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critic & column | 2010/09/03 08:16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선무(線無). 그 이름이 함의하는 바, ‘선 없음’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선언이다. 선무의 예술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이다. 그는 체제로부터 이탈한 개인이다. 그는 체제가 전혀 다른 북한에서 남한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체제에 관한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옮긴 예술가 선무에게 있어서 탈주의 정신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깊이 투영된 실존이다. 비록 그것이 지배와 복종으로 얽혀 있는 인류 문명사 자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부터 또 다른 체제로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남한으로 이주한 탈주의 실존은 선무의 예술세계 근간을 형성하는 주요 모티프이다. 선무의 예술적 발언은 서로 다른 경제구조나 정치구조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접한 세상의 면면, 특히 그가 태어나서 자라난 북한 땅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차이를 넘어서기까지 남한에서 체험한 7년의 세월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뒤바꾼 긴 세월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내면 체험을 키우고 공론영역에서의 발언으로 공표하기에는 선무의 남한 체험은 아직 짧고 얇은 수준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것을 듣고 보았을 것이고, 이곳 남한 사회마저도 자본과 정치권력의 작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한을 이야기하지 않고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서사 대부분은 북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점, 선무가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점을 들어 그의 서사를 국외론자의 낯선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로 들을 것인지는 선무를 독해하는 우리의 사유와 감성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체제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는 데에 있다.

선무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분단 이데올로기가 고착화한 한반도의 양면을 동시에 성찰할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의 소유자가 이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무의 그림은 ‘세상에 부러움 없이 행복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는 지금 여기 남한의 상황과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에 합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위기의 일상화이다. 전쟁 발발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분단과 대결의 구도를 종식시키지 못한 채 평화와 위기,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무는 이 분단과 대결의 상황에서 스스로 한 쪽으로부터 다른 한 쪽으로 이탈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선택한 새터민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생존의 가치와 방향에 관한 복잡다단한 서사들, 즉 절망과 희망, 상처와 환희 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한 대결구도 속에서 탈주의 실존을 담은 선무를 통해서 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치나 미디어가 양산하는 정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그의 그림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선무의 작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집단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해맑게 인간의 본성을 숨기지 않을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세상에 부럼 없이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는 장면을 여러 장면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행복을 선포하는 어린 아이의 배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선무의 그림은 이처럼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북한은 민중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는 여전히 체제의 우월성이나 가능성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선무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친숙한 것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양식을 패러디해서 그 양식이 애초에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과연 그들은 행복한가? 나아가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의 여부는 타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바에 의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기획하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아이팟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북한의 소녀를 보면서 여전히 ‘우리는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선무의 상황설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선무의 그림에서 보이는 비판적 서사들이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는 구조의 동질성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그가 남한에 정착한 첫해에 열린 2002 월드컵 게임 열풍을 접한 선무는 남한 사회에도 집단주의 광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보고 느꼈다고 한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단일한 사안에 몰입하는 대중의 모습은 북한에서 익히 보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단의 광기 속에서 안도하며 희열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은 아마도 인류 공통의 것일 텐데, 문제는 그것을 조작하고 활용하는 권력의 속성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것, 권력과 대중,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관한 선무의 통찰이다.

선무의 그림이 가지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함은 스타일에 있다. 선무의 그림 스타일에는 두 가지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그의 그림에는 대담하게 그은 선의 맛, 즉 일획의 감성을 잘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붓질 자국을 남기지 않은 색면 처리로 형상의 윤곽을 명쾌하게 구분짓는 것이 있다. 전자의 그림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말하는 조선화의 영향이 확연히 보인다. 후자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유니크한 화면 구성과 닮아 있다. 조선화의 영향은 붓질뿐만 아니라 색채의 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밝고 맑은 색채를 구사한다는 조선화의 원칙은 선무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완연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참새나 갈대, 갈매기 등의 표현은 몰골 필체의 획선으로 대상의 동세를 잡아내는 날렵한 붓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그것은 키치 회화의 범본이 되는 매우 친숙한 스타일이다. 동일한 형상을 반복해서 배치한다거나, 단일한 것 또는 대비되는 두 색의 병치 등으로 심플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포스터 양식의 친숙함도 선무 그림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간결한 형상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비판적 메시지를 담는 선무 그림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패러디한 블랙 유머이다. 그것은 북한이 선전하고 선동하는 체제의 우월성이나 조작된 행복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북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대면하면서 그 사유와 감성에 동의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북한의 비극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 우리의 시선이 단지 한반도 북쪽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비판과 연민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무의 예술을 보다 넓은 해석의 지평으로 펼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역지사지에 있다. 우리 안의 파쇼 우리 안의 가부장, 우리 안의 우상의 모습을 선무 그림에서 발견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자본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일상 속 폭력과 야만의 그림자가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다는 점. 경계없는 삶을 지향하는 실존의 예술가 선무의 그림이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깊이 다가오는 이유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선무 개인전 (2010,9.11-, 이듬갤러리, 부산) 서문.

2010/09/03 08:16 2010/09/03 08:16

smile gim

lense & world | 2010/08/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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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0:56 2010/08/30 10:56

예술체제의 변동과 공공미술

critic & column | 2010/08/27 08:22


예술체제의 변동과 공공미술

예술은 사적인 것일 수도 공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술작품의 생산은 사적인 체험을 바탕하며, 작품 감상 또한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아가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사사성을 바탕으로 한 공론장을 생성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 이후의 예술은 공공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근대사회가 태동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회변동의 한 요인이자 축선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예술 메커니즘으로 인해서 작동하기 시작한 근대적 공론의 장은 근대사회의 이상과 가치를 생성하고 구현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이 예술가 개인의 사적인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라도 예술작품은 공론의 장에서의 소통을 전제로 태어난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은 한 개인의 만들어서 공표하지 않는 메모나 편지, 낙서, 그림, 또는 혼자 부르는 노래나 연주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이나 전람회, 콘서트 등의 형태로 공적인 공간에서 공표되는 것을 전제로 한 메커니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적 소통으로 인해서 생성되는 공공영역, 즉 예술공론장이다.

문인이나 학자들이 사군자나 산수풍경을 그리고 화평회를 가진다거나 궁중의 화원이 왕가의 행사나 임금의 초상을 남겼다고 해서 그것을 예술공론장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물론 거기에도 약간의 공론장 성격이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자면 그런 경우 ‘과시적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근대사회는 특정소수의 과시적 공론장을 시민사회의 공론장으로 바꾸어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설읽는 사람, 전람회의 관람객, 콘서트의 청중 등을 르 퍼블릭끄(le publique)로 불렀던 19세기 프랑스 사람들에게 공중의 의미는 문학과 예술이 매개한 공론장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예술적 공론장의 참여자들에 의해 생성된 근대사회의 정신은 공공영역을 통한 사회적 합의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이었다. 정치적 공화제, 경제적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사회적 분화(分化), 그리고 예술적 공공영역은 근대체제를 완성한 주요 요소들이었다. 요컨대 근대적 의미의 예술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이었다.

공론장의 형상이라는 근대초기의 시대정신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는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체제를 훌쩍 넘어서 후기자본주의체제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예술가들이 접한 시대적인은 고도로 발달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에 관한 이데올로기였다. 상업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팔리는 작품에 천착하는 현상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업주의와 미술의 결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미술작품의 생산이 시장체제와 결합하면서 주문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주문 없이 생산하고 이후에 그것을 전람회를 거쳐 발표한 후 유통하는 미술시장 메커니즘이 생성된 것이다. 미술시장은 점점 미술체제 전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의 성공을 염두에 둔 미술, 팔리는 작품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메커니즘의 미술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예술공론장은 와해의 위기를 맞이했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공론장의 붕괴는 새로운 예술체제를 매개한다. 그것이 완벽한 시장 지향의 미술로 귀결할지, 아니면 새로운 예술공론장으로 전환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공미술이 예술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지위와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은 근대적 이념을 상실한 예술의 사유화 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으로부터 나왔다. 예술을 공론의 장에서 소통가능한 메커니즘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목적의식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공공미술을 제기하고 나온 것이 68혁명 당시의 유럽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사이래 예술은 공공적인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굳이 공공미술이라고 명명했을 때의 그 공공미술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근대초기의 예술공론장이 가치전도된 상황에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전근대시기의 기념비적인 예술프로젝트, 가령 광장의 기념비 조각이나 궁정회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적자금으로 공공장소에서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공공예술작품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담론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공공미술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서구의 경우 모뉴먼트나 건축물미술장식품 같은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 개념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한국의 공공미술은 70년대 기념비적 조상r화 민족기록화를 대대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86년부터 시작된 건축물미술장식품 제도는 지난 20여년동안 수천점에 달하는 작품을 양상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적 결여와 제도적 파산에 도달했다는 비판에 직면했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새로운 공공미술 논의가 벌어지기 시작한 지 10년 남짓이다. 2006년의 <아트 인 시티 프로젝트> 이후의 관주도 공공미술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결과했다. 작업실과 전시장만 알고 살아왔던 예술가들이 거리와 마을에서 새로운 예술생산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년 미만의 기획과 실행 절차를 가지는 단발성 프로젝트가 양산되면서 그 진정성과 효과에 대한 의문이 증폭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을 기준으로 공공미술의 가치를 재단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공공미술보다 더 역동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험과 도전의 에너지로 가득 찬 예술가의 자율성에서 나온다. 주문생산으로부터 이탈해서 자발적인 창의력으로 예술생산에 뛰어든 근대적 예술 개념의 이상이 지금의 난맥상을 넘어설 가치이다.

공공미술은 거리나 마을에 자리잡는 미술작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미술을 공공영역의 생산과 매개, 향유 등을 총칭하는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적 자율성이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시장미술에 잠식당한 동시대의 예술체제를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재구조화하는 과정에 있어 공공미술은 매우 유의미한 논의이자 실천이다.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공동체와 동행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사례들이 지속가능한 예술체제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한 개념과 절차, 방법, 결과 등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예술이 사회 변동을 반영하고 추인하는 게 아니라, 역동적인 사회변동을 추동하고 견인하는 행위자 주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액티비스트 아트도 있다. 주류와 비주류, 문화권력과 아방가르드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미술이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미술은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시대정신과 공동체성을 획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공공미술의 이상 아래 함께 놓여있다.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체제를 향한 역동적인 흐름이 저변으로부터 꿈틀거리고 있는 새로운 예술공론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 문화저널, 기고문

2010/08/27 08:22 2010/08/27 08:22

예술공론장이 무너지고 있다

critic & column | 2010/08/26 20:36


예술공론장이 무너지고 있다

공공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소유자와 예술가가 소유권과 저작인격권을 놓고 맞서고 있다. DMZ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예술가 이반이 도라산역에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이 지난 5월 작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철거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폭 2.5미터에 총연장 길이가 97미터에 달하는 14폭의 대형 벽화가 일순간 사라졌다. 70평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실존을 투영한 필생의 역작이 작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공공영역, 즉 예술공론장을 파괴한 행위이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공공미술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 벌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가 남북출입관리소 소장 명의의 답변에 따르자면, 어둡다거나 외설적이라거나 민중화 같다는 게 그 이유라고 한다. 밝은 화면, 건전한 서사, 그리고 주류권력의 시각에 위배된다는 판단에 따라 공공예술 작품을 철거한 이 사건은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예술공론장이 무너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작인격권을 구성하는 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 등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이번 일은 명백하게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문제는 이것은 단지 소유권과 저작권의 상호 충돌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분단과 생태를 이야기하는 공공영역 자체에 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반의 작품은 사적인 체험이나 표현의 영역을 넘어 우리시대의 사유와 감성을 집약한 공론의 장이다. 이번 일 “공공의 재원으로, 공공의 장소에, 공공의 의제를 다룬” 공공예술 작품을 파괴한 일이다. 만에 하나 그럴 필요가 있다면, 공공미술 작품을 철거할 때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작품과 장소의 관계에 관해 비평적인 논의를 거쳐야 하며, 시민사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열린 토론의 장도 있어야 한다. 미국의 리차드 세라가 만든 광장을 가로지른 철판 작업이 광장에서의 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된 사례가 있는데, 그 일은 매우 정교한 토론과 치열한 법정 공방을 거친 후에야 이루어졌다.

문화는 역사적 축적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분단상황에 대한 인식과 통일에 관해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문제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분단과 통일을 다룬 예술 작품에 대해서 불과 수년의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작품의 일방 철수가 벌어진 것을 보면, 한국은 아직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회임이 분명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일각의 판단에 의해 합리적인 논의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술작품을 철거하는 악습을 수없이 경험해 왔다. 전시장에 내걸었던 작품이 철거당하거나 압수당하곤 했던 80,90년대의 일은 과거지사라 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에도 이런 일이 지속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3년에는 서울 을지로3가 지하철역에서 이동기와 강영민의 벽화가 지워졌다. 2007년에는 창원시에서 최정화의 작품이 철거당한 적도 있다. 공공장소와 예술적 표현의 충돌이 이처럼 일방적인 철거로 결말을 맺는 이 사회에 예술의 표현의 자유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반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를 그 한 몸으로 보여주는 예술가이다. 예술가 이반은 20세기 한반도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동시대 한반도 민중의 고통이 민족모순이라는 본질과 유관한 것이라면, 그 본질의 현현을 이반이라는 한 예술가의 실존으로부터 명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본질의 현현으로서의 존재'라는 사유의 틀을 넘어 본질을 재구조화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행위자 주체로서의 실존'을 위해 투쟁해왔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반, 특히 분단의 상황을 예술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자로서의 예술가 이반은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상황의 본질로부터 이탈하려는 실존의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분단작가로 불리는 예술가 이반은 개인사적인 삶의 고통을 딛고 분단의 어두움을 넘어 통일과 생태의 예술행동을 펼쳐왔다. 이런 맥락에서 이반은 실존적이며, 이반의 예술은 이 질곡의 20세기 한반도를 살아온 실존의 몸부림이다.

그는 이번 사건에 관한 장문의 글에서 밀란 쿤데라의 시, <시인이 된다는 것>의 일부를 인용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행동의 끝까지 / 희망의 끝까지 / 열정의 끝까지 / 절망의 끝까지 /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 그전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 왜냐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는 자신의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화가가 된다는 것 역시 더욱 더 그러한 법이지”.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그림을 단 한 점도 못 그리더라도 이 일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끝까지 가보는 것’이 말하는 바, 필생의 역작이 파괴된 데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술작품의 파괴는 한 작가의 저작물이 훼손당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공론장에 대한 심난한 위협이다. 예술은 작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맥락을 형성할 때 온전한 예술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2010/08/26 20:36 2010/08/26 20:36

행동하는 예술

critic & column | 2010/08/25 16:40


행동하는 예술

흔히들 예술은 순수한 것이라거나 순수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순수미술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미술이 사실은 순수하지 않다. 순수를 부르짖은 미술일수록 당시의 제도와 주류 속에 철저하게 영합하여 살아남은 미술권력일 가능성이 크다. 그 반대로 현실과 부딪히며 시대정신을 구현한 예술가들에게는 불순한 예술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주류의 미술권력과 비주류의 전위예술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순수한 예술인가? 순수에 대한 개념규정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지겠지만, 예술 개념의 태동과 변화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후자의 예술이 순수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전근대적인 생산과 매개, 유통 체계로부터 이탈해서 예술적 표현과 발언이라는 자율성을 획득한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근대적 의미의 예술개념이 자리잡았다. 물론 전근대 시기에도 사회와 예술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회와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늘 동행한다. 사회는 고정불변의 구조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동하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예술도 한 가지 이념이나 태도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한 시대의 주도적인 예술담론은 이후 시대의 극복 대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을 삶과 사회를 반영하는 틀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관한 해석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의 변동에 따라 그 구조를 반영하는 시대의 유산이다. 예술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와 예술의 상동성은 단선적이지 않다. 때로는 예술이 사회의 변화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한 발 앞서 미래를 내다보고 그 비전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곤 한다. 시대의 선구자로서 예술가들이 일궈놓은 찬란한 유산은 20세기의 위대한 전위예술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술언어의 자기완결성이나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의 자율성 논리에 천착한 나머지 사회와의 접점을 거부한 탈접점의 미학으로 일관했을 때, 예술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의 언어로 작동할 수 없었다. 이 고착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복의 가치가 탈근대 예술에 들어있다. 행동하는 예술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예술과 사회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접점을 찾아서 진화하고 있다. 사회는 움직인다. 예술도 함께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그 변화를 앞당기기 위해 한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예술이다. 변화하는 사회 속의 행동하는 예술. 동시대 예술담론의 최전선이 여기에 있다.

김준기(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대전일보, 한밭춘추 기고문

2010/08/25 16:40 2010/08/25 16:40

한큐협 월례포럼 + 대시미 아티스트 스터디 201008

artpd clip | 2010/08/19 04:05


한큐협 월례포럼 + 대시미 아티스트 스터디 201008

행사명 : 한큐협 월례포럼 + 대전창작센터 아티스트 스터디 201008
주최 : 대전시립미술관, 한국큐레이터협회
주제 :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
스페셜 게스트 : 서은아(비디오타주 큐레이터, 홍콩)
장소 :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일시 : 2010년 8월 28일 토요일 오후3시-

대전시립미술관과 한국큐레이터협회는 그동안 각각의 정규 토론 프로그램을 공동주최 행사로 묶어서 진행합니다. <한국큐레이터협회 월례포럼 2010>은 해외 큐레이터들을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해서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벌임으로써 국내외 큐레이터들 사이의 공통 의제를 개발하고 상호 이해증진과 교류 증진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대흥동 소재 대전창작센터에서 아티스트 스터디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발제와 토론 방식의 담론생산 장을 열어왔습니다.

이번 행사는 홍콩의 큐레이터 서은아를 초청하여 대화의 자리를 갖습니다. 홍콩의 아시아 뉴미디어 협력기관인 '비디오타주 Videotage'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베이징 중심으로 알려진 중국현대미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합니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 주목한다거나, 시장체제에 대한 순응이 아닌 대안적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광활한 영역에 걸친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면면을 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 2010.2.20 동북아시아의 현대미술 네트워크 형성의 전망과 과제,
             차이 짜오이(국립타이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2010.3.27 이가라시 리나(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큐레이터)
* 2010.4.10 리춘펑(독립큐레이터, 홍콩)
* 2010.5.15 한스 D. 크리스트(슈트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 디렉터)
* 2010.6.12 하정웅(재일교포 콜렉터)
* 2010.7.24 조이스 판(싱가포르현대미술관 큐레이터)
* 2010.8.28 서은아(비디오타주 큐레이터, 홍콩)

스페셜 게스트 소개
서은아는 홍콩 기반의 큐레이터로서 동북 아시아와 광저우, 선전, 홍콩등지의 Pearl River Delta 주장강 삼각지역 도시들간의 사회적 이슈와 세계화 그리고 지역문화를 잇는 아시아 문화예술 교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Fudan University에서 중국학을 전공하고 Para/Site CTP 08/09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큐레이터학과 비평이론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홍콩의 아시아 뉴미디어 협력기관인 '비디오타주 Videotage'에서 전시기획과 학예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Migration Addicts"와 2008년 광저우 트레날레 "Organising Mutation", 2009년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Backroom Conversation", 아트 허브 아시아 "Making New Silkroad", 홍콩 "October Contemporary 2009"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기획전시로는  "FEIGNED INNOCENCE //The other eyes: Intruder - Stalker//", Thank You Art Day 10' "A Surprised Live chat section", "DUBBLE HAPPINESS: A Story of Siamese cities" 등이 있다.

발제 내용
중국현대미술의 전반적인 흐름을 아시아 현대미술의 한 카테고리로서의 거시적 맥락에서 접근하여 살펴보고 특히 2007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에 야기된 중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과 대안, 그들의 생존 방향등에 대하여 살펴보고, 중국 현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Inside-Outsider- 체제안의 비주류'로서 중앙이 아닌 '변방주의'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여 본다.  또한 아시아 지역에서  新  'Lost Generation' 이란 키워드가 갖는 의미와 최근 중국 중앙정부의 언론 탄압과 검열에 반한 홍콩의 인권자유운동, 그리고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반정부 활동과 이 지역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살펴보고, 이들의 활동을 함께 모아 반영한 최근의 프로젝트들에 대한 소개와 아시아 현대 미술을 다루는 새로운 접근방식 그리고 이에 따른 담론 공유를 시도한다.

서울아트가이드, 한국큐레이터협회 소식, 12줄
한국큐레이터협회(이하 한큐협)는 8월과 9월에 걸쳐 중국현대미술에 주목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이어간다. 한큐협은 대전시립미술관과 공동주최로 <한큐협 월례포럼 + 대시미 아티스트 스터디 201008>(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8.28)를 열었다.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제로 한 스페셜 게스트 서은아(비디오타주 큐레이터, 홍콩)의 발제를 토대로 다양한 토론을 벌였다. 그는 베이징 중심으로 알려진 중국현대미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했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 주목한다거나, 시장체제에 대한 순응이 아닌 대안적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면면을 다루었다.
이른바 ‘체제안의 비주류’를 ‘변방주의’로 명명한 발제자의 시각은 특히 홍콩의 대안적인 예술행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명쾌하게 드러났다. 여러 도시의 큐레이터들과 대전의 미술인들이 모인 이번 토론 장은 한국의 지역주의 담론을 중국의 변방주의 흐름과 대별하면서 상호지역주의 관점을 모색했다. 중국현대미술에 대한 논의는 한큐협과 광주시립미술관의 공동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움 <동아시아현대미술의 지형도>(9.15(수), 14-17시,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로 이어진다. 박천남, 주치, 이병남 등이 각각 한중일의 현대미술에 대해 발제하고 토론을 벌인다.

서울아트가이드, 한국큐레이터협회 소식, 10줄
한국큐레이터협회(이하 한큐협)는 8월과 9월에 걸쳐 중국현대미술에 주목하는 토론과 학술 프로그램을 이어간다. 한큐협은 대전시립미술관과 <한큐협 월례포럼 + 대시미 아티스트 스터디>(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8.28)를 열었다. “중국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제로 한 스페셜 게스트 서은아(비디오타주 큐레이터, 홍콩)의 발제는 베이징 중심으로 알려진 중국현대미술을 중심이 아닌 변방에 주목했으며, 시장체제에 대한 순응이 아닌 대안적 활동에 주목했다. ‘체제안의 비주류’를 ‘변방주의’로 명명한 발제자의 시각은 특히 홍콩의 대안적인 예술행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토론시간에는 한국의 지역주의 담론을 중국의 변방주의 흐름과 대비하면서 상호지역주의 관점을 모색하기도 했다. 중국현대미술에 대한 논의는 광주시립미술관과의 공동주최 학술제로 이어진다. 오는 9월 15일(수) 오후2시에 광주의 상록전시관에서 열리는 학술행사 <동아시아현대미술의 지형도>에서는 박천남, 주치, 이병남 등이 한중일 3국의 현대미술에 대해 발제하고 토론한다.


 

2010/08/19 04:05 2010/08/19 04:05

면점선, 임영선 : 서울아트가이드, 이달의 전시

critic & column | 2010/08/19 03:44


면을 넘어 선에 서고 선을 지워 점에 서다, Space SSEE

이 전시는 평면과 영상, 설치 등에 걸친 작품들로 미술시장의 권력화에 대비되는 예술적 사유를 모색했다. 주제가 아닌 매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시이면서도 다양한 의제와 형식을 제시했다. ‘드로잉적 사유’를 내건 이 전시는 사물의 팽창 흔적을 보여준 허구영, 디지털 프린트와 한지 위의 드로잉으로 각기 다른 시각언어의 맥락화를 시도한 남정애, 특유의 항냥스러움으로 개념적 오브제 설치를 보여준 김학량, 공간을 유영하는 인간의 행위 영상을 선보인 박정선 등의 작업으로 면점선의 사유를 맥락화 했다.

On the Earth-TIBET : 임영선, 313 아트 프로젝트

현대문명의 물신화를 넘어서는 영성의 땅 티베트. 임영선은 그곳의 탈속의 성스러움을 예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곳 아이들의 맑은 얼굴과 자연의 숭고함과 더불어 공동체의 신산한 삶이 배어있다. 회화적 감수성을 잘 살린 살아있는 감각적인 붓질이 돋보인다. 국가주의 패권이 지배하는 동토에서 만난 어린아이들을 공들여그린 임영선의 초상화들은 야만적인 폭력의 문명 세계에 소수자들의 소외상황을 투척했다.

2010/08/19 03:44 2010/08/19 03:44

서로의 예술

critic & column | 2010/08/18 17:46


서로의 예술

다른 나라 사람에게 자기 나라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주는 것을 ‘상호주의’라고 한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태도를 가지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가치이다. 국가주의나 지역주의는 서로의 가치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국가주의(nationalism)는 국가와 지역의 이해와 요구를 우선시하는 태도로서 개인이나 계급 등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가진다. 지역주의(regionalism) 또한 지역의 가치를 최우선시 한다. 이들 이념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넘어서려는 것이 상호주의이다.

‘서로 상(相)’과 ‘서로 호(互)’를 묶어쓰는 ‘상호(相互)’라는 말이 외교 문제를 넘어 예술 영역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문화적 합의나 관행을 넘어서는 예술언어의 국제적 소통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전지구를 단일한 코드로 통일했다. 이른바 문화제국주의 양상이다. 예술소통의 국제성은 이미 근대 초기부터 이뤄져왔다. 국가단위를 넘어서는 예술소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국가적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지구적인 보편타당성을 인정받은 유럽의 예술 콘텐츠는 지역적 차이를 간과한 채 전지구에 걸쳐 군림해왔다.

이 때문에 예술 영역의 상호성이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바로 이 막힌 지점으로부터 ‘서로의 예술’이 태동한다. 제국주의를 국제주의로 전환하는 역발상이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개인과 계급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상호국가주의, 즉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커뮤니케이션도 이른바 국제주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문화제국과 문화식민의 관계가 창궐하다. 따라서 국가 단위의 상호성을 넘어서는 지역 단위의 상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대한민국의 한 도시가 중국이나 유럽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상상한다거나, 또는 한 도시의 규모를 토대로 국가 단위의 상호성을 꿈꾸는 것은 허황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도시가 적절한 규모와 성격의 다른 도시를 카운터파트로 설정해서 상호성을 모색하는 게 적절하다. 상호지역주의(inter-localism)도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나라와 나라의 차이, 지역과 지역의 차이, 개인과 개인의 차이를 섬세하게 성찰해야 한다. 지역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 지역주의의 가치를 토대로 그것을 상호주의 관점에서 나누는 ‘서로의 예술’.  정보화시대, 전지구화시대, 문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시대의 새로운 좌표이다.

김준기(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대전일보 한밭춘추 기고문

2010/08/18 17:46 2010/08/18 17:46

상품이라는 물신에 관한 메타상품의 역설

critic & column | 2010/08/13 21:18


상품이라는 물신에 관한 메타상품의 역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 물질이나 재화이다. 그 가운데는 인간이라는 상품도 있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팔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인류는 이전의 수만년 역사 동안 만들지 못했던 자본주의라는 놀라운 체제를 만들어냈다. 노동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상품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이다. 인간은 생산의 주체이자 동시에 소비의 주체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인간은 생산자로서, 동시에 소비자로서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총제적인 소외를 주선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상품이다. 이이정은은 생산주체로서의 인간이 만들어낸 상품이 소비주체인 인간을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충실한 행위자로 구조화하는 방식을 성찰한다.

노동의 소외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유발하는 뿌리와 같다. 예술노동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이정은은 그림 그리기라는 예술노동을 통해서 현대사회에 있어 상품의 위치를 성찰하는 회화작품을 생산한다. 심각한 수준에 이른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속에서도 자율성의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예술노동을 수행하는 예술가 이이정은이 상품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판적인 시각을 담는 일이다. 그는 애초에 종교나 사회, 자연 등에 내포된 힘의 관계를 그리다가 대형마트 공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상품논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쇼핑을 즐기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소비대중으로서 이이정은은 스펙타클한 소비 공간으로부터 출발했다. 가끔씩 만나는 대형마트의 공간은 때로는 호젓함으로, 때로는 우울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쇼핑공간에 대한 그의 느낌은 곧 치열한 공간 탐구로 이어졌다.

대형마트는 자본주의 사회의 유통 시스템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현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구획된 자본주의 체제의 일상 공간이다. 시장체제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명쾌하게 집약하는 공간 속에서 자본주의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대형마트의 실내공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작업은 노작의 결과이다. 그는 특유의 섬세한 붓질로 얇게 발라 그린다. 회색벽과 컬러풀한 상품들의 대비를 역설적인 매력으로 읽어낸 그의 작업은 자본주의 소비공간의 판타지에 대한 매료된 일상인의 감성 그 자체였다. 쇼핑은 현대인에게 있어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과정이자 놀이이다. ‘싫지만 예뻐보이는’ 그 공간 속에서 이이정은은 미적 쾌감을 얻었다. 그의 초기작에는 이러한 아이러니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극단적인 모순을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다’는 이이정은의 역설이 성립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무색무취의 중립공간 같아 보이는 코스트코 공간은 마트의 표상이며 소비사회의 스펙타클을 구현하는 공간이다. 가득 쌓아놓고 빨리 빨리 물건을 회전시키는 대형마트의 디스플레이 방식은 그 자체로 시각적인 흥분과 호기심을 자아낸다. 마트공간은 디스플레이의 심미성을 고려하지 않고 쌓기의 효율성을 우선시한다. 한마디로 ‘그냥 쌓기’다. 그 무지막지한 디스플레이가 소비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 그것은 근대사회의 격자구조, 단순한 구조의 반복을 통해서 효율적인 구조를 시각화하는 근대의 시각과 닮았다. 대형마트 공간에서 가득 쌓인 상품들의 격자구조를 통해서 원근법의 소실점을 발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숭고를 가슴 깊이 뼈저리게 체험하곤 한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기호와 취미에는 절대적 법칙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이정은의 ‘상품비판’은 상품의 소비에 있어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기준이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는 상품을 포장한 텍스트를 흐릿하게 그려 읽히지 않는 이미지로 만들어 버린다. 완벽한 호감도 아니고 비호감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감각을 회화의 장 위에 묶어 둔 것이다. ‘(마냥) 좋아할 수많은 없는’이라는 작품 제목은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실현하고 있는 마트 공간에서 가진 낯선 느낌의 단서이다. 소비자와 상품의 만남을 매개하는 마트공간에 대한 이이정은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있다. 그렇더라도 그가 회화적 상징을 통해서 상품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드러내고 있는 것은 소비사회에 길들여진 우리의 감성 그 자체이다.

근래의 이이정은 작품은 상품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대형마트에서 만난 상품 이미지를 차용해서 다양한 변주를 연출하고 있다. 첫출발은 박스로 포장된 상품들을 화면 가득 그려 넣는 것이었다. 특히 패키지 상품들이 덩어리들로 묶여서 가득 쌓여있는 상황을 화면에 끌어들인 것이다. 포장된 사물들은 사물의 본질을 가린다. 그는 본질을 가리고 있는 포장의 외형을 그림으로써 포장 그 자체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기능하는 상품의 물신화를 드러내고 있다. <Beautiful boxes and bottles> 연작은 시럽이나 와인, 잼 등과 같은 상품의 내용물보다는 상품의 포장에 집중한다. 그는 상품 포장 박스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물건과 물건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면서도 그것을 그리드의 연쇄로 이어서 수직정렬의 엄격한 규칙 아래 놓이게 한다.

그는 말한다. ‘유혹적이면서도 위험하고, 비천하면서도 거룩한 물건들이 여기 이렇게 가득 쌓여있다’라고. 비판은 비난이나 혐오와 다르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일이다. 이이정은이 상품의 환영인 상표를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드카라는 액체 상태의 마실 것을 사용하는 이면에 그 겉면을 장식하고 있는 술병과 상표의 디자인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상품의 안과 겉을 살펴 분간하려는 마음으로 포장과 상표를 그린다. 그는 이후의 최근작에서 마트보다 더 마트답게 상품 쌓기를 시작했다. 쌓기의 마력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는 그의 작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문명비판이다. 그는 기념비적인 건축의 외형과 패키지상품의 박스를 결합하기 시작했다. 마트의 실내 공간 그리기와 상품 쌓기 작업의 순연관계가 근작을 낳았다. 패키지 상품의 박스들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뻗어 올라가며, 우리시대의 거대한 우상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소비시대의 기념비이다.

<somebody else's MONUMENT> 연작은 패키지 상품의 운명과 그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껍데기의 존재론에 주목한 초기작의 관심사를 사회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그가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를 그린다는 것은 현상을 통해서 본질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성찰이 들어있다. 껍데기의 현현이 상품의 재현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그 껍데기들 자체의 존재론과 그 너머의 사회적 맥락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이이정은의 최근 관심사이다. 건축의 외형을 가진 모뉴먼트는 역사 또는 일상의 기억을 담아두려는 의도이다. 이이정은의 회화는 우리시대가 소비하고 있는 상품과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박스와 상표 등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한순간 쓰이고 사라져버리는 패키지 이미지를 이용해서 오래된 건축물인 지구라트를 만들거나 고층빌딩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것은 상품이라는 물신에 관한 기념비적인 역설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는 바로 그 순간에 물신숭배 현상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상품을 통해서 물신(物神)의 현존을 확인하게 하는 이이정은 자신의 예술노동 생산물은 일반 생산물보다 더 높은 물신적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품을 그린 이이정은의 예술작품은 고급문화의 장에서 통용되는 (메타)상품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는 작은 터치들이 살아있으면서도 풍부한 디테일을 가진 거대한 화면을 구축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을 투여했을 것이다. 상품비판을 실천한 예술가의 노작 또한 (메타)상품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이 역설.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메타)상품으로서 자본주의 상품논리를 성찰하는 이이정은은 그래서 자신의 예술 앞에서 더욱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첨단의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젊은 예술가 이이정은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인 상품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한다.

김준기(미술평론가) )

2010/08/13 21:18 2010/08/13 21:18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에 관한 단상

critic & column | 2010/08/13 06:55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에 관한 단상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정치경제학’으로 불린다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정치문화학’으로 불릴만하다. 이 책은 문화 혹은 예술의 장(場)이 계급과 권력의 문제와 얼마나 가깝게 붙어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사회관계-상징 자본이 지배-중간-민중 계급을 구별짓는 차이를 만들고 지키는 뿌리임을 밝혔다.
2010/08/13 06:55 2010/08/13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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