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금 딜레마
critic & column | 2008/01/29 20:42
문진금 딜레마
문화예술진흥기금, 줄여서 문진금. 그 심의결과가 나왔다. 해마다 시월이면 너나없이 문진금 신청에 열을 올리고, 연말연초에는 새로운 한 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문진금 심의결과로 희비가 엇갈리는 게 우리 예술동네의 한 풍경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심사에 참석해 본 적이 있고, 심사를 받아본 적이 있다. 누군가(들)에게 지원을 결정하거나 그 보다 많은 다수를 지원 결정에서 배제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누군가(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낙방도 몇 차례 했고 몇 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문진금 시스템의 공모자로서 자승자박하듯 고백하자면 이렇다. 어떤 주체들이 어떤 기준으로 당락을 좌지우지하는가? 거기에는 공적 자금을 가지고 예술생태를 순화하기 위한 일관된 맥락의 정책적 배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략 계파와 학맥과 인맥을 두루두루 섞어서 나눠 먹기 식으로 분배하는 초보적인 수준의 배려가 있을 뿐이다. 물론 예술위는 지금까지 투명성 증대를 위해 고심해왔고 많이 진화했다. 그러나 문진금의 지원결정을 좍 훑어 내려가 보면 대략 어떤 인사들이 심사에 참여해서 이런저런 결과가 나왔구나 하는 짐작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대체로 그 짐작은 짐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의 권력 구도를 가늠하게 하는 지형도에 가깝다는 점도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예술의 장은 가치의 경쟁의 장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 생산자들과 향유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며 합의하고 투쟁하는 장이다. 이 장에서 누가 지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일을 몇몇 심사위원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기획서를 검토하고 지원대상자의 이력사항을 검토해서 결정할 만한 간단한 문제이겠는가. 그렇다고 심사없이 기금을 분배할 수 있는 묘안도 없다. 이것이 문진금의 딜레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예술 콘텐츠를 수백 수천만원씩 들여 지원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누가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게 문진금을 지원해서 해당자만이 잠시 행복하고 마는, 그래서 그 수혜자의 이력서에 한 줄 경력을 남김으로써 문화권력을 증대하는 데 기여하도록 하는 일을 지속해야만 하겠는가. 구태를 떨치려면 지원이라는 말부터 지워야 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예측을 근거로 한 심사를 통해서 화폐를 수여한다는 개념 말이다. 누가 누굴 지원하는가. 지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시혜자와 수혜자를 권위적으로 위계화 하는 낡은 패러다임이다.
문진금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제비뽑기 식으로 지원을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보다 선명하게 정책적인 판단에 따라서 기획지원 분야를 확대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기획지원이란 당대의 문화정책 의제에 따라 예술생산과 매개와 향유를 매개하는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말한다. 단체별로 나눠 갖거나 개인들에게 찢어주는 방식의 지원은 너무나도 초보적이고 원시적이다. 이슈를 발굴하고 그 이슈에 충실하게 활동해온 예술가나 단체에게 실천적인 사례를 남길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정교화해야 한다. 좋은 콘텐츠를 생산할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지원하는 일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사후 지원이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제기되어왔지만 지금껏 뾰족한 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심층적인 검증 체계를 만들어 사후지원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물론 기금은 심사를 통해서 지원할 수밖에 없는 공적 자금이다. 그런데 수많은 공적 자금들이 그러하듯 문화예술진흥기금 또한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눈먼 돈의 행진을 말이다. 문진금에 당첨되면 그것이 곧 공공으로부터 어떤 권능을 부여받는 것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진금은 선정되었다는 표현보다는 당첨되었다는 표현으로 회자되곤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심사위원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짜여지면 당첨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낙방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수용자 중심의 문화정책을 펼쳤다면, 이명박정부는 생산자 중심의 문화정책을 펼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만약 생산자 중심의 지원정책을 강화한다면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작동하는 예술적 소통의 사회화란 점점 어려운 얘기가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수용자 중심의 문화정책이 충분하게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적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정책논쟁의 논점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권단체들의 연례행사들에 대폭의 기금을 지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해당 단체들이야 이러저러한 연례행사들을 통해 존립근거를 마련해온 관행 탓에 문진금의 향배에 초미의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단체라는 틀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다수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일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서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방식 또한 문제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서울에 위치하고 있고, 서울이 문화수도라는 점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몇 년 후를 생각해 보라. 지금의 계획대로라면 예술위는 전남 나주로 옮겨간다. 전남 나주에 본부를 둔 예술위가 여전히 서울을 지향할 것인가. 서울을 중앙으로 사고하는 변방의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서울은 영원히 전지구의 문화변방으로 남을 것이다. 역으로 서울을 하나의 지역으로 사유할 줄 알아야 서울이 산다. 서울에 문화인프라와 예술가들이 몰려있다는 현실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공적 기금을 집행하는 정책사업 기구라면 긴 안목의 문화정치를 펼쳐야 할 것 아닌가. 문진금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김준기 (미술비평)
* 아트인컬쳐 2월호 기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