얼굴에 주목한다. 회화, 드로잉, 판화 등으로 풀어내는 얼굴 그림들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쌓인 시간성을 압축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재현적 형태의 픽토그램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고 쓴 얼굴들은 익명성에 가려진 현대인의 군상이다.

박홍순 : 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 한미사진미술관, 6.23-8.19
대자연의 풍경 속에 끼어든 인공의 흔적을 찍어온 박홍순의 중간결산 전시. 백두대간의 수많은 봉우리들과 동강과 평화의 댐에서 양수리 두물머리에 이르는 한강도 있다. 서해안의 시화호와 새만금도 있고, 남해안의 진도에서 완도, 강진갯벌, 순천만과 여자만, 거가대교, 그리고 해운대도 있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의 15년동안 한반도 남단의 산과 강, 해안을 훑고 다닌 박홍순의 대서사시.

2012/06/18 11:14 2012/06/18 11:14

안치인, 김영진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20120220

critic & column | 2012/02/20 18:34


안치인, 모리스갤러리
퍼포먼스에서 드로잉과, 페인팅, 설치, 그리고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지난 대매체적인 총체예술을 지향해온 안치인이 드로잉과 페인팅 근작들을 선보였다. 이미지와 텍스트, 흑과 백, 추상적 기호와 구상적인 이미지 등이 섞여있다. 그의 평면들은 작가의 행위가 결과하는 일루전을 만들어내기보다 행위 그 자체를 증거하는 장으로서 쓰인다. 인치인의 그림은 그것이 인간 행위의 결과물임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행위로서의 그림’이다.

김영진, 나무화랑
꼼꼼한 형상표현과 그것을 군데군데 뿌옇게 만드는 식으로 김영진의 회화는 사실의 재현과 예술적 표현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전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그의 근작들은 현실과 비현실, 또는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 모두를 몽타주하며 그 속에서 ‘실재’를 발견한다. 김영진에게 있어 실재는 거대하면서도 미세하고, 의식세계 안에서 포착가능한 것이면서도 뿌옇게 사라지고 마는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색이다.

2012/02/20 18:34 2012/02/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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